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김륭 시모음 1 본문

OUT/詩모음

김륭 시모음 1

휘수 Hwisu 2007. 1. 22. 07:30

1961년 경남 진주 출생
1988년 불교문학 신인상
1989년 조선대 중국어과 졸업
2005년 제1회 월하지역문학상 수상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당선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눈물이 완성되는 순간

 

벽이 쩍쩍 갈라진 임대아파트 아줌마들 모여
인형 눈을 붙인다. 매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새빨개진 눈 비비며 
덩치 큰 곰인형에게 눈을 달아준다.

 

인형에게 눈 주고 반찬값 몇 푼 챙기는
아줌마들의 수다는 실밥 터진 단춧구멍 같아서 방안 가득 뒹구는 인형들 눈에
오래된 별처럼 붉게 터진다.

 

눈 동그랗게 어디 한번 살아봐라
눈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눈물 없이는 살 수 있는 세상인지

 

막노동 가는 남편 작업복에, 병든 닭 마냥 학교 가는 자식들 앞가슴에
단물 빠진 껌처럼 눈물 으깨 붙이던 아줌마들 엉덩이 비집고
칠순 어머니, 눈물을 단추처럼 매달고 사신 당신도
가물가물 인형 눈을 붙인다.
 
눈이 없으면 눈물도 없겠지만 정말 그렇겠지만
눈물이란 한사코 칠이 벗겨지는 않는 생生의 그늘 적셔 반짝, 입 열게 하는
金단추 같은 것이어서
 
아예 단추 구멍 만한 눈물을 달아준다.
눈물을 단추로 채워준다.

 

반짝, 인형이 웃는다.
눈물로 웃는다.

 

달팽이 생태보고서


맞벌이부부들 풀어놓은 아이들이 기어다닙니다

잠 덜 깬 아이들 이마가 창으로 달린 집들이 기어다닙니다

길을 모르니까 길을 잃어버릴 수 없는 아이들이, 가만히 그 길을 잡아당기면

과자부스러기처럼 매달려 나오는 집, 부서진 피아노 음악 같은 아이들이

텔레비전 속 수천마리 참게 떼들과 함께 기어다닙니다

거품 뽀글거리며 한강 둔치를 기어오릅니다*

잠실대교 교각을 기어오른 어린 참게들이 텔레비전 바깥으로 뛰어내립니다

톰방톰방 아이들 손가락 하나씩 물고 기어다닙니다

아이들에게 젖을 물려본 적 없는 예쁜 여기자 입술이 달아오릅니다

산책 나온 수많은 시민들에게 신기한 볼거리를 주고 있다며

마이크를 아이스크림처럼 빨아먹으며 시청률을 높입니다

햇님놀이방 원장선생님 코끝에 걸린 안경 한쪽 다리가 똑, 참게 발처럼 부러집니다

혼이 난 여기자가 웁니다

아이 하나가 얼른 젖꼭지 물려주지만 가짜젖꼭지는 맛이 없습니다

집이 떠내려가도록 울다가 화면이 바뀌자 방긋 웃습니다

울음이 가짜인지 웃음이 가짜인지 원장선생님도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참게들에게 손가락 물린 아이들만 가짜가 아닙니다

집을 찾아 헤매는 엄마를 찾아 웁니다

원장선생님이 휴지 대신 꽃잎으로 눈물을 닦아줍니다

톡톡, 엉덩이에 불 지펴줍니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 아궁이로 머리만 쏘-옥 내민 아이들이

음악 한 장씩 덮고 막 잠이 들었습니다

퇴근길 맞벌이부부들이 하나 둘 아이들을 찾으러옵니다

가시투성밤게*가 되어 느릿느릿 기어옵니다

잠들었던 아이들이 가시에 찔린 순서대로 일어나 앙앙 다시 웁니다

달팽이들의 슬픔은 집에 있습니다

내 집 마련 꿈이야 이뤘지만 함께 살 수 없는 집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젖은 음악으로 만들어진 집들이 둥둥 떠내려갑니다

바다가 깊습니다

 
*2006년 7월 15일 뉴스 인용―수천 마리의 참게 떼가 강물을 탈출해 한강 둔치로 기어오릅니다.

