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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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시모음

휘수 Hwisu 2007. 3. 2. 01:29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2001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2004년 제49회 현대문학상 수상 (당선詩 : 피어라, 석유!)
현재 '시힘' 동인
첫시집『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비) 2000년 
첫 산문집『물 밑에 달이 열릴 때』(창비) 2002년 일
시집『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년
 

 
자운영 꽃밭에서 검은 염소와 놀다

 

  보라빛이 검은 염소를 쓰다듬는다 가만히 온 노을 속  검은 염소가 보랏빛
을 조금 찢어 입 속에 넣고 우물거린다 염소의 몸 속 기나긴  회랑과 언덕을
적시고 철조망에 매달아놓은 녹슨 방울을 울리듯 젖멍울로 조금씩 스며나오
는 보랏빛, 소녀가 검은 염소의 젖망울에 입술을 갖다댄다 네 눈이 좋아  아
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아서-

 

  내 고향은 검은 염소의 자운영 꽃밭, 갈 곳 없는 노을이 나를  낳았대요 꽃
과 혼열이어서  나는 손톱니 조그맣구요 여섯 개의 꽃잎손으로 무른 밥을 먹
지요  목마르면 검은 엄마의 젖을 빨구요 뿔에 걸린 달님을 조금씩 부스러뜨
렸어요 그때마다 젖니가 빠지고 쌍꺼풀이  커다래져서 친구들은 금새  나를
잊었지만, 괜찮아요 내 고향은 검은 소와 자운영 꽃밭이니까요

 

   검은 염소의 배 밑에 붙어 보랏빛을 마시는 보랏빛, 까르륵대며 종알종알
뛰어다닌다 그런데 언니도 혼혈이에요? 갈 곳 없는 노을이 언니를 낳아  버
렸어요? 괜찮아요 울지 마요 내거 다시 낳아줄게요 쉬잇, 이번엔 버리지 않
을게요

 

  그런데, 혼혈이 아닌 목숨도 있나요?
 
애무의 저편 

 

웃통 벗고 수박을 먹는데
발가락에 앉았다 젖무덤을 파고드는
파리 한마리
손사래도 귀찮아 노려보는데

 

흡, 부패의 증거인지도 몰라

 

눈치챈 걸까 이제 아무도 못 믿게 된 걸
구겨진 발톱, 숱하게 생발을 앓아온 희망에게
내밀 수 있는 건 소화제 몇알
비굴하지 않게 예스,라고
말할 줄 알게 된 것도 다 들통난 걸까

 

질기고 안전한 아랫배 속에서
냄새를 피우는 영혼의 끌탕
(왜, 노출된 내장만이 추한 것일까)

 

섹스하고 싶어,라는 말 대신
미치도록 사랑해 너얼,

 

그의 내부도 부패중인 걸까
어지러워, 나의 절정에
왕성하게 생식하는 저 황홀한 잡균들!


거꾸로 가는 생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나이 서른에 나는 이미 너무 늙었고 혹은 그렇게 느끼고
나이 마흔의 누이는 가을 낙엽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어도
갈래머리 여고생처럼 후르륵 가슴을 쓸어 내리고
예순 넘은 엄마는 병들어 누웠어도
춘삼월만 오면 꽃 질라 아까워라
꽃구경 가자 꽃구경 가자 일곱 살배기 아이처럼 졸라대고
여든에 죽은 할머니는 기저귀 차고
아들 등에 업혀 침 흘리며 잠 들곤 했네 말 배우는 아기처럼
배냇니도 없이 옹알이를 하였네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머리를 거꾸로 처박으며 아기들은 자꾸 태어나고
골목길 걷다 우연히 넘본 키작은 담장 안에선
머리가 하얀 부부가 소꿉을 놀 듯
이렇게 고운 동백을 마당에 심었으니 저 영감 평생 여색이 분분하지
구기자 덩굴 만지작거리며 영감님 흠흠, 웃기만 하고
애증이랄지 하는 것도 다 걷혀
마치 이즈음이 그러기로 했다는 듯
붉은 동백 기진하여 땅으로 곤두박질 칠 때
그들도 즐거이 그러하리라는 듯

즐거워라 거꾸로 가는 생은
예기치 않게 거꾸로 흐르는 스위치백 철로
객차와 객차 사이에서 느닷없이 눈물이 터저 나오는
강릉 가는 기차가 미끄러지며 고갯마루를 한순간 밀어 올리네
세상의 아름다운 빛들은 거꾸로 떨어지네


낙화, 첫사랑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피어라, 석유!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
당신의 모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
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
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
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앞에
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온몸으로 꽃이어서 꽃의 운하여서
힘이 아닌 아름다움을 탐할 수 있었으면
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
차라리 나를 향해 저주의 말을 뱉으세요
포화 속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의 발 앞에
검은 유골단지를 내려놓을게요
목을 쳐주세요 흩뿌리는 꽃잎으로
벌거벗은 아이들의 상한 발을 덮을 수 있도록
꽃잎이 마르기 전 온몸의 기름을 짜
어머니, 낭자한 당신의 치욕을 씻길게요

 

사랑의 거처

                        
말하지 마라.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이 나무도 생각이 있어
여기 이렇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
―「장자」 인간세편


살다보면 그렇다지
병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지

치료하기 어려운 슬픔을 가진
한 얼굴과 우연히 마주칠 때

긴 목의 걸인 여자―
나는 자유예요 당신이 얻고자 하는
많은 것들과 아랑곳없는 완전한 폐허예요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눈
나는 텅 빈 집이 된 듯했네

