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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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나무 시 4편

휘수 Hwisu 2007. 9. 11. 10:59

대추나무 시 4편

 

대추나무 / 장석주

 

가끔 뒤란에 대추나무가 있던 옛집을 생각한다

그 시절 나는 칸나꽃 보다 작았다

대추나무는 병든 장기수長期囚 처럼 영양실조의 기운을 보였다

연초록 잎은 이내 노랗게 변하고 열매는 볼품없었다

어느 해 이른 봄 어머니가 다섯번째 아이를 해산한 뒤

외할머니는 붉은 태반을 대추나무 아래에 묻었다

이듬해는 붉게 잘 읽은 대추들이 가지가 휠 듯 주렁주렁 달렸다

 

시집,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 (세계사)

 

대추나무 / 이정록


땅바닥으로 머리를 디미는 시래기의 무게와

옆구리 찢어지지 않으려는 어린 대추나무의 버팅김이

떨며 떨리며, 겨우내 수평의 가지를 만든다


봄이 되면 한없이 가벼워진 시래기가


스런스런 그네를 타고, 그해 가을

버팀목도 없이 대추나무는

닷 말 석 되의 대추알을 흐드러지게 매다는 것이다

  

 대추, 혀가 풀리다  /  마경덕

 
    제 몸에 불을 지른 대추. 쪼글쪼글 사지가 졸아든다 벼랑 끝에 가부좌 틀고

 한 계절 묵언에 든 수행자(修行者). 화두를 쥔 단단한 사리 한 알 중심에 박혀

 있다. 바람과 천둥이 비껴간 천신만고 나뭇가지, 뜨거운 침묵에 나무가 휜다.

 

  설설 끓는 대추. 더듬더듬 말문이 트이고 시름이 녹는다 걸쭉한 눈물이 쏟아

진다. 뭉근히 달인 대추차 한 잔. 오래 삭힌 말씀이 달다.

 

아버지의 대추나무 / 김정숙

 

쭈글해진 약 대추를 자루에서 꺼내 약탕기에 넣어 달인다
쓰디쓴 당부의 말이 주름 깊숙이 단맛으로 박힌
대추를 바라보다 아버지 생각이 간절했다
뒷짐 진 채 잎 다 떨어진 대추나무 아래 서서
붉은 열매 속 살점들을
바람에 내어 말리시던 아버지
탱탱하게 잘 여문 가을 햇살 모두 걸러 자루 속에 담으셨다
꽁꽁 밀봉해 부쳐온 아버지의 안부
자루 속 다글한 사연 하나 꺼내 베어 물자
아버지의 가을이 뭉클하게 묻어난다
약탕기 속 대춧물 달게 우러나고
잎 다 떨어진 대추나무 아래 서 계신 아버지
탱탱한 밑둥치로 겨울바람이 새어들고 있다

 

제3회 <시와창작> 신인문학상 당선작 중에서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