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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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화 시모음

휘수 Hwisu 2006. 7. 7. 19:34

경북 의성 출생
효성여자대학교 국문과 졸업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그리운 연어> 2006년 애지
현재 댄스스포츠 트레이너 심판으로 활동중

 

시네마 봄

 

영화 '취화선' 이 칸 영화제에서
국제적 조명을 받던 날
우리 집 정원의 모란은 어느새
봄날의 스크린 밖으로
조용히 떠나가고 없었지

그래 자고로 여배우란
인기절정의 순간에
화려하게 떠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지난날 추억의 벚꽃처럼
뜨거운 봄날의 앵콜을 뒤로 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질 수 있어야 하는 거야

그걸 잘 아는 모란은
너무도 잘 아는 우리 집 모란은
그래서,
저 황홀한 5월의 절정 속에서
미련없이 은막을 떠난 거구나

왕년에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스캔들과
요란한 화장술로 시선 끄는
그런 한물간 육체파 여배우가 되기 싫어서!

 

 나의 고금가곡

 

 선 잘 만나 광 파는 인생도 있고 광 들고 피박 쓰는 인생도 있네. 그래서 세상만사 고도리판이라 했던가? 경거망동 말라고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 다시 올 수 없다고 낙장불입이라 했다. 살다보면 희희낙락 쓰리고 부를 때도 있고 금상첨화로 씩쓸이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애써 돌던 판 나가리 될 때는 더 많고 죽어라 죽어라 패 안 풀리는 그런 날은 또 살상가상으로 독박마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봐라 삶이 어디 경전에만 있더냐? 고도리 십계명을 알고 나면 인생만사 이 손안에 있는 것을 비. 풍. 초. 똥. 팔. 삼 이 패 안에 있는 것을!

 

 

시집 <그리운 연어> 2006년 애지


여름비

 

호박잎처럼 크고 넓은 기다림 위로
투다다닥 빗방울 건너 뛰어오듯
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불볕 아래 시든 잎처럼
그 아래 지친 그늘처럼
맥없이 손목 떨구고 늘어지던
내 그리움의 촉수들이
마침내 하나 둘 앞 다투어 눈떠
사방 꽃무늬 벽지처럼
내 마음 안팎을
온통 분간 없이 휘감아 뻗고,
예고 없이 들이친 소낙비의 행렬에
또 한바탕 허둥대며 젖는 잎,
잎들 전선이 젖고 그 선을 타고 오는
그의 목소리
열대어처럼 미끈한 물비늘로 젖어와
어느 새 내 몸은 출렁출렁 심해로 열리고


후박나무 아래 잠들다

 

봄날이 와서
억세게 운수 좋은 어느 날
내게로 어떤 봄날이 와서
이 세상 모든 죽음마저 꽃피워 줄 때
나 저 후박나무 아래 들겠네
그럴 때 통영군 연화리 우도의
저녁하늘 바라보던 내 눈은
후박나무 어린잎에게 주겠네
내 잠든 동안
저 푸른 후박나무 나를 대신할 수 있도록…
아, 살면서 누구보다 고온다습했던 내 생은
누구보다 먼저 후박나무 아래 썩겠네
그렇게 한 생쯤
내 몸도 꽃잎 아래 물컹,
향기롭게 썩었으면 좋겠네
기억나지 않는 꿈처럼 그대는 영영
아주 내게서 잊혔으면 좋겠네
다시 봄날이 와서
억세게 운수 좋은 어느 날
내게로 어떤 봄날이 와서
나를 저 후박나무 심장처럼 높이
꽃피워 줄 때까지


― 시집 ‘그리운 연어’(애지) 중에서

 

오월의 들판에 껌벅이는 후박나무 잎들이 앞서 잠든 누군가의 눈동자임을 알겠네. 죽어서 눈 뜨는 천수천안이라니 얼마나 ‘억세게 운수 좋은’ 일인가. ‘억세게 운수가 좋지 않더라도’ 모든 죽음은 꽃이 된다네. 어떤 죽음도 거름이 되고, 잎이 되지 않는 죽음은 없다네. 고온다습하지 않으면 생명이 아니라네. 뜨겁지 않으면 삶이 아니라네. 그러니 살아서 활활 타오르시게. 죽어서 남김없이 썩으시게. 온전히 잊어야 새로울 것이니, 갈 때엔 행여 애달픈 임도 사랑도 뒤돌아보지 마시게. 내생에도 저 높은 후박나무 심장을 쿵쿵 울려줄 사랑쯤이야 까치가 물고 오겠지.―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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