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박판식 시모음 본문
1973년 함양출생
200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2004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시집 - <밤의 피치카토> 2004년
천년의시작
처마 아래 작은 집
이제 비가 오면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도
겨울이면 내달리던 고드름도 없이
문밖만 내다보는 흙 묻은 내 신발코를 가슴 쪽으로 돌려놓으시고
어머니는 철없이 싹이 돋은 감자를 수저로 긁고 계신다
새로 집을 수리하고 어머니는 반이나 쪼그라들었다
안방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 없어지고
툇마루가 없어지는 동안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나
옛이야기를 조르면 어머니는 돋보기를 쓰고
오히려 내게 귀를 기울이신다
생각나세요
겨울이면 제비들이 날아가 행복하게 산다던 멀고 아름다운 나라
그런데도 봄이면 곧잘 돌아오는 새들을 보며
우리는
처마 아래를 조심스레 뒤져보곤 했어요
해마다 높은 곳에 푸른 잎을 매달던 마당의 오동나무
아침이면 커다란 잎들이 마당 가득 쏟아지곤 했지요
어머니는 동생과 나를 낳고 반이나 쪼그라들었다
우리가 빠져나온 어머니의 몸은
힘겹게 집을 이고 있는 비오는 날의 달팽이
같고
달팽이 같은 어머니는 돋보기를 쓰고 내게 귀를 기울이신다
어머니 오늘은 옛집에 다녀왔어요
섬돌에 얹힌 낯선 신발들이 어찌나
커다랗게 보이는지
아는 척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답니다
골목
한 사람이 죽고 나니 온통 버릴 것 투성이다
아프다고 어렴풋이 들었던 옆집 할머니 돌아가시고
오늘 골목엔 때묻은 살림살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곧 떠날 준비들
하고 앉았다
비라도 내릴 듯 꾸물꾸물한 날씨에
몇 달째 치우지 않았던
할머니 집 연탄재가
허물어지고 말았다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이 결국 오늘
드라이브
우리는 분명히 길을 잘못들었는데 헛간으로 농장의 울타리로
어둠으로 우리의 예민해진 육체로 가까운 절벽의 파도소리로
여름밤의 전등 곁으로 오래된 불면증으로 방전된 헤드라이트로
터져버린 폐혈관으로
회오리치며 뻗어나가는 등나무의 생장점으로
우리의 인생과 무관한 비탈진 자갈길로
같은 장소로 되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언제나 더
멀어져 가기를 바라면서
겨울날
새들의 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아무리 잽싸게 움직여도
끝내 그곳에 닿지 못하리라
죽은 새 한 무리를 남겨 두고
겨울새들은 모두 늪지를 떠났다
어린 새들을 죽인 추위는 두꺼운 얼음으로 다시 새들을 매장했다
엄마 잃은 조카들을 데리고 강으로 나갔다
사람은 무엇으로 자신들의 불행을 다스릴까
아이들이 모래무지 속에서 어린 새들을 주워왔다
한 녀석은 딱딱한 깃털 속의 날개를 만지작 거렸고
한 녀석은 새들을 묻어 주자고 졸랐다
결국 물을 빼낸 질퍽거리는 미나리꽝에 새들을 밀어 넣고
추위에 벌려진 딱딱한 두 손을 모으고 잠시 침묵했다
아이들의 팔과 손가락 사이에서 부풀어 오르는 사구
우리는 진흙 구덩이에서 뽑아내는 우리의 짓궂은 발소리에 놀라 웃었다
그리고 곧장 경쾌한 발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가을장마
지난 여름, 주인집 할머니는 장독 하나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가을 장마가 할머니를 대신해 물을 채워 놓았다
자꾸만 출렁거리는 수심이 불편하여 마침내 장독을 뒤집었다
세찬 물줄기는 가닥가닥 얽힌 한 여자의 몸뚱이 같은 장독의 물을
실타래처럼 뽑으며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이상하기도 하다,
새들의 울음소리로 문득 가을장마가 지나갔음을 안다는 것은
납덩이처럼 무거운 물방울들이 휘어진 전선에 매딜려
이 모든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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