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김길나 시모음 본문

OUT/詩모음

김길나 시모음

휘수 Hwisu 2006. 10. 22. 17:34

전남 순천 출생

1995년 시집 <새벽날개>를 상자하면서 시단에 나옴

1997년 시집  <빠지지 않는 반지>문학과지성사

2003년 <둥근 밀떡에 뜨는 해>문학과지성사

                                

포도주


포도를 먹는다

포도 알을 깨물자 포도 속에서 바람과

빗물이 톡 터져나오고

햇살과 달빛이 터져 흐른다

새콤달콤 입 안 가득 녹아 흐르는 이것은

포도의 은밀한 사랑 이야기일 터인데

이 맛이 혀끝에서 사라져버린 뒤

살의 층계를 내려가는 포도의 발소리는

조용해졌다 나는 그러므로

살 속에 누운 포도를 빌려서는 내 사랑을

해에게 또 별에게 말하지 못한다


나는 포도의 추억으로 빚은 포도주를 마신다

포도알들 으깨어지는 떨림 잔 속으로 모여들고

핏방울 어룽진다

내가 포도주 잔을 들어올리자 누군가 이 지상에서

마지막 저녁을 먹고 아주 숟가락을 놓았다

살 녹는 적막이 침묵의 나라로 흘러드는

봉분 속에서는 술이 익어가고 

성찬의 식탁에 놓인 금빛 성작에는

피가 고여든다

몸 밖에서 사랑에 눈먼 피가 머뭇거리며

몸 안의 피를 불러내는 저녁이면

술집과 성전이 함께 붐볐다


나는 술렁이는 포도주의 그 떨림이

목젖 아래 떨림막을 딛고 흘러내리는 소리를

한 번 더 엿듣고 있다

  

닿소리 여행

 

그대에게 닿기 위해 간다
가 닿지 않고서는 말도 글자도
그 아무 것도 아닌 닿소리들을 데리고
오늘도 나는 그대에게로 간다


 이미 사라진 것들,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들, 이들이 볼 부비고 떠 있는 허공의 풍경 한 폭을 날개에 달고 새가 허공을 가로질러 난다 그리고 수직 낙하하는 착지 지점. 에서


지상의 길 하나 수평으로 닦이고 있다


나는 길가의 어느 열린 대문으로 오래 전에 들어왔다


 연인으로 환생한 ㄱ과 ㄷ이 두근두근 몸을 포갠다 수수만년을 걸어나온 내 몸 안의 지밀에서는 불켜진 혼야의 문풍지가 층층이 떨려나고 촛불 밖 공기들도 분홍빛으로 술렁인다 그리고 몸 안을 흐르는 오래된 강줄기가 몸 밖으로 흘러 흘러나가고 꽃과 아기들이 흐르는 시간 속으로 불쑥불쑥 들어오고 허공과 땅 사이로 흐르는 목숨들이 리을리을 휘돌아나가고


 어느 날부터는 대문이 닫힌다 나 사각 방에 담긴다 내 안의 말랑말랑한 것들이 굳어지고 고착되는 사이 내 눈앞에는 사각 틀로 찍어낸 존재의 복제품들이 지폐로 얼굴을 가리고 서 있다 내 몸 안의 세포들이 복제를 꿈꾸는 동안 內壁의 벽화에는 혼돈의 모자이크가 증식하고 균열이 번식한다


 ㄷ이 ㅁ위로 다가와 올라앉았으나 이미 ㄷ의 체위가 바뀌었으므로 대문은 사각 방 지붕 위에서 허공으로 열렸다 아래는 사각 방 안에 두고 상체만 틀 밖으로 올라왔다 절반이 묶인 한 생이 허공 쪽으로 저문다 노을이 붉다 이제, 눈을 들어보니


사람이다


사랑이다

 

