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현란한 언어들 / 김남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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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언어들 / 김남석

휘수 Hwisu 2006. 12. 5. 00:43

현란한 언어들 / 김남석


1. 시어의 정숙함을 위하여

2006년 상반기에 발표된 시집들을 읽다가, 시어의 외양이 무척 현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양한 시인들이 등장하고 있기에, 그들이 사용하는 시어(언어) 역시 다를 수밖에 없고, 그 다름은 결국 한 자리에 모아놓았을 때 만화경 같은 풍경을 만들어낼 것이다. 당연히 현란하고 그래서 어지러울 것이다.
하지만 시어는 기본적으로 침착해야 한다. 현란함을 배격하자는 뜻이 아니라, 시인의 중심 생각에 종속되는 일률적인 질서가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어는 화려한 외양을 걸쳤지만, 그 안에 사유의 질서와 미적 체계를 구현할 수 있는 의식 있는 유기체여야 한다. 나는 2006년 시집(2005년 11월에 간행된 장석원의 시집 포함)에서 그 말의 질서를 찾아보고자 한다.


우리에게 다시 시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사유와 명상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시는 영혼의 울림을 반영하거나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울림을 인간 세상에 깊숙하게 되울리는 임무를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의 현란함뿐만 아니라, 말의 침착함에 대해서도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현란한 말이 더욱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면, 침착한 사유를 보조하거나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수단 역시 증폭되어야 할 것이다. 그 때에만, 영혼의 깊이와 마음의 맑기를 드러낼 수 있는 시가 허용되지 않을까 싶다. 작금의 젊은 시는 이 간단한 논리를 잊는 경우가 많았다.

2. 빙벽의 언어, 불꽃의 언어, 그리고 어둠의 언어

신종호의 시집 《사람의 바다》(천년의 시작, 2006년 3월)와 발문 이경수의 「결빙의 꿈과 가난의 윤리」를 읽으면서, 신종호가 구사하는 세 가지 색깔의 언어에 대해 생각했다. 이경수의 발문이 워낙 아름답고 정확하게 신종호의 시 세계를 보여주고 있기에, 해석적 측면에서 더 이상 할 이야기는 없다. 다만, 신종호의 언어가 드러내는 현란한 색감은 이경수의 논의에서 빠져 있음으로 다루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신종호의 시집은 네 개의 절편으로 구획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3부가 시집의 제명과 같은 ‘사람의 바다’이다. 시의 표현과 의미를 차치하고 시인의 의도만 놓고 보았을 때, 이 시집의 중심은 3부가 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나에게 신종호의 시집은 1부, 즉 ‘수목한계선’을 중심으로 읽힌다. 그것은 1부가 드러내는 두 가지 색감 때문이다.


1.
그대들이여, 북구의 오로라 속을 성큼성큼 내달려 순록의 무리를 뒤쫓는 설인(雪人)들의 투명한 얼굴을 꿈꾸어 본 적이 있는가. 훅훅 내뿜는 입김만으로도, 안으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피가 잘 돌아 온몸이 얼음처럼 빛나는 수목한계선의 사람.

2.
생의 절박한 순간을 빙벽(氷壁) 안에 응결시키며 썰매를 타고, 바람을 타고, 우주를 끌며 온몸으로 설원(雪原)을 밀고 가는 백색 투혼. 심장이 폭발하는 마지막 지점에서 망치처럼, 귓속으로 불어오는 내 영혼의 툰드라, 툰드라.
―〈수목한계선〉

이 시를 읽으면서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 오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하는 순간처럼 눈앞에 번쩍하는 하얀 빛이 출렁거렸다. 이러한 느낌은 시인이 사용한 몇 가지 단어와 설정 때문이다. 가령 ‘북구’, ‘설인(雪人)’, ‘투명한 얼굴’, ‘입김’, ‘얼음처럼 빛나는’, ‘빙벽(氷壁)’, ‘설원(雪原)’, ‘백색 투혼’ 등의 단어는 하얀 눈과 얼음, 그리고 그 위로 쌓여 고인 억겁의 시간과 광활한 백색의 대지를 연상하게 한다.


응당 읽는 이들은 하얀 색깔의 언어에 침윤되게 되고, 한 번도 본 적은 없으나 여러 풍문에 들어 본 적 있는 북쪽 대지의 광활함과 막막함을 떠올리게 된다. 나에게 신종호 시집의 1부는 일단 하얀색이다. 빙벽의 언어. 시인이 말한 대로, 빙벽 안에 얼어붙은 느낌을 시어로 응결시킨 시편들이다.
그러나 몇 번 재독하면, 아니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 시와 1부의 시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른 색감을 눈치 챌 수 있다. 사실 위에 인용된 시에도 하얀색 말고 다른 색감이 이미 침투해 있다. 그것은 ‘피’, ‘심장이 폭발하는’ 등의 시어에서 보이는 붉은 색감이다.

겨울 밤. 하늘이 맑게 얼었다. 깨끗한 얼굴로 달이 웃는다. 알몸으로 떨고 있는 나무들, 어깨 위로 떨어지는 시린 바람. 투명한 얼음이 되고 싶다. 내 피를 삼킨 달이 웃는다. 하얗게 걷고 있는 얼음 덩어리.

그림자도 얼어버린 빙벽 속을 걸어가는 등 굽은 낙타. 뙤약볕 어지럽던 날들, 모래에 묻힌 흰 뼈처럼 말라버리고 싶던, 그런 꿈을 꾼 날이면, 달도 모래처럼 부서져, 흰 눈으로 내리는, 여기 하얀 세상. 얼음이 되고 싶다.
―〈얼음이 되고 싶다〉

시인이 꿈꾸는 북방의 상상력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이다. 위의 시는 겨울 밤, 한국의 정취를 담고 있다. 하늘을 하얗게 얼어붙고, 깔끔한 달이 산등성이로 고개를 내밀며, 그 빛에 외롭게 서 있는 나무들이 보이는 밤. 이를 지켜보는 이의 어깨 위로 시린 바람이 불면, 시인은 투명한 얼음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시인의 표현대로, 그 순간 하얀 얼음처럼 투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 시의 1연은 겨울 밤의 정취와 얼음이 되고 싶은 욕망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밤의 정취가 보다 확대되고, 얼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심화되면, 우리는 북방을 헤매고 있을 시인의 상상력을 뒤쫓을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2연이다. 왜냐하면 아직 북방의 수목한계선에 도달하기 이전에, 시인의 내면에 춤추고 있었을 불꽃의 그림자가 너울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림자도 얼어붙은 빙벽이라고 표현했다. 차가움과 단호함이 엿보이는 시구인데, 그 안에 등 굽은 낙타도 표구되어 있다. 낙타는 언제 빙벽 안으로 들어갔을까. 낙타는 시인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시인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뙤약볕 어지럽던 날’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모래가 얼음을 대신하던 시간과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옛날에는 사막이었다가 지금 빙벽 속에 갇힌 신비한 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


시인이 주는 단서는 그리 많지 않지만, ‘꿈’과 같은 단어를 확대 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빙벽 속에는 많은 것들이 박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것은 불꽃이다. 뙤약볕 아래 그 어질거리던 열기를 딛으며 사막을 횡단했을 낙타의 심장. 낙타처럼 어쩌면 생의 불꽃같던 시기를 걸어넘어야 했던 시인의 열망과 불꽃의 언어. 모래처럼 부서지는 세상에서 더 불꽃 같기를 원했던 삶의 흔적.


