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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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문학수첩》신인상 당선작 / 황수아

휘수 Hwisu 2008. 9. 30. 08:54

제6회 《문학수첩》신인상 당선작 / 황수아

통조림


네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나는 얕은 방의 깊은 곳으로 발자국을 찍는다
네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나는 밤의 비린 쪽 음영으로 눈물을 전송한다
나는 굽어진 세상에서 상하게 될 좁은 것들을 궁리한다
그리하여 네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정든 물건들을 내 발바닥에 싣는다, 떠날 채비를 한다
세상의 깡통들이 곧 신호를 보내올 것이다

네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이를테면 방바닥에 구멍을 뚫는다
아니, 나는 그저 내 구멍으로 들어가는 푸른 정어리다

불꽃


텅 빈 라이터 속에는 가보지 못한 곳이 있다
있을 법한 불꽃을 숨겨두던 젊은 날
수상한 연기가 어디 있냐고 묻는 이에게
다만 여기에 없다고 대답하던 시절
나는 간통보다 부적절한 누명을 쓰고
담배를 끊고도 무심결에 라이터를 줍는 연애를 한다

그리하여 공명을 다쳤노라고
푸른 불꽃 속에 상처를 관통하던 연기의 영혼
꿈을 꾸는 꿈, 불을 끄는 불, 기억하는 기억을 보고 난 뒤에야
없는 곳에 비로소 있는 그대에게 안달이 났다
결국 영영 닿지 못할 것처럼

무릇 젊음을 향해 찍은 발자국도
정처 없이 떨어진 담배꽁초도
누가 볼까 숨겨두던 이별도
대책 없이 벌어진 일이다

이제 남은 일은
텅 빈 라이터로 불꽃을 점화하며
그대에게 연기를 빌리는 일


잠원동 미세스 롯데캐슬


틈만 나면 내 가랑이를 파고드는 당신이 오늘은 식도로 넘어왔어. 목구멍이 칼칼하다고 말을 할 수 없는 건 아냐. 꼬챙이처럼 내 몸에 찔러 넣은 당신이 나를 싹 다 해먹는 동안, 천만에 발광하는 몸을 다시 자라나게 하는 고루한 명품관이 있는걸. 그런 줄 모르고 심심한 몸의 맛을 견디기 위해 노란 불빛이 새어나는 거대 빌딩이란 소스에 나를 찍어먹는 당신. 이 아리따운 몸의 토핑을 한번 봐. 당신이 파고들 때마다 척척 달라붙는 A급 드레스를 입고, 나는 가장 싱싱하게 늙은 퐁듀. 이봐, 좀 더 맛있게 먹어줄 수 없겠어? 


서른 해


결국 비가 내린다
기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럴 땐 이름을 버리고 길을 나선다
버려진 내 이름으로 누군가 허기를 달래리라
우산을 들고 걷는다
웅덩이마다 첨벙이는 기억
감광액에 담긴 후 인화되는 발자국 몇 개

잊지 않기 위해
내 가장 순한 청춘을 암실에 말린다
젖은 말로 묘사할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을

우산을 버리고 버스를 타면
다시 나는 젖는다
몇 개 사막을 지나면서도 우산을 버리지 못하던 날들
언젠가 떠올릴 후회의 시편을 사막의 모래 위에 적으며 그렇게
흠뻑 더럽고 싶던 20대를 끝냈다
버스는 우기의 종착지로 달려가고 있다


토네이도


한때 나에게 진지했던 남자가 찾아왔다
토네이도가 몰아친 날이었다
우리는 깊고 비린 카페로 숨어들었다

한때 나에게 진지했던 남자가
바람 소리보다 가벼운 담배를 물었다
그동안 섹스한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귀에 익은 교성이 찻잔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리는 마주 앉았고
한때 나에게 진지했던 남자가
절정에 다다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토네이도는 문틈에 자신의 성기를 넣고 있었다

찻값을 계산하면서 그에게
어디로 가냐고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카페에서 나와
서로 다른 돌풍 속으로 빨려들었다


■ 당선소감 ■


시는 진주조개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이제 나는 울면서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게 시라고 생각해왔다.
당선소식을 듣고 천천히 돌아봤다. 만일 그때 내가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시인이 될 수 있었을까. 대신 아파 주고 싶은 시간을 건너오지 않았다면, 당신 때문에 패배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마냥 행복했더라면.
시는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는 말을 믿는다. 그러므로 진주조개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앞으로 나는 기꺼이 고통 받으리라.