0時에서 0時 사이  
   ㅡ둥근 밀떡에서 뜨는 해


들녘을 훑고 지나간 바람 끝에서
밀밭 몇 장이 구겨졌다 구겨진 밀밭이
서녘으로 넘어간 뒤에도 남은 밀밭에서는
밀알들이 자랐다
햇빛 쟁쟁한 한낮에 해조각을 베어 물고
둘레공기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밀알들이 잘 익었다 그리고
그 황금빛 생애는 사라졌다
땅을 떠난 밀알들이 줄을 서서 방앗간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방앗간에 내 걸린
부서진 살 거울에 ‘너'는 보이지 않고
‘나’는 없어졌다
이 거울로 집을 지은 빵집에서는 누구라도
밀가루 한 줌으로 사랑을 굽고
밀가루 한 줌으로 기쁨을 부풀린다
는 소문이 빵집 밖으로 새어나왔으나
세상의 밥상머리에서의 비만,
비만이 감춘 허기가 소동하는,
빵집 앞은 배고픔으로 붐볐다

 

애찬의 식탁에서
밀알들이 삼킨 해조각들 둥글게 모였다
밀떡에서 뜨는 해 한 덩이! 눈부시다
햇살 끝에 매달린 눈물방울,
그 처연한 슬픔까지도                                                                                                 

 

빠지지 않는 반지

 

내 금반지 안에서는 가끔 둥근 달이

떴다. 이 세상 모든 둥근 것들이 차례로

내 반지 속으로 들어와선 금테를 두르고

반짝 눈을 떴다

 

그리고 금빛 둘레를 돌고 도는 씨앗들의 행보

수평 교량이라는 고정 설계를 유쾌하게 깨뜨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씨앗들이 올라간다 내려간다

나무 꼭대기 과육 속으로. 땅 밑 무덤 속으로

이 상승과 하강의 순환고리. 마침내

하나의 길에서 빛살이 새어나오는,

어느 때는 내 반지가 눈부시게 빛나 보였다

 

그럴지라도 내 반지에서 인연의 질긴 끈을 끊고

새 한 마리 날개를 펼칠 수 있을는지

땅에 와 닿기까지, 하늘에 가 닿기까지

훨훨 날을 수 있을는지.....

살쪄가는 내 무명지는 날마다

견고한 황금 울타리 안에 갇혀

탈춤을 꿈꾼다

빠지지 않는 생 손가락으로

 

그러니 원의 입구와 탈출구를 찾는 일

어쩌면 이 두 개의 문이 하나일지도 모르는 그

하나의 문으로 가는 일, 아니 단순히 반지에서

손가락을 빼내기 위해서는 반지를 깨부수는 거다

그러나 동강날 수 없는 반지이므로 나로서는

어찌 할 수 없게되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그래!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 몰라. 0에서마저

빠져나와 아름다운 슬픔 하나 누더기로 걸치고 있는

사람, 살찐 무명지를 잘라버린.

 

쑥국 
 
푸드덕 찬바람을 털어내고

아침마다 한 쌍의 새가 날아와선

창문을 열라 보챈다

그래, 겨우내 움추린 내 몸 안에

봄이 오고 있음이야

나는 이 아침에 쑥국을 끓여

먹는다 버려진 둔덕에서도

밟힐수록 눈 밟힌 쑥이지, 아마.

쑥쑥 목구멍을 타고 국물로 흘러들어와

햇빛 한 아름 불러들이고 있음이야

아, 맛있다! 생기나게 하는 이 초봄의

쑥국 맛, 들녘에서 먼저 눈 비비고 깨어나

꽃샘추위로 고독을 달군 이 향긋한 내음이며

차가운 빗물이랑 해와 달과의 고적한 기억을 갇춘, 혹은

그 견고한 사랑을 풀어내는

쑥국 맛 참 맛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OUT > 詩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효근 시모음  (0) 2006.10.26
김경민 시모음  (0) 2006.10.24
김영산 시모음  (0) 2006.10.21
서정춘 시모음  (0) 2006.10.19
김성덕 시모음  (0) 2006.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