시인은 그 흔적을 빙벽이라는 백색의 언어에 감추고 싶어한다. 다시 말해서 빙벽에 대한 상상력은 시에 대한 믿음이다. 시인은 시가, 시의 언어가, 순백의 차가움이, 내면의 강렬한 열망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로 보존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불꽃과 열기는 열정의 언어이다. 시는 차가운 이성으로 생의 고난과 역경 그리고 욕망을 잠재우고 싶어 하지만, 내면의 강렬함마저 잠재울 수는 없다. 그의 시에서 살아나는 불꽃(의 언어)이 그 증거이다. 신종호의 두 가지 색감은, 빙벽 속에 갇혀 타오르는 불꽃의 심장일 것이다.

마사이족 청년의 늘씬한 다리 사이로 흐르는 노을 강. 태양을 삼킨 바오밥나무 아래, 코끼리 울음 껍질. 불타는 음악의 땅 세렝게티, 웅고, 웅고롱고르…

야생의 혀들이 찢어버린 벌거벗은 대낮의 살〔肉〕. 시간의 붉은 목에서 떨어지는 날 비린내. 몸서리치며, 밤의 자궁이 서서히 열린다.

보라. 아직 떠나지 않은 지상의 마지막 신들이 이제 막 잠들려 한다. 가릉거리는 대지의 목울대에서 명멸(明滅)하는 세렝게티, 웅고롱고르.

선악의 경계를 넘어버린 그대 이마의 차가운 별빛 한 줌…….
―〈아프리카〉

시의 위치로 보았을 때 〈아프리카〉는 1부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백색과 북방과 얼음의 상상력이 극대화되기 위해서는, 〈아프리카〉의 붉음과 열기와 적도의 상상력이 침투한 시가 상극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종호 시의 ‘차가운 얼어붙은 불꽃’의 내밀한 심정을 감지한다면, 위의 시는 1부의 시들을 중화시키기 위해 그 안에 지펴진 열기로 이해될 수 있다.
붉은 색과 흰 색의 감촉, 그리고 그 안에 감추어진 열정과 이성의 언어. 신종호 시의 현란함은 일단 두 가지 색감과 대비 그리고 상호 침투와 길항 작용에서 발생한다. 위의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선악의 경계’를 넘는 듯한 강력한 경계선이 보이는 듯 하다.

신종호 시의 색감은 이 두 가지 이외에도 더 있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암흑의 색이다. 어둠의 색. 그것은 자전적, 성장기적 체험과 관련이 있으며, 시인의 고백투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시들이 몰려 있는 곳이 3부이고, 대표적인 시가 〈사티로스의 가족사〉이다. 이 시는 어릴 적 가난했던 화자가 ‘주인집’ 자식들의 눈치를 보며 텔레비전을 훔쳐보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화자는 비굴한 태도로 그들의 동정을 유발했고, 그러한 자신의 태도는 어머니의 눈을 거쳐 자신에게 전달되었다. 자괴감에 시달리며 발작적으로 주인집의 연못을 파괴하는 심정은 비슷한 경험을 지닌 이들에게 깊은 공감과 함께 아픔을 전해준다.
하지만 이 시는 분명 누적된 삶의 경험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자괴감의 정조가 짙지만, 그것은 제어되지 않은 감정의 질주를 연상하게 한다.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화자의 태도도 그렇게 안정적이지 못하다. 광포한 질주가 있는 대신, 차가운 거리감은 없다고 해야 할까.
나에게 신종호의 시 중에서 가난과 성장 그리고 삶의 구질구질한 세목을 가장 잘 보여준 시는 〈버려진 구두〉이다.

버려진 아버지의 구두는 쓸쓸하다.
길 위에서 살을 허물다가
길이 끝나는 곳에서 허당을 밟고
후미진 골목에서 하늘을 향해
몸을 뒤집고 모로 누워 가슴에
쓸쓸히 눈을 담는 한 짝의 낡은 구두
삶이란 뒤축의 힘으로 일어서서
뒤축의 힘으로 무너진다.
뒤뚱거리는 어수룩한 나의 뒷모습에서
또 하나의 슬픈 아버지를 본다.
거친 돌부리에 체이면서
쉬지 않고 걸어가야 하는 방랑의 길
상처투성이의 검정 구두 한 켤레에
담긴 굳은살의 추억과 아픔들
뒤축의 힘으로 일어섰다 쓰러지는
아름다운 삶의 유전(遺傳)
나는 버려진 구두처럼 울고 있다.
―〈버려진 구두〉

위의 시에는 ‘쓸쓸하다’, ‘쓸쓸히 눈을 담는’, ‘슬픈 아버지’, ‘울고 있다’ 등의 감상적인 시어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 시는 감상적이 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 구두, 화자를 잇는 유연한 상징 때문이다. 구두는 그 옛날 아버지의 전유물이었다. 아버지는 구두를 신고 아이들과 차별되는 세상을 살았을 것이다. 그 아버지의 세계는 돈을 벌고 세상을 만나고 아이들을 보호하고 가정을 이끄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세상에 아들이 뛰어들었다. 아버지가 겪었을 좌절과 절망 그리고 힘겨운 삶에 대한 회의도 겪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구두가 왜 쓸쓸한지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세상을 걸어다니던 구두, 그 구두는 세상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그 뒤축의 힘으로 굳건히 일어서지 못하고, 그만 모로 넘어지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화자 자신의 구두도 넘어질 것이다.


세상을 힘겹게 살았던 보상이 고작 넘어진 구두에 불과하단 말인가. 시인은 ‘거친 돌부리에 체이면서 쉬지 않고 걸어가야 하는 방랑의 길’에 자신도 들어섰다고 말한다. 검정 구두 한 켤레에 ‘굳은 살의 추억과 아픔들 / 뒤축의 힘으로 일어섰다 쓰러지는’ 경험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구두 틈에 고인 어둠. 그 어둠은 신종호가 그려낸 세 번째 색감이다.