살다보면 그렇다네 내 혼이
다른 육체에 머물고 있는 느낌
그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네

 

분꽃

                 
'사바'라는 말 참 예뻐서
사바세계에 살고 싶었지요
'사바'라는 말 참 예뻐서
그 여자 못을 들어 제 가슴 찔렀지요
흰분홍노랑 못들을 박고
그 여자 여무는 까만 눈둥자
제 가슴 가만히 들여다보았지요
못들이 이렇게 많으니
곧 꽃이 피겠구나
못자국 깊어진 오후 네시였지요

 

관계

 

(고백할 게 있어 어떤 벌레에 관한 얘긴데 말야
달팽이 몸 속에서 알을 까고 자라난대)
두려워하진 마 암세포처럼 무식하게
숙주를 절명시키진 않아 기어다니거나
교접하는 데에도 아무 문제 없어 넌 열심히
먹이를 찾아 다니고 나는 무럭무럭 커가는 거야
(놀랍지 않아? 몸 속에 뭔가 기르고 있다는 거)
근데 말이지 난 이제 다 커버렸고
장년기를 보내기에 넌 너무 작고 초라해
좀더 쾌적한 새의 창자 안에서
말년을 보내는 게 내 운명이야
네 여린 눈자루로 침입해 들어갈 거야 고통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네 머리는 광채를 뿜어내겠지
넌 이제 한가롭게 마지막 산보를 즐기면 돼
멀리서 늠름한 새의 발톱이
빛나는 네 등짝을 찍으러 날아올 테니까
한평생 배밀이로 기어다니다
무덤도 없이 가랑잎 위에 뒹구는 걸 생각해봐
쓸쓸한 죽음은 질색이야 구름 위를 날게 해줄게
따뜻하게 버무려지는 네 육즙을 맛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송곡을 들려주겠어
새로운 내 집이 맘에 들 거야 짓이겨지면서,
그때야 넌 모든 걸 깨달을지 모르지만
모든 끝장은 단호한 거야 난 네게 빚 없어
(놀랍지 않아? 날 키운 건 너야)

 

완경(完經)


수련 열리다
닫히다
열리다
닫히다
닷새를 진분홍 꽃잎 열고 닫은 후
초록 연잎 위에 아주 누워 일어나지 않는다
선정에 든 와불 같다

수련의 하루를 당신의 십년이라고 할까
엄마는 쉰살부터 더는 꽃이 비치지 않았다 했다

피고 지던 팽팽한
적의(赤衣)의 화두마저 걷어버린
당신의 중심에 고인 허공

나는 꽃을 거둔 수련에게 속삭인다
폐경이라니, 엄마,
완경이야, 완경!

 

도화 아래 잠들다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민둥산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 채인 줄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윗도리를 벗어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 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族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 번의 생이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 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를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올린다 몸 속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햇살의 산통을 천년 전처럼
그늘 쪽으로 다리를 모신 채였다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온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무덤이 아기들을 기른다

 

 버즘나무 이파리 서쪽으로 눕던 길, 그  길 끝에 놓여 있던 비둘
기의 주검, 선명한 자동차 바뀌자국
  새의 내장도 무겁구나, 파리해진 잎사귀의 반쪽을 가리며 오래
도록 주검을 맴돌던 슬픈 애인이 펄럭였다
  술잔 속에서 끊임없이 피 묻은 깃털이 올라오던, 그날 애인을
안고 속삭였던가
  갖 태어난 아기들의 뱃속을 생각해봐 작은 정원 같은, 붉은 다
알리아 콩닥콩닥 김을 뿜고 삐비들이 연초록 길을 만들지 노랑
주홍빛 채송화, 토란잎 위에서 장난치는 피톨들, 붉고 흰 물망울,
물방울은 동그란 무덤이야 우린 누구나 무덤의 집이라구 따스한,
  내 가슴에 떡잎처럼 매달려 우는 어린 애인, 덜 여문 내 꽃자리
로 사르륵 통증이 지나갔고 나는 무덤을 열어 젖꼭지를 물려주었
지만


  어떻게 울음을 그쳤는지 모른다 그날, 내 애인은

 
  동구 밖에 비둘기를 묻어주고 내 등에 업혀 돌아오던 다섯살배
기 동생이 되어 내게 말했다 고마워 언젠가 나도 엄마가 되어줄
게. 향긋한 냄새가 그애의 정원에서 풍겨나와 핑그르르, 내 무덤
에서 정말로 젖이 돈 것만 같았다

 

숭고한 밥상

 

밥 잡채 닭도리탕 고등어자반 미역국
이토록 많은 종족이 모여 이룬
생일상을 들다가 문득, 28년 전부터
어머니를 먹고 있다는 생각이

 

시금치 닭 고등어처럼 이 별에 씨 뿌려져
물과 공기와 흙으로 길러졌으니
배냇동기 아닌가,
내내 아버지와 동침했다는 생각이

 

지금 먹고 있는 닭 한마리
내 할아버지를 이루었던 원소가
누이뻘인 닭의 깊은 곳을 이루고
누이와 살을 섞은 내 핏속엔 지금.....

 

누대에 걸친 근친상간의 밥상
비켜갈 수 없는,
무저갱의 밥상 위에
발가벗고 올라가 눕고 싶은 생각이
어머니가 나를 잡수실 수 있게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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