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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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수 시모음

휘수 Hwisu 2006. 7. 19. 10:43

1958년 경북 상주 출생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 졸. 문학박사
1992년 ≪현대시≫ 등단
동원대 교수
1997년 시집 <마스터키> 문학아카데미,

1999년  <금시조를 찾아서> 혜화당,

2000년 <내 생의 이파리는 브리스틀 콘 소나무에 걸려 있다> 다층,

2006년 <문학과창작> 작품상

 

숨은 얼굴

 

목숨의 팔만대장경 어디엔가
숨겨진 얼굴이 있다
문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얼굴,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다
행복한 순간에만 살짝 나타나는 얼굴이 있다

 

삶의 그늘, 찌든 계곡 속에 숨어 있다가,
해맑은 웃음 사이로 잠깐 나타났다가는
가뭇없이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얼의 모습
사진관에 가서 여러 컷을 찍어 보아도
그 얼굴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사진이란 사람을 온전히 보일 수가 없는 법,
찰나로 변해 가는 어느 지점에 셔터를 누를 것인가
적중의 플래시를 터뜨릴 것인가
칠백만 화소는커녕
천만 화소를 잡아낸다는
최첨단 카메라로도 안 잡히는 얼굴,

 

사람의 참 얼굴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인가
앨범 속 어느 갈피에선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얼굴,
흐린 눈으로는 도무지 잡히지 않는 얼굴,
초고속 디지털 카메라로도 잡을 수가 없는,
사람에게는 술래처럼 꽁꽁 숨은 얼굴이 있다

 

겨울 냉이


폭풍한설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냉이는 자란다
낙엽과 지푸라기 아래 숨어 봄을 기다리는 냉이,
행여 들킬세라 등 돌리고 있는 냉이를
장모님은 귀신처럼 찾아내신다
검불을 뜯어내고 흙을 씻어내고
정갈하게 씻어 바구니에 담아 둔 냉이,
그 귀한 걸 몽땅 다 비닐주머니에 담아주신다
봄 내음이 나는 냉이국을 먹으며
낙엽과 지푸라기 속에서도 목숨을 지켜
마침내 싹을 틔워낸 냉이를 생각한다
삶이란 살얼음판 위를 가는 길이어서
잠시라도 넋을 놓아서는 안 된다
가파른 벼랑을 조심조심 걸으며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봄을 기다리는 냉이를 보라
서슬 푸른 정신으로 살아야 하리라
두 눈에 다多초점 압축 코팅렌즈를 낄망정
시퍼런 눈으로 찾아야 하리라
온 세상 다 밝힐 한 마디 말씀을,
겨울 냉이가 자신을 이기듯이
몰래 숨어 자란 냉이가
시원한 된장 국물이 되듯이
우리도 누구에겐가 시원한
국물이 되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수서원 돌담길 옆에도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섶에도 숨어 있을 냉이,
총알처럼 난사하는 얼음덩이 밑에서도,
안면근육을 마비시켜 말도 식음도 불가능케 하는 혹한,
온 시야를 앗아가는 강풍, 강설 속에서도,
청빙淸氷을 뚫고
겨울 냉이는 자란다
아니 자라야 하는 것이다

                                                                             

옥빛에 이르고자 


1


翠玉을 골라 물을 뿌리고
금강의 칼로 자른다
마음 속 깊은 연못에 이는 파문을 가라앉혀
허허로운 문양을 만든다, 먹 상감을 해 본다
옥의 문양에는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무형문화재 100호 玉匠의 말씀,
무릇 한 생을 온전히 바쳐야
오롯이 한 이야기가 생겨난다는데, 언제쯤
그 이야기를 이룰 것인가

 

2


옥골이 못 되는 바에야
神秀의 게송처럼 옥에 티 하나 없이
먼지를 닦아야 하리라 몸과 마음에 앉은
그래야 비로소 本來無一物의 한 무늬가 나타나리라

 

3


갈이틀로 연마하고 사포로 문지른다
은은히 스며 나오는 그 신비의 빛깔을 만나고서야
신라왕관에 매달린 曲玉의 위엄과 멋에 이를 수 있음을,
사사로움을 평정하던 조선선비들 패옥의
그 맑디맑은 소리를 들을 수 있음을 나는 안다

 

4


여름날 그 숨막히던 초록의 풀빛과
맨드라미와 칸나, 아가위꽃들과
그녀를 향한 사랑의 열병으로 잠 못 이루던 밤들,
그 밤에 지저귀던 동박새, 지빠귀새들과
그 모든 추억과 환영들을 지나
마침내 맑고 투명한 하나의 옥가락지와도 같은
비취빛 사랑에 이를 때까지는
나는 아직도 사포로 나의 옥돌을 문질러야 한다                             

                                                                                       

만선식당

 

밴댕이회를 먹으며
밴댕이의 속에 대해 토론했다
밴댕이는 소갈머리가 좁고 얕은
소인배의 무리인가
아니면 심지가 굳고
안이 뜨거운 열사인가
은백색의 배를 뒤집으며
죽어가는 밴댕이들
밴댕이는 한심한 나라를 구하려고
맨땅에 몸을 내던지는
열사의 무리인가
청흑색 등을 구부리며
연신 굽실거리는
소인배의 무리인가
모든 사물은 종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우니
그냥 물 흐르듯 흘러가리라
독을 품고 가시를 품고 화두를 품고
비틀거리며 살아갈 수밖에...
만선식당에서 밴댕이회를 먹으며
‘빈 배로 떠날 때도 울었으면
만선으로 닿을 때도 울 줄 알자'*던
한 마리 갈매기, 뭍을 못 떠나는
갈매기를 하염없이 불러본다

 

시원의 소리를 찾아서

 

오랜 소외의 골방에서
한 생태학자가 식물도감을 펴낼 때까지는
나는 아직 식물들의 내밀한 마음을 몰랐었다
아프리카의 부족들처럼 그저
사흘 밤낮을 소리지르는 통에
나의 서재에 들어온 나무들은 그만 혼이 빠져선
빛이 바래지고 서서히 쓰러지고들 말았다
식물들은 저음의 묵직한 소리가 만들어내는
바흐의 오르간 음악을 좋아한다는데,
나는 어쩌면 온갖 이방부족들의 소음으로
나의 호랑가시나무들을 쓰러지게 했는가
나의 로빈새들을 날아가게 했는가
내 오늘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틀어놓고
나의 호랑가시나무를 소생시켜 보려고 한다
내 생애의 온갖 치욕들과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수난들을
깨끗이 씻어내야만 나의 나무들은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요한수난곡과 무반주첼로모음곡이 끝날 때까지도
그것들은 끝내 씻겨지지 않고 앙금처럼 가라앉는다
한없이 단조롭지만 무궁하게 이어지는
인도의 명상음악을 틀고 키르탄을 한다
그제서야 조금씩 조금씩
내 안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까르마의 흙들이 풀리며
서서히 움이 트고 싹이 돋아난다
나뭇가지들이 제 길을 잡아가고
잎새가 조금씩 가지런해진다
다시 살아보려는 힘이 꿈틀댄다
머나먼 왕사성과 곡인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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