하지만 신종호는 구두에서 구두로 넘어오는, 아버지에서 아들로의 유산을, ‘아름다운 삶의 유전(遺傳)’이라고 애써 말하고 있다. 실망스럽고 무엇 하나 자랑할 것 없는 인생이지만, 뒤축의 힘으로 섰다가, 아니 서려고 했다가, 무너지는 것이 인생 아니냐고, 애써 자위한다고 할까. 그 태도가 마음에 든다. 그래서 그가 울고 있다고 말해도, 하나도 과장되거나 억지라는 생각이 안 든다. 흰색과 붉은 색 사이에 검은 색이 있기 때문에 그의 현란한 색감도 조악하다는 생각이 안 든다.

3. ‘구멍’에 대한 놀라운 집착

최서림의 시집 《구멍》(세계사, 2006년 4월)에서 ‘구멍’이라는 시어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구멍》을 펴니, 첫 번째 시가 〈구멍〉이었다. 시인들은 이른바 자신의 표제시를 시집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그리고 시집의 제명으로 택하는 경우가 많으니, 통념적으로 이상할 것이 없는 배치였다. 그 다음 시는 〈까시래기〉 였는데, 이 시에서도 특별히 이상한 징조를 찾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구멍’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 시집에서 ‘구멍’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 시가 그렇게 특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다음 다음 시는 〈대나무〉. 이 시에는 ‘구멍’이라는 단어가 줄기차게 쓰였다. 가령 “겨울날 삭풍에 대나무가 더욱 크게 휠 수 있는 것은 / 속에다 잔뜩 감추고 있는 구멍 때문”이라든지, “구멍은 사물이 놀 수 있는 자리이다 / 구멍이 없는 사물은 자유가 없다” 든지 하는 구절이 그러하다. 그 다음 시도 마찬가지였다. 점입가경이라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시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구멍’과 관련이 있거나, ‘구멍’이라는 단어를 언급하고 있거나, ‘구멍’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들로 가득했다. 심지어는 ‘구멍’이라는 단어를 찾아야만 안심하고 시를 읽을 정도였다. 시인이 왜 이 시집의 제명을 ‘구멍’이라고 지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 시사(詩史)에서 이토록 일관된 시집이 몇 권이나 될까. 만해의 《님의 침묵》은 초지일관 ‘님’을 부르며 시를 이어갔다. 비슷한 형식의 하종오 시집도 ‘님’에 대한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다. 찾아보면,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있다고 해도, 이러한 일관성은 쉬운 일이 아니며 함부로 넘기기도 어려운 일이다. 다시, 시인이 말하는 ‘구멍’을 보자. 아무래도 표제시가 그가 말하고 있는 ‘구멍’의 실체를 가장 종합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나는 원래 구멍 안에서 만들어졌다.
껌껌하고 긴 구멍 안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불씨를 이어받았다.
聖火 봉송하는 릴레이 선수처럼.
아늑하게 조여주는 긴 터널을 뚫고 나와 드디어
거친 빛의 세계로 나왔다. 태초의 명령에 따라.
빛을 받아먹고 내 안의 불씨는
바람 센 땅의 삼나무모냥 자라 올랐다. 이글이글.
언젠가 나는 또 하나의 구멍으로 돌아가리라.
나의 불은 그 안에서 소멸되리라. 충직하게.
신화와 소문의 산실, 비밀스런 구멍은
내 몸이 드나드는 집이고
불이 제 길을 틀어가는 통로이다.
나는 구멍으로 너를 사랑해 왔다. 정직하게.
사랑은 불이다. 참말로
나의 불은 눈구멍, 귓구멍, 콧구멍, 입 구멍, 땀구멍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빚어진 구멍을 통해
네 안의 핵발전소로 흘러들어간다. 법칙보다 더 고집스럽게.
불과 불이 얽혀서 핵처럼 터지는 사랑.
구멍 안에서 탄생하는 또 하나의 불씨 알.
또 하나의 눈물 방울.
―〈구멍〉 전문

속화된 상상력에서, ‘구멍’은 성적인 것과 관련이 깊다. 시인도 이러한 관련성을 의식하고 있다. 묘사된 여자의 자궁이 그러하고, ‘아늑하게 조여준’다는 표현이 그러하다. 그만큼 구멍의 어감은 성기의 그것과 비슷하다. 시인은 과감하게 주장한다. 그 안에서 자신이 태어났고. 긴 터널을 돌파하는 정자의 흐름 속에서 잉태되었고, 구멍을 통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고. 그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의 시작은 구멍을 통해서였다.


구멍은 자라난 시인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였다. 사람은 내 안의 것을 밖으로, 바깥의 것을 내 안으로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정보를 주고받고 지식을 주고받고 감정을 주고받고 육체를 주고받고 어떤 경우에는 영혼이나 사랑과 같은 정신적인 것을 주고받는다. 시인의 말을 다시 믿는다면, 세상과 무언가를 주고받는 과정이자 절차이자 통로가 구멍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구멍에 감사해야 한다.


시인은 아마도 세상과 자신, 혹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 대해 깊이 천착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그 원천과 통로를 생각하게 되었고, 당연히 구멍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후의 시에서 줄기차게 확인된다. 시인은 그가 읽는 세상, 그가 읽은 작품, 그가 생각하는 문학가, 그가 주고받는 타인과의 사랑에서 구멍이라는 존재를 항상 의식하고 감지한다. 그의 시는 그러니까 그가 무엇인가를 ‘나’ 바깥의 누군가와 주고받는다는 의식의 산물인 셈이다.
이러한 시인의 인식은 장자가 말한 ‘비어있음의 미학’에 근거한다. 다음과 같은 시는 최서림이 어째서 구멍, 즉 빈 공간에 집착하는지를 철학적으로 알려준다.

예로부터 저쪽 한량들이
기타나 만돌린을 가지고 놀았듯이
이쪽에서도 생활에 구멍 뻥뻥 뚫려 있는 축들이
거문고나 피리를 만지며 흥성거려 놀 줄 안다
피리나 대금은 속을 통과해 나오는 바람으로 소리가 나는데
그 속이란 게 그저 뻥 뚫려 있는 듯해도
천태만상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허(虛)란 실(實)의 다른 이름인 법,
거문고 마디마디 울혈 진 가락이 하늘과 땅 사이를 진동시킬 수 있는 이치도 알고 보면
뜯는 이의 마음이 텅 비어서 가득 차 있기 때문인 것.
텅텅 비어 있는 마음에서 저며 나와 푸르게 여울져 흘러가는 소리가 바로
뜯는 이의 혼이자 거문고의 정신인 것,
잘 익은 가을날 오동나무를 베어 보라
긴 줄기를 따라 虛의 정신으로 꽉 매어진
텅 빈 구멍이 나 있을 것이다
잔뜩 움켜쥠보다 손을 탁 놓아 비워버림이
자유롭다는 것을 진즉 알았는지
오동은 씨안 시절부터 그 안에 구멍을 키워왔을 게다
마음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어 놀 줄 아는 축들만이
속이 텅 비어버려 쓸모없는 오동의 마음을 알아차린 법,
구멍 없는 것들은
놀 줄도 놀 자유도 모른다
요새 사람들 노느 게 어디 노는 것인가
―〈오동나무〉

