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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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성 시모음

휘수 Hwisu 2006. 5. 16. 16:01
1961년 강원도 양양출생

강릉고등학교 졸업

웹웰간詩 <젊은 시인들> 동인

서울 시청 재무과 근무

계간 <시작> 신인상 

 

 

그리움에 맞서다

 


   밤에, 희뿌연 그림자를 따라 나아갔었다 앵두나무 우물 근처에서 환청이 들려오고 삐걱이는 시간의 계단을 자주 헛딛다 보면 허리 잘린 그믐달이 얇은 바람소리에도 소스라치며 놀라 흰 눈썹처럼 공중에 박혀 있었다.

 

   고향집, 오래된 우물을 지키던 커다란 능구렁이가 꽃뱀의 대가리를 반쯤 삼키다 우물가에 토해놓고 스르르 바위틈으로 사라져버리던 유년의 공포 속에서 자꾸 헛손질하는 중풍 든 아버지의 가는 손가락이 언뜻 허공중에 비춰질 때마다 붉게 각혈하는 그리움이여, 몹쓸 몽유병이여…,

 

   꿈에, 나는 일란성 쌍동이었네 저 푸른 속초바다 자궁에서 태어났다네 내 동생 동해바다 붉은 해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나를 버리고 하늘나라로 훌쩍 떠났네“형, 나를 잊지 마세요” 그 푸른 파도 소리 따라 클레멘타인 노랫소리 밀려오네 불혹 지난 지금도 내 안에 출렁거리네.

 

   오늘밤, 죽은 동생이 또 나를 부르네 나는 어서 막다른 그곳으로 가고 싶네 그래 숨쉬는 동안 알 수 없는 공포가 나를 망가뜨린다해도 그 그리움이 폐허가 된 감옥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이 되고 또 다른 욕망이 되어 흘러가야 하는 모진 물살이라는 것을 아네, 그리움은 몸서리치면서 길을 만드네.

 

   아침마다, 하얗게 이빨을 드러낸
   몽유의 임종을 맞으면서 심호흡하는 그리움이여,
   일란성 그리움이여!

 

   모든 그리움은
   “내 길 내놔라, 내 길 내놔라”
   성난 물길처럼 외친다, 속으로 외친다.

 

                                                                                       

꼼짝없이, 나는

 

 눈, 왔다, 폭설이다, 이, 춘삼월에, 느닷없이, 적설량, 44cm, 오늘, 밤엔, 모두, 길, 바닥에, 갇힐, 것이다, 그래, 꼼짝없이, 미끄러지고, 자빠지다가, 여기서, 다음, 생, 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더, 이상, 깨질, 꿈조차, 없는, 빈, 하늘, 아래, 질질, 끌려가고, 있는, 지루한, 생, 어느, 것, 하나, 나를, 반기는, 이, 없었고, 그, 누구도, 나를, 다시는, 찾지, 않았다, 세상과, 두절된, 상처, 만으로, 여태, 악착같이, 버텨, 왔는데, 갑자기, 기운이, 거품처럼, 빠진다, 터진, 눈, 구멍은, 아직도, 무얼, 담고, 싶을까, 꽉, 막힌, 귓구멍으론, 어떤, 소리를, 더, 들을, 수, 있을까, 까닭, 없이, 눈물마저, 핑, 도는, 하루와, 하루, 허기진, 욕망은, 또, 무엇이든, 물어, 뜯으려, 안간힘, 쓸, 것이다, 씨발, 남의, 콧김, 쐰, 여자와, 뜨거운, 情事라도, 치르고픈, 미친, 밤인데, 이, 밤, 붉은, 욕정은, 나를, 사정없이, 겁탈하고, 물끄러미, 쳐다본다, 온, 몸에서, 갑자기, 소름이, 돋고, 질질, 고름, 나던, 귀에서는, 이명이, 들려오고, 내, 눈, 안에, 지금, 담을, 수, 있는, 것이라곤, AM 3:00의, 신, 새벽, 잠깐, 동안, 아파트, 복도에, 쫓겨나, 담배연기를, 하늘로, 피워, 올리다, 간혹, 건너편, 관악드림타운아파트, 옥상, 위에, 떠, 있는, 희끗한, 별을, 향해, 여기는, 奉天, 벽산블루밍아파트, 206동, 207호, 내, 안의, 신호로, 삿대질, 하는데, 별똥별처럼, 쏟아지는, 내, 눈물을, 차라리, 별이, 되라고, 쏘아, 올리고, 싶을, 뿐,

 

  그,
     것,
        뿐인데,

  그런. 밤. 나는. 꼼짝없이.
  내. 안의. 만리장성으로. 간다.
  저벅저벅. 간다.

