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김연성 시모음 1 본문
1961년 강원도 양양 출생
2005년 계간[시작]으로 등단
웹월간 詩 [젊은 시인들]
발령났다
그는 종이인생이었다 어느 날
흰 종이 한 장 바람에 휩쓸려가듯이 그 또한
종이 한 장 받아들면 자주 낯선 곳으로 가야했다
적응이란 얼마나 무서운 비명이던가
타협이란 또 얼마나 힘든 악수이던가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읽지 못할 것이다
얇은 종잇장으로는 어떤 용기도 가늠할 수 없는데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읽는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이다
그 골목의 정체 없는 어둠이다
그는 늘 새로운 임지로 갈 때마다 이런 각오했다
"타협이 원칙이다
그러나 원칙을 타협하면 안 된다"
나일 먹을수록
이 세상에선 더 이상 쓸모없다고
누군가 자꾸 저 세상으로 발령 낼 것 같다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원칙까지도 타협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닌지
허리까지 휘어진 어둠 속에서
꺼억꺼억 토할지 모른다
모든 과거는 발령 났다 갑자기,
먼 미래까지 발령 날지 모른다
시간은 자정 지난 새벽 1시,
골목 끝에 잠복했던
검은 바람이 천천히 낯선 그림자를 덮친다
모범이발관으로 간다
설이 내일모레라
서둘러 동네 이발관으로 간다
일곱 살 아들과 간다 그 곳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앉아 쑥덕공론하는 곳
그날, 어떤 이는 죽고 또 어떤 이는
시대의 영웅이 되기도 하는데
설혹 머리 감지 않고 가도 되는 곳
그 곳에 가면 나는 왕이다
두 다리 쭉 뻗고 고개 뒤로 젖히고
두 눈도 감고 있으면
세상이 다 내 영토가 되는 곳이다
액자 속 포효하는 호랑이 울음 뒤로
영웅호걸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잡담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싹둑 잘리는 동안
이 세상 온갖 소문 접할 수 있는 곳
그 곳에서 초라한 왕은
음모 같은 수염을 밀고 웃자란 일상을 자른다
귀지까지 파내면 명절이 바로 내일모레다
보아라, 눈 뜨면
꾀죄죄했던 아이의 눈도 빛나네
단돈 팔천 원에
오천 원만 더 지불하면 문을 나오네
이 풍진 세상으로 다시 돌진하네
휘적휘적 奉天가네
벽산블루밍궁으로 가네
휘파람 불며
어린 왕자의 손을 꼭 잡고,
벼랑에 서다
혼자였다 눈물은 오래 참다 뚝 떨어지는 순간, 저 바닥까지는 천길 벼랑과 같다 아무도 푸른 수심을 알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움켜잡았지만 어떤 번호도 떠오르지 않았다 숫자로 호명할 수 없는 많은 얼굴들이 스쳐갔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다만 두 주먹을 불끈 쥐었을 뿐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을 뿐이다 바람 한 점 없는 풍경은 적막하였지만 어두워지는 도시를 내다보면서 그는 괜찮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함부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동료들에게 말을 걸었을 뿐이다 이제 이 더러운 세상과는 당분간 무관심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하루를 어떻게 외면했는지 모른다 시간이 씨발時가 되자 연기처럼 사무실을 빠져나와 짧은 사거리를 빠르게 흘러갔다 지하철은 코뿔소처럼 캄캄한 땅속 어딘가에서 컥컥거리며 튀어나올 것이다 곧 낯선 얼굴들이 벼랑역에 또 도착할 것이다 하루 종일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다음 달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미안하다는 상사의 표정 너머로
어서, 가족이 보고 싶었지만 결국 혼자인 것이다
그는 여전히,
아직도 간절한 것이
아직도 간절한 것이 남아 있다면
아직도 물컹거리는 비린내가 남아 있다면
저 아파트 앞, 가파른 오르막 같은
숨차오르는 언덕이 남아 있다면
아직도 누군가 어둑어둑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면 아직도
끈적끈적 그 발자국 남아 있다면
지나간 하루와 남아 있는
하루는 얼마나 뒤척여야 푸른 밤이 되는가
내일이 오는 동안 나는
또 얼마나 나를 퍼내야 하나
어쩌다 흘린 검은 비 같은 것이
지워지지 않는 얼룩 같은 것이
내 안에 고스란히 고여 있다면
흘러가지 않고 덕지덕지 붙어 있다면
한 순간 눈물처럼 왈칵 쏟아진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간절해야
깊은 웅덩이가 되는가 아직도
간절한 바람이 잎잎이 흐느낀다면,
수도꼭지의 말
한밤중 누가 노크한다
어두운 마음에 안부를 전한다
가난이 짓무르도록 흐르고 싶었다
떨어지는 것은 물이 아니라 모진 마음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아래로 흐르고 싶었다
좁은 하수관 안으로 쏟아져,
꼬불꼬불 따라가면 푸른 바다가 되리라
검은 심연에 다다르리라
위풍 심한 창 밖의 기온은 영하 13도,
반 지하 전세방에 옹기종기 네 식구
서로를 홑이불 삼아 새우잠 자는 동안
수도꼭지 저 혼자 중얼거린다
얼지 마라, 얼지 마라
가난은 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덮어줘야 할 온기와 같은 것이니
마음이 마음을 덮을 수 있다면
허기진 몸뚱어리도 조금은 따뜻해지지 않겠느냐
어둠도 섣불리 침투하지 못하는
반 지하 전세방 개수대에 붙어 있는
수도꼭지 말한다 곤한 식구들 깰까
밤새 가만가만 속삭인다
가난은 어둠과 같으니 한 잠 자고 나면
다시 환한 때가 오리라 창밖,
결빙의 시간 지나면 서럽도록 밝은 날이 오리라
똑,
똑,
똑,
!
!
!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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