시인은 오동나무를 예찬한다. 그 비어 있음으로 그 쓸모 있음이 결정된다는 논리이다. 그러면서 허와 실의 이치를 설파한다. ‘허’란 비어 있음이다. 오동나무의 속이 비어 있어, 그것이 소리를 만들 수 있고, 그 소리는 놀이의 풍취를 만들 수 있다. 시인은 거문고나 피리의 소리가, 속을 통과해 온 바람에 의해 일어나듯, 비어 있음의 이치가, 삶과 정신을 윤택하게 하는 놀이를 가져올 수 있다고 비유한다.
시인이 말하는 놀이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시인은 고급스러운 놀이, 즉 문화와 예술을 말하고 있으며, 시를 쓰는 행위 자체를 말하고 있다. 시인은 시처럼 말의 비어 있음을 통해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어떤 이치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그가 말하는 대로 하면 ‘허의 정신’이고 말의 ‘텅 빈 구멍’인 셈이다.


비어 있음의 논리는 그다지 낯선 것은 아니다. 동양의 현자들은 일찍부터 비어 있다는 것이 곧 유용하다는 역설의 논리를 펴 왔다. 많이 가진 자보다 적게 가진 자가 더 행복할 수 있고, 많이 배운 자보다 적게 배운 자가 더 자유로울 수 있음을 설파해 왔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은 그 속뜻까지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들리고 있다.


문제는 실천이다. 최서림의 시에서도 실천이다. 최서림은 ‘비어 있음(구멍)’의 원리와 가치 그리고 철학적 기반과 지혜로서의 위상을 보여주었지만, 과연 최서림의 시가 그러한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옛날 현자들의 가르침은 가르침 그 자체보다는, 그 가르침을 펴는 현자의 태도와 입장에 따라 존경받기도 하고 무시받기도 했다. 적게 가지고 적게 배울 것을 주장하면서, 스스로가 많이 가지려고 하고 가진 것을 자랑하려 한다면, 그 어떤 놀라운 가르침이라 해도 수긍하기 힘들 것이다. 최서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오래된 항아리〉는 각별히 주목된다.

플라스틱 통에서 시들시들 다 죽어가던 감들을 장독 안으로 옮겨 놓으니 그놈들, 금세 생글생글 되살아난다 배가 둥근 장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꼭 임신한 내 아내 같다 된장이나 감은 장독 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다 그놈들, 자면서 익는다 이따금 벌어진 아가리로부터만 공기를 마시는 게 아니다 된장이나 감은 항아리 피부를 통해서도 숨을 쉰다 여름날 된장이 천둥 번개에도 까무러치지 않고 마음 푹 놓고 익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엄마 뱃속 같은 항아리 때문이다 오래된 항아리 까칠까칠한 뱃가죽으로 새벽 안개가 여인의 엷은 한숨모냥 스며들고 가을 햇살이 그의 맑은 기름을 풍성히 짜 넣어준다 명태 말라가는 냄새가 뒷간 냄새랑 어깨동무하고 항아리 안으로 숨어 들어와 낄낄 돌아다닌다 자궁 속에서 먹을 것 다 먹고 마실 것 다 마시고 나면, 그야말로 三冬 내내 웅크리고 자고 나면, 된장은 이른 봄날에 말캉말캉한 갓난아기처럼 노오랗게 태어난다
―〈오래된 항아리〉 전문

솔직하게 말하면, 이 시를 읽고 나서야 항아리의 신묘한 힘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시들시들하던 감이 둥근 장독에서 살아나다니, 지금도 안 믿기는 면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확고하게 그렇게 믿고 있고, 그 저력을 텅 빈 공간에서 찾고 있다. 시인의 말로 하면 항아리의 구멍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시에는 ‘구멍’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텅 빈 공간이라는 다소 관념적인 어사도 쓰이지 않았다. 왜 그럴까. 오래된 항아리의 진짜 힘은 그 안의 텅 빈 공간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그 공간을 둘러싼 어떤 보호막 덕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항아리의 빈 공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항아리의 신묘한 공간은 그 공간을 지탱하는 사물, 즉 항아리 벽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아무리 빈 공간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 공간을 외계와 구획지어 주는 물체가 없다면 무용지물일 것이다.


구멍도 마찬가지이다. 구멍은 시인의 말대로 ‘나’와 ‘세계’를 묶는 힘이고, 엮는 통로이다. 자아와 타자가 만나고, 내면과 외계가 만나고, 표현과 이해가 결합하는 지점이다. 구멍이 없다면 공간도 없고, 공간이 없다면 구별이 없으며, 구별이 없다면 소통도 없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구멍은 소중하다.
그러나 구멍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구멍은 구멍이라는 공간을 다른 공간과 구획 짓는 어떤 경계에 의해 존립 가능해진다. 시인의 〈오래된 항아리〉 가 주목되는 것은 구멍이 아니라, 구멍에 대한 예찬 일변도가 아니라, 그 구멍을 만드는 관계에 대해 다른 각도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항아리는 홀로 영묘하지 않다. 그 밖에는 새벽안개가 적당히 스며들 수 있도록 안을 보호하는 벽이 있고, 가을 햇살이 기미를 드리울 수 있도록 슬그머니 막아서는 뚜껑이 있다. 명태 말리는 냄새 옆에 뒷간 냄새를 섞일 수 있도록 조절하는 막이 있고,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잘 수 있는 온기의 집이 있다. 그 모든 것이 공간을 나누면서도 소통시키고, 두 세계를 소통시키면서도 별도로 분리하는 적절한 역할 덕분이다.
〈오래된 항아리〉는 그 조절과 조화의 힘을 통찰한 시이다. 구멍이 구멍일 수 있기 위해서는, 구멍의 존재와 필요, 그리고 가치와 의미에 대한 넉넉한 여유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비움과 채움, 유입과 차단의 미학이 공존해야 하는데, 이 시가 그러한 중용의 미를 구현한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구멍은 세상의 중심, 생각의 중도가 될 수 있다. 이 상징이 유효한 것도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마음 때문인 것이다.
4. 현란함의 극치, 이해 불가능의 언어

장석원의 시는 난해하다. 어떤 경우에는 해석 불가능하다. 하여, 그의 시를 읽으려 할 때마다 항상 난감하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 해석 자체를 과연 시도해야 하는가? 그의 시집 《아나키스트》(문학과지성사, 2005년 11월)를 보았을 때 이런 질문과 난감함은 더욱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석원의 시에 대한 도전은 현실의 문학관을 넘어서려는 일종의 노력이다. 그의 시는 난해함과 개성과 해석 불능을 시의 첨단 기법으로 이해하는 문단 일각에 대한 탐구에 다름 아니다. 그의 시는 그런 의미에서 1930년대 문단이 난감해 했던 이상의 시를 연상시킨다.
먼저, 그 중 평이한 편에 속하는 시 한 편에서 출발해 보자.

