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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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벌의 양복 / 손순미

휘수 Hwisu 2008. 10. 7. 10:34

한 벌의 양복 / 손순미


한 벌의 그가 지나간다

그는 늘 지나가는 사람 

늘 죄송한 그가

늘 최소한의 그가 

목이 없는 한 벌의 양복이

허공에 꼬치 꿰인 듯

케이블카처럼 정확한 구간을 지키듯

신호등을 지나 빵집을 지나

장미연립을 지나

가끔 양복 속의 목을 꺼내   

카악- 가래를 뱉기도 하며

한 벌의 양복으로 지나간다

대주 연립 206호 앞에서 양복이 멈췄다

길게 초인종을 눌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양복이 열쇠를 비틀어 철문 한 짝을 떼어내자

철문 속에 안전하게 보관된 가족들이

TV를 켜놓고 웃고 있었다

가족들이 양복을 향해 엉덩이를 조금 떼더니

이내 TV 속으로 빠져들었다  

양복이 조용히 구두를 벗었다

한 벌의 그가 양복을 벗었다

모든 것을 걸어두고 나니

그저 그런 늙은 토르소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벌도 아닌 양복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가

어두운 식탁에서 최대한의 정적을 식사한다

 

<다층> 2008년 여름호

 

  1964년 경남 고성 출생 

  경성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9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및 현대시학으로 등단

  2008년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