제 시를 처음으로 숨쉬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말로 다하지 못하는 감사를 전합니다. 정우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창수 선배, 재훈 선배, 03년부터 함께 한 중앙문학연구회 멤버들, 스무 살 때부터 저를 길러주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선생님들, 기쁨을 함께 해준 찬이,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신 부모님, 어여쁜 감성을 물려주신 할머니 할아버지, 내 동생 주원이, 그리고 절망을 희망으로 기록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황수아 / 1980년 서울 출생.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 심사평 ■


경험적 구체성 속에 살아난 심미적 미감

2008년 〈문학수첩신인상〉 시 부문에는 2,600여 편의 작품이 응모되었다. 작년에 비해 괄목할 만한 응모 증가가 눈에 띈다. 오랜 시간의 노력이 녹아 있는 시편들 덕분에, 심사위원들은 즐겁고도 보람 있는 시 읽기를 경험했음을 고백한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우리 《문학수첩》이 메이저 매체로서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는 유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아직도 우리 시대에 시를 향한 열망이 마르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물적 사례라고 생각된다. 응모자들의 시편은, 담론적 집중성을 보이는 경향보다는, 각자의 경험적 구체성을 바탕으로 개개의 언어 미학의 완성을 꾀하려는 의욕을 두루 보여주었다. 편차가 심하기는 했지만, 읽을 만한 시편들이 많았음을 기록하고 싶다. 이 모든 것이 개성과 완결성의 황금 분할을 통해 우리 시의 미래를 개척해 가려는 젊은 언어들의 긍정적 면모라고 생각되었다.

예심을 통해 올라온 분들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분들을 가나다순으로 밝히면, 김재홍, 오세광, 전형주, 최빈, 황수아 씨 등이었다. 김재홍, 오세광, 전형주 씨의 시편들은 유려한 언어 구사와 함께 매우 안정된 시상을 보여주어 여러 모로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었다. 말의 호흡을 이끌어가는 힘과 이미지 조형에서도 일정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더러는 작품들 사이의 균질성이 떨어지고, 더러는 미적 완결성에서 미더움에 이르지 못하고, 더러는 신인으로서의 새로운 언어적 패기가 모자라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합의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은 최빈 씨와 황수아 씨의 작품에서는 일상의 활력 속에서 가장 근원적인 생의 상처와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는 품과 격이 매우 미덥게 관찰되었다. 최빈 씨의 작품들은 이미 작년에도 역량과 가능성을 한껏 보인바 있는데, 이번에도 감각의 밀도가 정제되어 수준작으로 평가되었다. 황수아 씨의 작품들은 신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잘 보여주었는데, 특별히 경험적 구체성 속에 심미적 감각을 살려 재생하고 배열하는 언어적 힘이 밀도 있게 관찰되었다.

 

이분들의 시편은 우리 시의 다양한 미학적 충동과 방향을 여러 방향에서 보여주어, 심사위원들로서는 어느 분이 당선자로 뽑히더라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만큼 작품의 성취가 균질적이고, 충분한 습작 시간을 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심사위원들은 심미적 감각과 경험적 구체성이 어울려 있는 황수아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합의하였다.

심사위원들로서는, 앞으로 더욱 젊고 패기에 찬 젊은 언어들이 우리 《문학수첩》에 관심을 가지고 도전해 오기를 바란다. 이번에 당선되지 않은 분들도 더욱 정진(精進)하기를 바라고, 당선자에게는 초심을 건강하게 견지하면서 활달한 자기 갱신을 이루어가는 신인으로서의 정진을 새삼 부탁드린다. 

심사위원 : 김재홍, 김종철, 유성호

출처, 푸른시의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