경동시장 네거리 ‘속 편한 내과’의 간판을 보며
죽어 그릇에 담긴 선연한 것들을 떠먹는다
내장 도가니 선지, 피 냄새 밴 명사들
숟가락에 담긴 국물이 죽은 자의 눈망울 같다
국밥을 먹다가 창밖 철제 계단을 본다
검은 나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날아간다 구름에 묻어 있던 햇빛처럼

석양이 뺨을 물들이고 있다
어둠의 숨소리가 들린다
눈썹을 스치는 바람처럼
검은 나비 날아오른다
물마루 스쳐 튀어 오르는 햇살처럼 깊고 부드럽게
밀고 들어와 서걱이는 검은 나비 아래
나의 흔들림이 있고 오랜 벗 같은
출렁임이 있고 病通으로 우는 침묵이 있다

좋은 친구처럼 편안한 이웃처럼
속 편한 내과 옆에 이가 편한 치과
동일성의 현재진행형이 거기에 있다
나의 그림자 같은 검은 나비
과거가 날려보낸 검은 나비 나를 데리고
지워진 나를 향해 날아간다
―〈나는 과거에서 현재로 귀양 왔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최근 개봉되어 공전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영화 작품 하나를 예로 들어 보겠다. 허리우드 블록버스터 대작 〈미션 임파서블 3〉. 이 작품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액션과 반전으로 이미 많은 영화 매니아들을 사로잡았다. 허리우드 영화를 얕보는 이들도 이 영화를 보면서 긴장감을 늦추기 어려운데, 이 작품의 재미를 보다 가속시키는 것이 있다. 그것은 ‘토끼발’이다.
주인공 탐 크루즈를 비롯해서 많은 등장인물들이 시종 일관 토끼발을 찾아다닌다. 실제로 토끼발은 탐 크루즈에 의해 탈취되어 악당에게 인계되고, 그 과정에서 그 물건의 모양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토끼발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플롯을 인도하고 굴절시키는 중요한 물건인데도, 막상 그 물건의 쓰임새는 밝혀지지 않는다.


〈미션 임파서블 3〉에 열광하는 사람들일수록, 특히 네티즌을 중심으로 하는 많은 매니아들이, 그 비밀에 관심을 피력했다. 거북이를 분발시키기 위한 촉진제라는 우스운 주장부터, 핵무기를 능가하는 파괴력을 갖춘 신무기라는 주장, 영화 속 인물의 이야기를 빌어 새로운 화합물이라는 주장까지, 각종 의견이 난무하고 있다. 어떤 기자는 〈미션 임파서블 4〉를 끌고 가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주장도 제기했다.
이러한 다양한 반응은 그 자체로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누구도 ‘토끼발’의 정체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작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도 모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텅 빈 상징일수록 더 많은 관심과 이해와 도전적 해석과 해석적 참여를 유발하기 때문이다(영화에서는 이러한 수법을 맥거핀(macguffin)이라고 하는데, 히치코크가 〈나는 비밀을 안다〉에서 처음 사용한 이래 역동적인 줄거리 구성을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즐겨 쓰여 왔다).


인용된 시를 보자. ‘검은 나비’는 일종의 맥거핀이다. 1연에서 시인은 경동시장 네거리가 바라보이는 어딘가에서 국을 먹고 있다. 시인이 먹는 것은 내장탕 혹은 도가니탕이거나 어쩌면 선지국일 수도 있다. 이것들은 동물들의 사체의 일부이다. 따라서 검은 나비는 자신이 먹고 있는 국의 원재료, 그러니까 죽은 고기를 가리킬 수 있다.


다음, 2연을 보자. 석양이 지고 있다. 어스름이 내리고 있고,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어둑어둑해지는 도시의 풍경이다. 이 시점이 되면 마음이 쓸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 쓸쓸함과 땅거미를 묶어 혹은 별개로 해서 검은 나비라고 칭할 수도 있다. 더구나 이 연에서 시인은 검은 나비가 날아오른다고 말했다.


3연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시인은 ‘나의 그림자 같은 검은 나비’라고 하면서, 검은 나비를 수식(직유)하고 있다. 그림자는 빛이 물체에 가려진 공간일 수도 있지만, 의식의 저 밑부분 혹은 시간의 지워진 저 편을 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기억의 어떤 공간이 검은 나비가 될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검은 색은 무의식 혹은 과거와 연관되는 색이다.


아니면, 그냥 검은 나비일 수도 있다. 국을 먹고 있었고 어둠이 지고 있었고 과거와 내면에 대한 생각에 침잠하고 있을 때, 정말, 검은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갈 수도 있었다. 시인의 눈에 포착된 검은 나비는 곧 시의 글감이 될 수 있었다.


다른 시와 연계하여 살펴 볼 수도 있다. 시인은 이 시 다음에 〈나는 현재에서 과거로 귀환했다〉, 〈나의 전부는 거짓이었다〉, 〈과거에 시작된 광포한 빗줄기〉를 연달아 배치하고 있는데, 이 시들은 비슷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무엇보다 ‘검은 나비’를 언급하고 있다. 그 부분만 찾아 인용해 보겠다.

그의 외침을 들이마신다
나는 늑대 혹은 개, 나는 늑대 혹은 거세된 아버지 혹은
과거의 아들, 과거의 나에게 고용된 기계, 녹스는 기계

破局이 지난 후에도 생활은 계속될 것이고 태양은 찬란할 테지만
나의 전부가 재건되는, 죽은 자가 다시 죽는
경동시장 네거리 옛날의 骨片 같은 기둥에 기대 서서
거리를 횡단하는 검은 나비를 본다
모든 것이 명료해지는 夏至의 햇빛
―〈나는 현재에서 과거로 귀환했다〉 부분

원숭이가 앞구르기를 한다
틀어쥔 목의 사슬을 놓아주는 주인
꺾인 꽃처럼 나를 놓아주던
검은 눈동자에 어리는 아버지

내가 지니고 있던 무덤 밖으로
검은 나비 날아간다
짐승이 바라보는 별처럼
검은 나비 쳐다본다
―〈나의 전부는 거짓이었다〉 부분

빗줄기가 문신을 새길 듯이 박힌다

돌아설 수 없기에 强者가 아닌
나의 출발은 미미하나 파국은 황홀하다
뒤돌아보는 순간 기억에 갇혀 있던 천 겹의 나뭇잎 불타오른다

한 시절의 침묵처럼
가늠쇠에 내려앉는 검은 나비
불꽃에 찢어지는 검은 나비
상처 속에 산 채로 묻혀 있던
검은 나비
―〈과거에 시작된 광포한 빗줄기〉 부분

〈나는 과거에서 현재로 귀양왔다〉의 후속편은 〈나는 현재에서 과거로 귀환했다〉이다. 두 시는 과거와 현재라는 두 시간대를 중심으로 귀양가고 돌아오는 일정한 연관성을 보인다. 그러므로 검은 나비의 상징은 더욱 관련성을 맺을 것 같다. 시인은 여전히 경동시장에 있다. 시인은 자신이 매장되었다고 암시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검은 나비는 과거에 매장된 시인의 현재적 영혼일 수도 있다.


