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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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란 시모음

휘수 Hwisu 2008. 2. 29. 13:27

1963년 진주 출생
세종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
200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동시집 『하늘천 따지』
2008년 시집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랜덤하우스
 


수족관에 사는 펭귄

 

63빌딩 수족관에 사는 임금펭귄은 밤마다 남극으로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사육사가 수족관의 불을 끄고 집으로 돌아가면 몰래 수족관을 빠져나와
한강 철교 위에 올라가 멀리 남극을 바라본다
남극은 언제나 바라보는 곳에 있다
바라보지 않으면 빙산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다
웃음을 터뜨리며 서로 껴안고 짝짓기를 서두르는 펭귄들이 지금 빙산 아래로 종종종 걸어가고 있다
그동안 그는 직립의 자세를 결코 잊은 적이 없다
한강 철교 돔 위에 올라가 새벽별을 바라보며 직립의 자세를 더욱더 확립하고 수족관으로 돌아온 날 밤에는
사육당하는 치욕과 관람당하는 수모를 어루만지며 잠이 든다
잠 속에는 거대한 유빙을 타고 흐른다
남극바다제비를 따라 하늘을 급선회하다가 가장 높은 빙봉에 알을 낳는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의 교도소에 갇혀 관람객들을 구경하고 싶지 않다
교도관이 던져주는 재소자의 밥을 먹고 뒤뚱뒤뚱 인간들처럼 직립보행을 하고 싶지 않다
관람객이 먹다 던진 사과 한 알도 마음에 품은 적이 없는 그는
차라리 철교 아래로 떨어져 한강의 청둥오리들이 정성껏 마련한 물길을 따라간다
멀리 한강의 불빛에 어른거리는 빙하의 물결
잠실 쪽에서 떠내려오는 빙산 위에 부서지는 남극의 별빛
신의 드레스로 밤하늘을 휘감고 있는 찬란한 오로라를 따라가면
그곳은 바다사자와 얼룩무늬물범이 빙그레 웃고 있는 남극의 바닷가
귀향을 축하하는 펭귄들의 환호소리가 들린다
살아도 죽은 사람이 있고 죽어도 산 사람이 있듯
63빌딩 수족관에 사는 직립의 바다새는 밤마다 남극으로 날아갔다 돌아온다
사육사가 집으로 돌아간 뒤 몰래 수족관을 빠져나와
북한산을 넘어 금강산을 넘어 멀리 쇄빙선이 오가는 남극으로 날아간다
남극은 언제나 날아가는 마음 안에 있다

 

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 

 

늦은 밤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가 손님 전화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꼭 솟대에 앉은 새 같다
날아가고 싶은데 날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며 서성대다가 휴대폰이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재빨리 사라진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또 언제 날아와 앉았는지 솟대 위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그의 날개는 많이 꺾여 있다
솟대의 긴 장대를 꽉 움켜쥐고 있던 두 다리도 이미 힘을 잃었다
새벽 3시에 손님을 데려다주고 택시비가 아까워 하염없이 걷다 보면 영동대교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은 적도 있다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은 정육점 앞을 지나다가 마치 자기가
붉은 형광등 불빛에 알몸이 드러난 고깃덩어리 같았다고
새벽거리를 헤매며 쓰레기봉투를 찢는 밤고양이 같았다고
남의 운전대를 잡고 물 위를 달리는 소금쟁이 같았다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아니야, 넌 우리 마을에 있던 솟대의 새야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솟대 끝에 앉은 우리 마을의 나무새는 언제나 노을이 지면
마을을 한 바퀴 휘돌고 장대 끝에 앉아 물소리를 내고 바람소리를 내었다
친구여, 이제는 한강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물오리의 길을
물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물새의 길을 함께 가자
깊은 밤
대리운전을 부탁하는 휴대폰이 급하게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사라지는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
오늘밤에도 서울의 솟대 끝에 앉아 붉은 달을 바라본다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에 매달려 달빛은 반짝인다

