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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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수 Hwisu 2006. 7. 11. 00:22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로 등단
현재 전라북도 마음 사랑병원 근무


살구꽃

 

 해마다 4월이면 쌀 떨어진 집부터 살구꽃이 피었다
 살구꽃은 간지럽게 한 송이씩 차례대로 피는 것이 아니라 튀밥처럼, 겨우내 살구나무 모퉁을 오르내리며 뜨겁게 제 몸을 달군 것들이 동시에 펑, 하고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검은 눈망울을 단 아이들이 맨발로 흙밭을 뒹구는 한낮에 피는 것이 아니었다
 살구꽃은 낮은 지붕의 처마 밑으로 어둠이 고이고 그 어둠이 꾸벅꾸벅 조는 한밤중에 손님처럼 가만히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벽이 오면 오갈 데 없는 별들의 따듯한 거처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이 핀 아침이면 마을 여기저기에서 쌀독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바닥의 깊이를 아는 사람들은 서둘러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굴뚝의 깊이만큼 허기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살구꽃은 안쓰럽게 몇 개의 잎을 떨구어주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살구꽃이 함부로 제 몸을 털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살구꽃은 뜰에 나와 앉은 노인들처럼 하루 종일 햇살로 아랫배를 채우며 시간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제 몸의 모든 기운을 한곳으로 모아 열매를 맺고 난 뒤, 열매가 단단히 가지 끝에 매달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타깝게 지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살구나무 아래에서 흙장난을 하며 놀던 아이들의 얼굴 위로 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풋살구를 털 때까지 얼굴 가득 버짐 같은 살구꽃을 달고 잠이 드는 것이었다

 

  도배를 하다가


        도배를 한다
        방 보러 와서 잠깐 마주쳤던, 전에 살던 젊은 부부처럼
        등이 얇은 벽지를 벗겨내자

        한 겹 초벌로 바른 신문이 나온다

 

        나는 전에 살던 젊은 부부가 떠나던 날을 기억한다
        벽지 뒷면에 바른 묵은 신문처럼
        쉽게 찢어지는 청춘을 내면 깊숙이 묻어두고
        천천히 돌아서던 그들을 향해
        나는 하마터면 손을 들어 작별인사를 할 뻔했다
        그들은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서로의 어깨를 감싼 채 트럭에 올랐다
        사내는 말이 없었고
        아이를 안은 여자는 자꾸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일 톤 트럭 짐칸을 반 넘게
        쓸쓸함으로 채우고 떠난 그들은
        세면대 위에 닳은 칫솔 하나를 남겼다
        얼마나 많은 날들이 그 위에서 저물어갔던지
        칫솔모는 빳빳했던 기억들이 주저앉아 있었다

 

        새로 사온 꽃무늬 벽지를 자르고
        풀을 먹여 벽에 바르면서
        나는 벽지 뒤로 사라지는 그들을 보았다
        분명 한 시절을 총총히 걸어왔을 각오들이
        빛바랜 배경으로 시무룩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힘의 균형

1
용龍 한 마리 보았다
용은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드나들며
눈부시게 빛나는 푸른 비닐을 자랑하고 있었다
용 주변에는 전갈이나
코브라 같은 맹독류들이 눈을 부릅뜬 채
한증막의 폭염을 견뎌내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제가 떠나온 사막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가끔씩 어푸어푸 가쁜 숨을 내쉬기도 하였다
일심一心과
화살 꽂힌 심장과
착하게 살고 싶은 욕망은
벌겋게 달아오른 몸으로 샤워기 앞에 서서
오래오래 비누칠을 하였다
가끔은 눈가를 훔치며 몇 방울의 눈물을
비누거품 속에 흘려놓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참회의 눈물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우연히 혹은 정기적으로 찾아온 사람들은
아무것도 빛날 것 없는 제 몸을
피멍이 지도록 닦아대다가
갑자기 약속이라도 생각난 표정으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2
비쩍 마른 반바지 사내가 들어와
두 팔을 허리에 척 걸치고 용을 불렀다
마침 온탕에 들어앉아 나른하게 졸고 있던 용이
눈을 번쩍 뜨며 쪼르륵 달려와
반바지 사내 앞에 넙죽 엎드리는 것이었다

 

빨간 모자를 쓴 사내 

 

바람이 불어 흔들릴 때마다
빨간 모자를 쓴 사내, 제 발 밑에 구름 떠 있는 줄 모르고
휘이익- 휘파람을 불었다 옆구리에 걸어놓은 물동이에서
비눗방울 몇 개 비명처럼 날아오르고
그래도 믿는 건
하늘 어디쯤 매달린 동아줄 한 가득
그는
먼지 앉은 유리창을 힘주어 닦는다

 

언제나 아래로만 내려가는 삶
더러는 윤기 나는 생활을 꿈꾸기도 하면서 그 사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닦는다
세상의 얼룩은 찌들어만 가는데
삶은 왜 이렇게 가벼워지기만 하는 걸까
닦고 또 닦아도 선명해지지 않는 얼굴이 있어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 간신히 매달려 있는 낯선 사내 울 듯 말 듯
그 사내 서둘러 마른걸레로 훔쳐낸다
누가 그에게 동아줄을 내려주었을까
가끔씩 허리를 묶은 동아줄을 확인하면서···· 제 삶을 확인하면서
그 사내
비눗방울 같은 휘파람을 분다
또 한번 줄을 풀고 내려가면
거기에도 흐린 얼굴 하나 떠 있을 거야
흔들리면서 그 사내 바람이 된다

 

걸레질을 멈추고
잠깐 생각의 끈을 놓았을 뿐인데
빨간 모자를 쓴 사내
어느덧 구름 위에 떠서···· 휘파람처럼 메아리 없이 떠서
그의 삶처럼 습기 많은 먹구름을 닦고 있다

 

 

벽이 헐린다
며칠째 안개는 유령처럼 이 도시에 출몰한다
타관에서 왔다는 굴삭기 기사는
오래된 성벽 같은 이 도시의 벽을 허물고 있다
안개는
벽이 허물어진 자리에 또 하나의 벽을 만들고
타관 사람은 열심히 벽을 허문다

 

이 도시는 온통 낡은 벽뿐이다
사람들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습관처럼 돌아다닌다
이 도시를 떠나보지 못한 사람들은
벽 속에 갇혀 사랑을 하고
벽 속에 갇혀 아이를 낳고
벽 속에 갇혀
스스로 하나의 벽이 되는 법을 배운다

 

타관에서 왔다는 굴삭기 기사는
쉬지 않고 벽을 넘어뜨린다
그러나 안개에 묻힌 벽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들판이었을 이 도시에
벽을 세우기 시작한 사람들의 역사처럼
낡았지만 고집불통인

 

 

안개 속을 사람들이 걷는다
사람들은 익숙한 걸음으로 벽이 있던 자리를 돌아
벽 속으로 사라진다
굴삭기가 허물어뜨린 벽 대신
유령 같은 안개가 떠받들고 있는 옛 지붕들
타관에서 왔다는 굴삭기 기사는
안개에 갇혀 방향을 잃은 채
헛손질하듯 같은 곳만 헐어대고 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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