인용된 부분을 보면 시인은 파국을 이야기한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산물일 수 있고, 녹슬어가는 폐기물일 수 있다는 자조(自嘲)가 지난 다음, 재건과 죽음 그리고 재죽음과 같은 알송달송한 말을 전한다. 그리고 검은 나비들을 본다. 거리를 횡단한다는 수식어가 붙었음으로,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시인의 눈에는 경동시장 네거리가, 죽은 자들의 집합 장소로 보이는 것일까. 자신을 포함해서.


정리해보자. 〈나는 현재에서 과거로 귀환했다〉에서 시인은 연속적으로 검은 나비를 언급한다. 그 언급은 과거의 시체, 현재의 회생과 같은 다소 비약적인 논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검은 나비가 죽음의 이미지를 강하게 풍기는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사람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시구가 내장되어 있다.


그 다음, 〈나의 전부는 거짓이었다〉를 보자. 여전히 시인은 경동시장 네거리에 있고, 사슬에 묶인 원숭이를 구경하고 있다. 아마도 약장수가 데리고 쇼를 펼치는 원숭이인 것 같다. 원숭이가 앞구르기를 하자, 주인이 목의 사슬을 풀어주고, 그 광경은 시인에게 자신을 놓아주던 아버지가 연상된다. 시인은 자신의 눈동자를 검은 눈동자로 시사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무덤 밖으로 검은 나비가 날아간다고 말했다. 자신이 지녔다는 무덤은 아버지의 무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시인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무덤에서 나간 것은 아버지의 영혼 내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추억)일 수 있다. 〈나의 전부는 거짓이었다〉에서 검은 나비는 아버지와 관련된 어떤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과거에 시작된 광포한 빗줄기〉를 보자. 시인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순간 기억의 저편에서 떠오르는 영상을 본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가늠쇠’라는 용어는 군대 시절을 상기시킨다. 시인은 군대와는 특별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 알고 있다. 가늠쇠에 내려앉은 검은 나비. 그것은 특정한 어떤 시절의 기억일 수도 있다. 불꽃에 찢어진다고 했는데, 그 불꽃은 총구에 뿜어나오는 화염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상처란? 더 이상은 모르겠다. 하지만 군대 시절의 어떤 기억과 검은 나비가 상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제는 정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검은 나비는 그 종류와 가능성이 다양해졌다. 결국 모든 것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도 하다. 검은 나비는 화자의 태도와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도 하고, 처음부터 정해진 추상적인 관념일 수도 있다.
이제 가능성과 추정으로 시작된 해석의 유희를 그만 두어야겠다. 검은 나비는 맥거핀이다. 추적하면 할수록 많은 단서들로 인해 그 실체를 더욱 감지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장석원의 시는 결국 맥거핀의 활용장이다. 어떤 시는 맥거핀이 여러 개로 등장하고, 비교적 쉬운 시들은 맥거핀을 제한적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어떤 시인들 맥거핀이 없을 수 있겠는가. 시란 결국 수수께끼이거나 미스터리이다. 그러나 다른 시들이 그 의미와 상징을 풀 수 있도록 단서를 남기는 것에 반해, 장석원의 시는 그 의미와 상징을 풀기 어렵도록 방해하는 힘이 강하다. 아니, 어떤 시들은 처음부터 의미와 상징의 자리를 비운다. 그러니 그의 시가 해석 불가능이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제 이러한 시에 대한 평가이다. 과연 옳은 것인가? 나도 그 평가의 중심을 비우려 한다. 결과만 놓고 보면 장석원 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 과정을 추적하는 과정은 의외로 재미있다. 시가 결국 말의 장난이자 놀이라고 할 때, 장석원의 시는 그 재미를 극대화한 사례에 해당한다. 특히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 그의 시는 흥미로운 도전이 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이제 그 단서도 조금은 넓게 펼쳐 놓는 것이 어떨까 한다. 현란함이 지나치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5. 색정(色情)어린 호소 혹은 그 흐느낌

박이화의 시집 《그리운 연어》(애지, 2006년 4월)를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어떤 부분은 다시 읽고 싶을 정도로 큰 애착이 갔는데, 그 이유는 현란한 말솜씨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는 감칠맛 나는 언어로 되어 있고, 들큰한 냄새를 풍기는 애로티즘으로 터질 듯 했으며, 고전과 시쳇말과 야한 농담을 마구 넘나드는 자유분방함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솔직했고 대담했다. 특히 성애에 대한 묘사, 몸에 대한 묘사, 사랑에 대한 묘사에서 그 솔직함과 대담함이 유별났다.
분명, 박이화의 시는 시대의 문제나 고민 혹은 인간의 본원적 속성이나 문명에 대한 통찰을 담은 시는 아니다. 그녀의 시는 다분히 개인적이고, 감각적이고, 또 유희적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는 지금의 시가 잊고 있는 하나의 미덕을 일깨운다. 그것은 즐거움이고, 가슴 떨림이고, 감각적인 쾌락이다. 그녀의 시를 읽으면 생각하기보다 감촉하게 되고, 깊은 비유나 상징에 골몰하기보다 재치나 말장난에 따라 웃게 된다. 거침없는 말솜씨는 비록, 제한적이지만, 분명, 까닭 있는 시의 존재 근거일 것이다.


그녀의 시집 1부를 보면, 꽃에 대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시인은 즐겨 시 속의 화자를 꽃에 비유하거나 꽃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1부만의 특징은 아니지만, 마치 시집의 초입에서 꽃(식물)의 상상력을 연습이라도 시키듯 1부에서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꽃과 자궁의 동일성을 주지시키는 연습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시인은 “내 입술과 유두, / 저 연분홍 꽃잎이었던 적이 있었는지 / 거뭇한 북쪽 가지 끝의 저 은밀한 홑꽃 / 백만 생 전쯤 한 잎 음순이었던 적 있었는지”(〈도개리 복사꽃〉)라고 말하기도 하고, “벗을수록 아름다운 나무가 있네 / 검은 스타킹에 / 풍만한 상체 다 드러낸 / 누드의 나무”(〈정오의 벚꽃〉)를 바라보기도 하고, “아무래도 저 검은 그림자 속엔 / 몸통 작은 여우 한 마리 살지 싶어 / 바람난 여자의 음부처럼 팽팽한 암여우 한 마리 (중략) 누구라도 단박에 흘려버리는 향기, / 그 화사한 염문 / 천지간 / 난분분 난분분 꼬리 무는 이 봄날”(〈내 안의 꽃〉)을 찬미하면서 자신 안에 있다는 ‘복사꽃 한 그루’를 상기하기도 한다.