  집중 호우로 물이 탁해진데다 먹이를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시투성밤게― 집을 만들지 않고 떠도는 밤게과의 갑각류.

 

 2007 신춘문예 당선시집


 햄버거 진화론

 

1.

  한 무리의 넥타이부대들이 햄버거를 먹고 있네요. 큰길 건너 단위농협에서 파병한 신병들이죠. 전투경험이야 없지만 경제를 아는 젊은이들이죠. 시장통 돼지국밥집에서 팔다리 꺾인 金봉구씨만 낙동강 오리알이에요. 해병대 출신의 애국자임엔 틀림없지만 경제를 몰라요. 제아무리 용감해도 경제를 모르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죠. 급식지원을 받는 함양중학교 2학년 4반 순덕이 배꼽시계로 12시 45분, 양파 캐러 간 엄마가 꼬르륵, 신호를 보내네요. 농협상품권은 눈이 맵죠. 양파껍질보다 매워요. 순덕이 먹는 컵라면 속에서 눈알 새빨개진 산토끼 한 마리 보셨나요?

  때마침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네요.

 

 2.

  관광코스로 개발된 지리산 빨치산루트를 타고 넘어온 게 틀림없다니까요. 우리 아버지 동란 때 먹었다는 꿀꿀이죽 아시죠. 꼴까닥, 혓바닥까지 딸려 넘어갔다던 바로 그 맛이 진화한 거죠. 시쳇말로 죽이는 맛이죠. 햄버거 먹는 딸아이가 총을 맞았나 봐요. 세상에, 입 안 가득 침이 아니라 피가 고였어요. 놀라지 마세요. 거대한 제국의 맥도널드가 원하는 것은 땀이 아니죠. 눈물이 아니죠. 그럼 피밖에 더 있어요.

  아빠, 하고 부르면 도망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죠.

 

3.

  사실 우리 딸아이는 순덕이에 비해 너무 전투적이죠.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설치죠. 심심하면 집을 나가는 게 얼마나 다행인줄 몰라요. 요즘 애들에게 서바이벌게임이 따로 있나요. 공부가 전쟁이고 휴대폰이 수류탄인데,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다양한 전투경험을 쌓고 잊을만하면 읍내지구대로 돌아오죠. 넥타이를 허리띠로 졸라맨 아버지는 꿀꿀이죽으로 동란 넘기고 개떡으로 보릿고개 넘어 이만큼 산다고 눈에 불을 켜지만 씨알도 안 먹혀요.

  몸에 지닌 무기만 봐도 이길 수 없는 전쟁이죠.

 

 4. 

  지리산골짝, 인구 5만도 채 되지 않는 소읍 함양*까지 쳐들어온 맥도널드체인점 앞에서 아버지는 불량농민이고 나는 상이군인이죠. 논바닥이나 묵정밭을 포복하며 익힌 체위론 어림없는 짓이죠. 언제 터질지 몰라요. 읍내지구대 金순경도 딸아이 앞에서는 깨갱깽, 꼬리를 내리고 말죠.

  서둘러요. 민방위훈련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에요.


5.

  어젯밤 모토롤라대리점 앞 대로변에서 난리가 났대요. 한 명이 칼에 찔려 죽고 세 명이 다쳤대요.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휴가를 핑계로 고급승용차를 타고 바다로 꽁무니를 내뺐다죠. 불량농민인 아버지는 다방 한구석을 지키고 있었지요. 고물경운기를 맥도널드체인점 건너편에 세워놓고 미스金과 소와 개돼지들에 대해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대요. 미스金은 송아지처럼 눈을 껌뻑거리며 엉덩이를 맡겼겠죠. 사실 미스金은 소나 개돼지보단 치킨에 관심이 많아요. 읍내에서 제일 높은 32층 아파트까지 날아오르는 닭다리와 날개 뜯어먹고선 오리발을 내밀죠. 불량농민인 아버지는 항상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죠.

