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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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컵에 관한 시모음

휘수 Hwisu 2007. 9. 22. 09:26

그릇 / 김소양

 

하얀 종이컵에

오줌을 담아

병리검사실에 갖다주고 나서

 

병원 자판기 속에 동전을 밀어 넣고

똑같이 생긴 종이컵을 꺼내어

그 속에 담긴 커피를 맛있게 먹다가

 

문득 낯이 뜨거워진다

그럼 나는 도대체

무엇이 담긴 그릇이란 밀인가

 

'우리시' 5월호

  

      김소양시인

       2006년 <심상>으로 등단

  

 어떤 신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의견 / 윤제림

 

   종이로 만든 관(棺)이 나온다지요. 반갑고 고마운 일입니다.죽은 친구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봐서 아는데요, 목관은 생각보다 무겁더군요. 값을 물어봐서 아는데요, 보기보다 비싸더군요. 종이로 만들면 가벼워서 좋을 것입니다. 가난한 상주들에게 좋을 것입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지질(紙質)인데요. 제발, 종이컵이나 라면용기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만들어 주세요. 태우면 곱게곱게 하늘로 오르고, 묻으면 고분고분 흙이 되게요. 물에 지면 꽃잎 같고, 바람에 날리면 눈송이 같게요. 적어도 이 '사람의 그릇'만은 일회용품 규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게요.

 

윤제림 시인

 
1959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
1987년「문예중앙」에「뿌리깊은 별들을 위하여」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
1988년 시집「삼천리호 자전거」문학동네
1990년「미미의 집」중앙일보사
1994년「황천반점」민음사
2001년「사랑을 놓치다」문학동네

 

 일회용 시대 / 김승희

 

사발면을 후루룩 마시고                    

일회용 종이컵을 구겨서 버리는 것처럼      

상처가 아물면                             

일회용 반창고를 딱 떼어서 던져넣은 것처럼 

 

이 시대에                                

내가 누구를 버린다 해도                  

누구에게서 내가                          

버림받는다 해도                          

   

한번 입고 태워버리는 종이옷처럼,

한번 사용하고 팽개쳐야 하는

콘돔처럼,

커피 자동판매기 안에서

눈을 감고 주루룩 쏟아져 내리는

희게 질린 종이컵처럼

껌종이처럼 설탕포장지처럼

그렇게

내가 나를 버릴 수 있을까

그렇게

나도 나를 버릴 수 있을까

 

어느 으슥한 호텔 욕실에서

잠깐 쓰고 버려지는

슬픈 향내의

일회용 종이비누처럼...

 

 

                                                      김승희 시인

 

1952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 대학원에서 국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이상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
시집「태양 미사」「왼손을 위한 협주곡」「달걀 속의 생」「어떻게 밖으로 나갈까」「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등을 냈으며, 산문집「33세의 팡세」「남자들은 모른다」「냄비는 둥둥」
 소설집「산타페로 가는 사람」「왼쪽 날개가 약간 무거운 새」등을 펴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