꽃의 비유와 꽃에 대한 관찰은, 여성의 몸과 성기를 연상시키는 구절을 잉태한다. 그녀는 꽃처럼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것은 봄이기도 하고, 비이기도 하고, 꽃과 여성이 꿈꾸는 수컷이기도 하다. 즉, 그녀에게 자신의 몸은 세상의 모든 꽃과 마찬가지로 봄과 수컷을 기다리는 존재이다.

호박잎처럼 크고 넓은 기다림 위로 투다다닥 빗방을 건너 뛰어 오듯 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불볕 아래 시든 잎처럼 그 아래 지친 그늘처럼 맥없이 손목 떨구고 늘어졌던 내 그리움의 촉수들이 마침내 하나 둘 앞 다투어 눈떠 사방 꽃무늬 벽지처럼 내 마음 안팎을 온통 분간 없이 휘감아 뻗고 예고 없이 들이친 소낙비의 행렬에 또 한바탕 젖는 잎, 잎들 전선이 젖고 그 선을 타고 오는 그의 목소리 열대어처럼 미끌한 물비늘로 젖어와 어느새 내 몸은 출렁출렁 심해로 열리고
―〈여름비〉

위의 시는 대단히 에로틱하다. 땡볕 아래 지친 호박꽃, 그리고 그 호박잎을 보며 누군가를 생각했을지 모르는 여자. 늘어진 호박꽃은 비를 기다리고, 그 여자는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렸을지 모른다. 그 때 비가 내린다. 투다다닥. 그녀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은 것처럼 전율한다. 호박꽃은 떨구었던 잎을 들어 비를 받아들이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여자는 마치 자신의 손목이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점점 강렬해지는 비의 느낌. 여자는 누군가의 몸이 자신의 몸을 감싸고, 누군가의 몸에서 자신의 몸으로 물이 흘러드는 느낌을 받는다.


위의 시는 호박잎과 비의 관계를 통해, 기다리는 여성과 그 여성에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남성(상상)의 관계를 표현했다. 비록 소품이지만, 대단히 역동적이고 감각적인 시이다. 시어를 다루는 솜씨가 놀랄 정도로 예민하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솔직하다. 시인은 호박잎에 젖어가는 비를 보면서, 자신의 몸에 감겨오는 물의 촉감을 그려내는데, 스스로를 꽃이라고, 식물이라고, 비와 봄과 소식을 기다리는 존재라고, 믿지 않고는 포착하기 어려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1부의 시가 꽃의 상상력을 빌어 몸의 감촉을 노래했다면, 2부의 시는 고전과 시의 정전들을 빌어 여자의 마음을 호소했다. 그런데 그 호소력이 일품이다. 왜냐하면 촌철살인하는 웃음도 있고, 담대한 야유도 있고, 비음 섞인 아양도 있고, 심지어는 노골적인 유혹도 있기 때문이다.

녀자도 그렇지만 꽃도 너무 기상이 높고 절개가 서슬 푸르면 선뜻, 꺾을 수 없는 게라 그래선지 매화주나 국화주는 그 만고의 정절 때문인지 암만 마셔도 취하지 않는 것이 당체 여흥이 무르익지 않는 게라 대저, 역사란 밤에 이루어진다 했으니 그런 맹송맹송한 남녀유별 하는 밤이라면 천하절색 양귀빈들 뭘 이루고 말고겠어? 하지만 말이지 심산유곡 인적 없는 골짝에서 소쩍새 걸쭉한 육두가락으로 산딸기 온몸으로 익었다면?

아흐
그 복분자술 한 잔에
포산 곽씨 열녀가문
종갓집 맏며느리가 이 도도한 취흥을
봄밤,
네까짓 게 감히 알기는 알겠니뇨?
―〈이화에 월백하고〉

이 시는 이조년의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를 패러디한 시이다.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更인제 一枝春心을 子規야 알랴마는 多情도 病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박이화는 원래 시조의 고아한 품격을 비틀고, 한 밤에 몸이 달아 잠들지 못하는 여자의 심정을 이입했다. 여성은 배꽃이 피고 달이 밝은 밤에, 춘흥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너무 높은 지조는 육체의 즐거움을 빼앗는다고.
시인은 재미있는 장난도 쳤다. 애로영화의 제목과 내용을 가져와, 불타는 여체의 괴로움과 농염한 에로티즘을 드러내기도 했고, 이유 없이 위세를 부리는 ‘포관 곽씨 열녀가문 종갓집 맏며느리’ 행세를 하며 도도한 자존심을 표출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흐’ 같은 일상적일 수 없는 감탄사를 통해, 색정어린 호소를 첨부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인의 자태는, 다음 시에서도 거침없이 이어진다.

나무 중엔 품계 높은 자작나무도 있고 법도 높은 동백나무도 있지 반면 어디서나 지분 냄새 풍기는 화류의 나무도 있지 그 나무, 맨날 음풍농월하는 됴화나무라고 말 못하지 봄바람에 유독 춘색 밝히는 복숭아나무라고 더더욱 말 못하지 더욱이 서풍이건 남풍이건 바람이란 바람은 죄의 정부라고 내 차마 내 입으론 말 못하지 나 오상고절의 사군자도 싫고 봉래산 제일봉의 낙락장송도 싫타! 싫어! 차라리 봄밤의 춘정에 천 번 만 번 실절하는 저 황홀한 낙화가 만고의 내 뜻이니 부디, 나 죽거든 저 속살 훤한 연분홍 꽃나무 한 그루 내 무덤가에 심어다고 그러나 알고 보면 천만근 그리움에 치여 꽃잎마다 피고름 흐르는 저 나무, 저 지독한 화농의 복사꽃나무를
―〈나의 홍살문〉

〈나의 홍살문〉은 특별히 해석이 필요 없는 시이다. 시인은 요설에 가까운 말솜씨로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나무를 보면서 색정에 대해 생각하고, 그 색정을 가르쳐 줄 듯 말 듯 지분거리는 태도로 들려준다. 고전에 대한 재치 있는 비유나 야유도 읽는 감칠맛을 돋운다. 성과 육체에 대한 솔직하다 못해 대담무쌍한 여유도 그대로이다.


그런데 이 시에는 지금까지 박이화의 시를 지탱하던 에로티즘의 축 말고도, 다른 축이 숨어 있음을 공고히 한다. 그것은 육체에 대한 참을성이다. 시인은 “나 죽거든 저 속살 훤한 연분홍 꽃나무 한 그루 내 무덤가에 심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알고 보면 그 나무가 “천만근 그리움에 치여 꽃잎마다 피고름”을 흘린다고 말했다.