  이미 공습은 시작되었어요.

 

6.

  읍내 밥집 하나가 폭탄을 맞고 폭삭, 주저앉았어요. 소를 키우던 사람이 사장이었는데 경제를 제대로 알 턱이 있겠어요. 사라져 가는 고향 맛을 지키겠다며 전쟁을 선포했다가 일 년도 못 버티고 폭탄을 맞은 거죠. 말똥구리처럼 소똥을 밥으로 빚는 일은 상술이 아니라 전술이죠. 지리산까지 점령한 맥도널드체인점이 작전사령부예요. 보이시죠. 저, 저건 햄버거가 아니에요. 자장면보다 먼저 배달되는 도시락폭탄이죠. 주요 간선도로마다 소똥처럼 퍼질러 놓았어요.

  노인들과 어린이들부터 빨리 대피하세요.

 

7.

  전면전이 될지 몰라요. 햄버거의 진화는 무찔러야할 침략의 일종이죠. 우리 집 숟가락과 젓가락을 몽땅 거둬간다는 데 참을 수 있나요. 지난여름 태풍에 한쪽 다리를 날려 보낸 상이군인이라고 깔보진 마세요. 경제는 잘 모르지만 전투경험은 많죠. 농협빚더미에 깔린 불량농민 아버지가 소를 팔기 전에 서둘러야 해요. 맥도널드체인점의 폭탄테러를 막아야 해요. 제발,

  말똥구리를 살려야 해요.

 
*함양-면적 724.73㎢, 지리산을 끼고 있는 경남 서부지역의 작은 군. 재정자립도가 전국 최하위권이다.

 

2007 신춘문예 당선시집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 · 2

 

1.


 고향집과 논밭을 깔아뭉갠 15층 아파트 거실 소파에 누워 있는데 구름이 찾아왔지 어디서 구했는지 내 그림자를 이불로 덮어씌우더군
 어디 아픈 데는 없다고 말 건넬 틈도 없이 오래 전에 갈라선 아내처럼
 겨드랑이 사이 새 떼들은 어쩌고 거기 구겨져 있냐고 구시렁거렸지
 훌쩍,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다고 하늘을 발가락으로 눌러 끈 나는 벽돌보다 좀더 무거운 침묵을 준비했지만
 옷걸이에 걸어두지 못한 두터운 바람 한 권이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더군 하늘이 한 평 밭뙈기보다 쓸모없는 줄은 몰랐어

 

2.


 뜬구름을 타고 다닌 건 사실이야 하늘을  땅처럼 짚고 헤엄칠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 문득 나도 몰래 죽은 나를 찾아내고 말았지
 잘 살고 있냐고 내게 전화 한 통 때리거나 동영상 한 번 띄울 수 없는 휴대폰은 무용지물이지 새처럼 날려보낼 때가 되었더군
 인생을 과학으로 재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미신이야
 살다 보면 알게 되지 사람 뒤통수를 때리는 물건은 돌보다 단단한 벽돌이 아니라 구름이라고, 그렇다고 구름을  걸레처럼 쥐어짜진 마
 구름이란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는 생각 같아서 평수가 넓지

 

3.


 언젠가 알게 되겠지 사람이 사람을 깔아뭉개거나 맥주거품처럼 슬쩍, 쏟아 부어버리기에 구름만한 곳이 없더군 구름은 장소가 아니라 시간이지
 입을 틀어막아 버린 내 안의 우물이 바닥을 내보일 때까지 울어주는 악기라고 환장하겠더군 생선 지느러미처럼 토막쳐진 팔다리가 스르르 돋아나더군
 고백컨대 나는, 나에게 너무 오래 감시당했는지 몰라
 죽음보다 감미롭고 부드러운 음악처럼
 우울증을 앓고 있는 당신 뒤통수까지 손을 뻗진 않았지만 조심해!
 천둥번개마저 사산死産할지 모르니까

 

2007년 신춘문예 당선시집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