 

  아.니.뛰.어.간.다.
  앞.도.뒤.도.안.돌.아.보.고.
  모.든.구.멍.의.빗.장.을.열.어.젖.히.고.
  빛.없.는.별.이.되.어.내.안.에.
  유.령.처.럼.떠.도.는.검.푸.른.절.망.을.따.러,

 

 

 

 그는 窓을 닦는다

 

어느 날부터 그는 창을 닦았다, 돌연한
실직이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유리창 속에서는 날마다 풍경이 낡아 갔다.

 

세, 상, 은,
언, 제, 나,
구, 조, 조, 정, 중, 이다.

 

뜬눈으로 창을 닦다가 간혹, 참새가
햇살을 쪼아대는 빛나는 아침을 맞기도 하였으나
바깥소문을 자세히 살필 수 없었으므로
새들의 지저귐은 더 이상 전달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장대비가 창문을 두드렸고
또 다른 날에는 발목까지 눈이 쌓였지만
아프기라도 하여 그의 노동이
잠깐씩 멈추는 날이면, 창에는 먼지가
두껍다랗게 끼고 성에가 뿌옇게 쌓여 갔다
세상은 또 그와 단절되는 것이다.

얇은 희망은 고립되었으므로
내부의 울음은 창 밖으로 번지지 않았다.

 

아무 것에도 누구에게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창을 닦을 때마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와 화해할 수 있을 때까지
세상을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창을 닦을 거야, 창을 닦을 거야.

 

먼 어느 날이 마지막 방문객처럼 찾아와
그의 죽음을 주치의가 진단했을 때
많은 문상객들은 슬퍼하였으나
그의 창 속에 펼쳐진 세상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그 영혼을 읽는다

 

  석간신문에서 구석기인이 걸어 나왔다
  활자로 찍힌 발자국마다 얼굴 없는 화석이 묻어났다
  기억하건데, 바람은 때로 한쪽으로 불었을 것이다
  서늘한 기운으로 그의 피부를 어루만졌을 지도 모른다
  나무들조차 빼곡히 늘어져 있었을 테고
  숨 막히는 정적 사이로 벌거벗은 한 사내가 빠르게 지나갔을 것이다 그는
  돌도끼를 꼬나들고 공룡이라도 사냥하러 뛰었을까
  5만 년 전, 그의 뒤를 따라가는 커다란 코끼리 등과 사슴의 뿔도 목격 될
것이다.

 

  죽음을 서로 앞서 가려고 현대인들이 자동차 경적을 빵빵거리는 아스팔트

  깊게 패인 각각의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
  를 신석기인이라고 착각할 지도 모른다
  그가 나타난 밤에는 오랫동안 돌도끼를 갈아야 한다
  꿈틀거리는 욕망을 다 씹어 삼키고 나면 미라가 되는 꿈을 꿀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정신은 느릿느릿 썩어 갈 테지만
  죽어서 숨소리 하나로 남고 싶다면 


  오랫동안 웃자란 욕망을 베어버려야 한다
  그는 내 안의 영혼을 발굴 한다
  밤새도록 그 종적을 핥아서 초록빛 엽록체의 피를 검은 내 영혼에 투석 한

  아침이면, 빗살무늬토기 모양의 무늬를 지닌 구석기인으로 태어날 것이다

 

                                                                              

아비는 숯가마에 있다

 

연화, 아비는 숯가마에 있다
칠순이 다된 아비를 만나러 무장리*로 가는 길은
12시간 배 멀미 하며 인천항으로 입국하는
것보다 멀었다 마음은
이미 숯검댕이가 되어 있었다.

 

연화, 누이는 식당에 있다
아침마다 선릉으로 출근해서 밤 11시가 넘어야
퉁퉁 부어오른 손과 발 질질 끌고
대림동 반지하 방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연화,
네 언니는 의정부에 있다
염색공장에서 늦도록 일하고
바람만 겨우 막은 컨테이너에서 3년째 살고 있다.

 

8.15 해방 전
조부가 압록강을 건넌 뒤, 어떤
희망도 다시는 건너올 수 없는 헛된 시간이
압록강처럼 흘러갔다.

 

돈 많이 벌어
식구 모두 연변으로
돌아갈 때까지 조국의
겨울은 춥고 또 길 것이다 아무리
돈 벌러 왔다지만 이미 조국은 없었다.

 

내 사랑 연화,
겨울은 가고 또 봄은 올 테지만
무늬만 조국인 먼 나라에서
국적 없는 사랑은
지금, 서로에게 불법체류중이다.

 

*무장리 : 숯가마가 있는 곳,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무장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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