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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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성 시모음

휘수 Hwisu 2006. 4. 13. 00:22

 

1978년 충남 연기 출생

2002년  고려대학교 서양학과 졸업 
2001년 <현대시> 등단

2005년 시집 <목숨> (천년의시작) 

 

 

 

이명

 

1


귓속으로 기차가 들어왔다
기차는 며칠 째 철로를 달리고 있다
파도가 칠 때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귀,
해안선이 일제히 내 안으로 휘어진다
기차는 귓속을 뚫고 관자놀이 지나
심장까지 온다 바퀴 소리가 온 몸의 혈관을 달군다

 

2


정맥 어딘가에
그대의 음성이 엎질러졌을 뿐
깨어있는 것들은 모두 불안했다

아홉 번째 다리에 서 있는 기분이야
발밑으로는 강물 소리가 들려
폭죽이 터지는 하늘은 어떨까
시베리아 한 가운데를 달리고 싶어 빠리까지 말야
온갖 타악기를 태우고 기차는 어디로 가는 걸까

 

3


기차가 왼쪽 심장으로 나간다
그대를 배웅하러
알프라졸람이 온 몸 으깨어서 간다
진동이 멎을 것이다 耳鳴,
열차에서 내린 그대가 다시 하행선을 탄다
귀 밖으로 멀어지는 그대
그대는 어디에서 파도를 몰고 오는가

 

* 알프라졸람 : 항불안제의 일종

 


 

나쁜 피

                        - 동물의 왕국  

 오늘은 큰 소리 내지 않겠습니다 낙엽 지면 겨울나무 떼 지어 몰려옵니다 의사 선생님, 記憶을 지워주세요, 2월이구요, 강박적으로 새 순 틔워내는 나무들 창문 틈으로 쳐들어오는데, 의사 선생님 기억을 지워야해요 현대 의학이 단말! 조용히 할게요, 뇌 일부분은 도려내도 괜찮아요, 나도 좀 살아야겠어요 도마뱀 다리 잘려도 파닥파닥 사막 위를 몸으로 가는 것처럼, 동물의 왕국, 보셨잖아요, 싹둑, 그 기억만 지울 수는 없나요, 햇볕을 누가 볼록렌즈에 모으고 있나 머리가 뜨거워요, 어젯밤엔 주사바늘 꽂다가 선인장 될 뻔했어요, 분열되는 것이야 세포들이고, 분열된 정신에다가는 이성복 시집 한 권, 금강 한 물결 꽂아 주시구요 나를 계몽하려 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 기억을 지워야 한다니까, 어머니는 일 나갔고 아버지는 철근과 콘크리트 사이 담배 피우고 보호자는 의사 선생님이에요, 뭐? 돈 없는 놈은 발작도 마음대로 못하냐! 어, 어, 그 주사 안 치워 , 죽(어/여) !  

                                                                                   

 

 식탁 위의 컵라면

 

 

 라면국물이 며칠 째 고여 있다 먹다 남긴 면발은 형체를 알 수 없이 부패했다 어떤 연대기도 없이 라면국물은 색깔 바꿔 가는가 국물의 표면은 편년체다 검은 연대로 둘러싸인 주황색 부분은 병마용 발굴된 古代 섬서성의 황토흙빛,

 

 중세가 암흑 시대라는 해석은 부패한 면발을 옹호하기 위한 수작이다 검은 색을 통과해야만 그 다음으로 갈 수 있다 나는 얼마나 열병 같은 사랑을 부정해왔는가 밤의 한강다리 건너면서 눈 질끈 감고 흔들렸는가 마침내

 

 마침내 푸른색의 곰팡이여 완벽하게 썩은 채로 스티로폼 그릇 속에서 푸르게 타오르고 있는 곰팡이여 썩을 수 있음의 至福을 누리고 있는, 돌아갈 수도 없는 참혹한 내 사랑이리니 네 빛깔이 여기까지 왔구나


 

동백 신전 
            
   동백은 봄의 중심으로 지면서 빛을 뿜어낸다 목이 잘리고
서도 꼿꼿하게 제 몸 함부로 버리지  않는 사랑이다  파르테
논도 동백꽃이다  낡은 육신으로 낡은  시간 버티면서  이천
오백 년 동안 제 몸 간직하고 있는 꽃이다 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먼 데서부터 소식 전해오겠는가 붉은 혀 같은  동
백꽃잎 바닥에 떨어지면 하나쯤 주워  내 입에 넣고 싶다 내
몸 속 붉은 피에 불지르고 싶다 다 타버리고 나서도 어느 날
내가 遺蹟처럼 남아 이 자리에서 꽃 한 송이  밀어내면 그게
내 사랑이다  피 흘리면서 목숨  꺾여도 봄볕에  달아오르는
내 전 생애다

 

 

장미와 장마 사이

 

장미가 시들면서 기온이 올라가고
습도가 높아졌다 추악하게
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장미가
저기압의 구름들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28번을 타보면 안다 우이동에서부터
강남 일대까지 장미 軍團이 서울을 점령했다
오월의 겨드랑이나 허벅지 같은 곳 이를테면
홍릉 수목원 버드나무 아래에서 연인들은 키스를 해댔다
이파리에서 가시로 점프하는 벌레, 어머니는
김치를 가방에 담아서 올라왔다 등이 굽은 노인이
느릿느릿 걸어가고 아이들은 철수 바보, 영순이 병신
이런 글자들을 벽에 陰刻했다 어떤 절실함도 없이
애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새벽
측백나무 뾰족한 가시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장미, 장미, 장미의 계절, 공중에서 부유하는
날벌레 떼가 가로등에 모이기 시작했다
반지하 창문 아래에 누워서 빗소리를 들어도
뿌리까지 젖지는 못했다 나무의 뿌리 깊이에서
다운받은 음악 파일을 밀어 올려도
옆집 여자는 카드 빚을 진 아들과 자꾸만 싸웠다
장마가 올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습기가 파고들겠지 어서 오시라
모든 것이 부패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집
방부제처럼 나는 혼자서 싱싱하리라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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