시인은 시적 화자를 나무나 꽃에 비유하거나 동일시해왔다. 그렇다면 화려하고 에로틱한 나무의 성정에 인내하고 기다리는 참을성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여름비〉의 호박꽃도, 〈이화에 월백하고〉의 대갓집 맏며느리도, 말로만 색정을 호소했지, 실제로는 일편단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농의 복사꽃나무”도 마찬가지이고, 그 나무의 분신인 화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들은 기다린다. 자신의 몸을 열어주고, 자신의 꽃을 개화시킬 누군가를.


그래서 박이화의 시는 포르노그라피가 되지 않고, 이유 있는 성적 담론이 될 수 있다. 박이화의 시가 거침없는 성에 대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품격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그 안에 내장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정숙함 때문이다. 그녀의 시는, 의외로, 그리고 철저하게 정숙한 시어들의 나열이다. 그녀의 시가 표방하는 성적 담론은 역으로, 그냥 담론에 불과하다. 불면의 밤을 바늘로 견뎠던 수절과부의 괴로움을 연상시킬 정도로, 박이화의 시적 화자들은 ‘마흔’의 육체를 인내하도록 종용한다. 어쩌면 박이화의 시는 그녀들의 거친 속박을 말로라도 위로하기 위한 일종의 탈출구였던 셈이다. 박이화의 시는 육체의 향연을 경계하는 말의 홍살문(신성한 건물이나 성지를 공시하는 경계 표시)이었다. 마치 여기까지가 말의 영역이고, 여기부터는 인내의 영역이라는 경계를 확실히 하고자 하는 의지처럼.


박이화의 시집을 들추면, 위에서 인용된 것보다 재치 있고 재미있고 야한 시들이 많다. 그것들을 일일이 읽는 것은 어쩌면 번거로운 일일 것이다. 그 중에서 다소 이질적인, 그러나 야한 포르노를 닮은 시의 기저에서 도도히 흐르는 정숙미가 박이화의 시 세계를 지탱하는 원류이다. 아래에 인용된 시는 그 원류를 보여준다. 이 시는 너무 아름답다. 그녀의 인내가 아름답고, 그녀의 인연이 아름답다.

이른 봄날도 늦은 봄날도 아닌 계절에
늙지도 젊지도 않은 여자
이미 반백의 사내와 봄 산에 듭니다.
그 사내 홍안의 복사꽃도 잠시 말로만 탐할 뿐
하 많은 봄꽃 다 제쳐두고
백발보다 더 부시게 하얀 산벚 아래
술잔을 기울입니다.
어쩌면 전생의 어느 한 때
그의 본처였기라도 한 듯
그 사내, 늙고 병들어 돌아온 남자처럼
갈수록 할 말을 잃고
그럴수록 철없는 그 여자
새보다 더 소리 높여 지저귑니다.
바람 한 점 없는 적막한 산중,
드문드문 천천히 백발의 꽃잎 푸스스 빠져
그 사내 머리 위로 쌓이고
이윽고 그 여자 빈 술병처럼 심심히 잠든 동안
사내만 홀로 하얗게 늙어 갑니다.
참 고요히 아름답습니다.
―〈오래전 산벚나무〉

꽃을 닮았던 그녀들이 그토록 바라던 봄이 왔건만, 막상 그녀들은 봄이 오자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피크닉을 떠날 뿐이다. 현란할거라 예상했던 육체의 향연과도 너무나도 거리가 먼 산행. 남자는 반백의 사내로, 인생을 관조하는 태도로 술잔만 기울이고, 불타는 육체로 괴로워하던 여자는 그만 그 옆에서 잠이 든다. 어쩌면 남자는 여자를 만족시킬 수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늙고 병들어 더 이상 기력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자는 그가 돌아왔다는 그 기쁨에, 마냥 잠이 든다.
이 시를 읽으면서 박이화의 시가 지닌 두 가지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한다. 아니 두 가지 아름다움은 기실, 그것이 서로 맞서고 있기 때문에 탄생 가능했을지 모른다. 농염한 성의 언어와, 정숙한 기다림의 마음. 두 가지는 어느 한 쪽만으로는 아름답지 못했을지 모른다. 농염한 성의 언어만으로는 우리는 현란한 말의 잔치에 현혹당했을지 모른다. 처음에는 신기하다가 차츰 지겨워지고 결국에는 질리게 되었을지 모른다. 정숙한 인내의 태도만으로는 시대를 버리고 관념을 추수하는 낡은 사고로 치부되었을지 모른다. 그것이 왜 아름다운지 생각하기 이전에 무시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두 가지가 양립하고 길항하고 그 저층에서 교류하는 순간, 박이화의 시는 단아하면서도 화려하고, 농염하면서도 정숙한 언어를 얻게 되었다. 이 두 가지가 버무려지지 않았다면, 그녀의 시는 시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좋은 시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6.

기실 말의 이러한 양면적 속성은 박이화에게만, 혹은 이러한 종류의 시를 쓰는 시인에게만, 있는 것도, 또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시어는 기본적으로 화려하고 활달하고 감각적이어야 한다. 한 마디로 얼마든지 화려해도 무방하다. 최서림의 경우처럼 ‘구멍’ 하나에 집착하면서 세상의 온갖 상황을 구멍에 맞출 수도 있다. 신종호처럼 순백의 언어를 구사하고 그 옆에 불꽃의 언어를 구사해서 화려한 색감을 추구할 수도 있다. 장석원의 시처럼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전략으로 시도로 도전으로 실험으로 구사할 수 있다. 그 어떤 노력도 가능하다. 자신의 시를 개성적으로 만들고, 다른 시들과 차별화하고, 세상을 보는 각자의 눈을 보다 올곧게 대변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도 어떤 화려한 수사도 가능하다.
문제는 그러한 전략의 한 지점에, 아니 그 기저에, 침착하고 부동하며 일률적으로 작용하는 언어 역시 존재해야 한다. 그 언어의 묶음 속에 시인의 사유가 자리 잡아야 한다. 신종호의 암흑빛 색감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박이화의 시에서 시적 화자들이 견지하는 인내와 정숙과 기다림과 다소곳함 또한 그러하다.
그런 측면에서 화려한 시어의 이면에는 정숙한 말의 핵심이 포진되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좋은 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시는 읽고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게 공들여 말을 다듬고 생각을 압축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는 생각을 저장하고 명상을 유도하고 상상력을 촉발하고 삶의 지혜와 경험을 축적하며 인간의 인간다움을 지키는 정신의 보고여야 한다. 그 안에 빛나는 언어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선 현란함 못지않게, 단정함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요즘처럼 세상과 사람과 문화와 삶이 현란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는 더더욱.

 

출처, 애지(2006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