 

 꼬막 캐는 여자의 바다

 

  겨울이 되면 눈부신 벌교 갯벌에 가보아라

  양수가 터진 바다가 갯벌에다 아이를 낳고 아랫배를 드러낸 채 섬기슭으로 달려가 젖을 먹인다

  풀어헤친 저고리 틈새로 빠져나오다가 그만  수평선에 걸쳐진 바다의 저 통통한 젖가슴을 빨고 있는 벌교 여자들

  새색시 적부터 꼬막밭에 앉아 열심히 바다의 젖을 빠는

  자궁에서도 평생 꼬막냄새가 나는 저 벌교의 여자들은

  만삭이 된 섬들이 바다에 아이를 낳을 때마다  뻘배를 타고  힘차게 바다로 나아가 꼬막을 캔다

  순천만 젖꽃판이 개흙처럼 검어지고  젖꼭지마다 팽팽히 섬을 이룰 때

  저마다 꼬막이 되어 갯벌 깊은 바닥에 몸을 숨긴다

  행여나 장보고 같은 사내  갯벌 속에 숨어 있을지 몰라  갯벌의 쫄깃쫄깃한 자궁이 되어 숨을 죽인다

  때로는 허연 꼬막껍질처럼 길바닥에 버려져

  사내들이 짓밟고 지나갈 때마다 서럽게 부서지고 아스러지던 날들

  방파제 끝까지 트랙터를 몰고 온 사내들이 소주병을 버리고 모닥불로 타올라도 여자들은 좀처럼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뻘배를 끌고 산고가 채 끝나지 않은 갯벌의 속살을 쓰다듬을 뿐

  참꼬막이 가득 담긴 함지박의 웃음이 될 뿐

  광활한 치마폭을 펼친 바다는 지금 일몰의 시간

  노을 지는 수평선을 목에 감고 뻘밭에 백로는 저 혼자 고독하다

  멀리 고깃배 한 척 밀물 때를 기다리며 비스듬히 누워 있다

  황금빛 갯벌의 주름진 뱃가죽을 들치며 바다의 젖을 빠는 저 여자들

  꼬막 캐는 여자들의 봄이 오는 바다

  가끔은 장보고 같은 사내가 찾아와 씨 뿌리는 바다

 

 점안식 하는 날

 

춘천시 의암호 근처 그 어디쯤을 지나다가
장승을 빚고 있는 한 사내를 만났던 것이다
사내는 마무리 칼질을 하기 위해 장승의 눈자위를 다듬고 있었는데
마침 점안식 하는 날이라고 한다
장승을 두고 점안식 한다는 말은 금시초문
얼씨구 이것이 바로 부처를 만나는 길이다 싶어 작정하고 지켜보는 나에게
점안식이란 죽은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라며
사내는 마당에 장승들을 쭉 둘러 눕혀놓고
툭 불거진 눈자위에 시커먼 먹물을 꾹꾹 찍어 넣었는데
막 점안이 끝난 장승들이 일제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덥석 내 손을 잡아끌었던 것이다
엉겁결에 잡아버린 까칠하고 뜨듯한 장승의 손에서
생명의 온기가 순식간에 내 이십만 리 혈관을 타고 좌르르 흘러
그때 나도 영락없이 한 사람 장승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장승들을 따라 이리저리 마당으로 문간으로 춤추듯 돌아다니다가
밤늦도록 막걸리를 마시며 한바탕 웃고 떠돌며 놀았는데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당신을 생각하다가
점안은 정작 나에게 필요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눈을 뜨지 못한 장승처럼 살아오던 내가 당신 곁에 누워
한평생 점안식 하는 날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툭툭 불거진 내 증오와 죽음의 눈자위에
장승의 손이 시커먼 먹물을 꾹꾹 찍어 나를 점안해주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시집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2008년 랜덤하우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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