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정끝별 시모음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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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시모음 3

휘수 Hwisu 2007. 4. 4. 09:25

1964년 전남 나주 출생
198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세계사, 1996)
   <흰 책>(민음사, 2000)
   <삼천갑자 복사빛>(민음사, 2005)
현재 명지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


쭉쭉 뻗은 봄 솔숲 발치에 앉아
소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자니
저 높은 허공에
부러진 가지가 땅으로 채 무너지지 못하고
살아있는 가지에 걸려 있다


부러진 가지의 풍장을 보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와 함께 무너지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를 붙들고 있는 살아 있는 가지는
부러진 가지가 비바람에 삭아 주저앉을 때까지
부러진 가지가 내맡기는 죽음의 무게를 지탱해야 한다
살아있는 가지 어깨가 처져 있다


살아있는 가지들은 서로에게 걸리지 않는데
제멋대로 뻗어도 다른 가지의 길을 막지 않는데


한줄기에서 난
차마 무너지지 못한 마음과
차마 보내지 못한 마음이
얼마 동안은 그렇게 엉켜 있으리라
서로가 덫인 채
서로에게 걸려 있으리라


엉킨 두 마음이 송진처럼 짙다


늦도록 꽃


앉았다 일어섰을 뿐인데
두근거리며 몸을 섞던 꽃들
맘껏 벌어져 사태 지고
잠결에 잠시 돌아누웠을 뿐인데
소금 베개에 묻어둔
봄 마음을 훔친
저 희디흰 꽃들 다 져버리겠네
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뿐인데
흘러가는 꽃잎이라
제 그늘 만큼 봄날을 떼어가네
늦도록 새하얀 저 꽃잎이
이리 물에 떠서


현 위의 인생


세 끼 밥벌이 고단할 때면 이봐
수시로 늘어나는 현 조율이나 하자구
우린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어차피 한 악기에 정박한 두 현
내가 저 위태로운 낙엽들의 잎맥 소리를 내면
어이, 가장 낮은 흙의 소리를 내줘
내가 팽팽히 조여진 비명을 노래할 테니
어이, 가장 따뜻한 두엄의 속삭임으로 받아줘
세상과 화음할 수 없을 때 우리
마주앉아 내공에 힘쓰자구
내공이 깊을수록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지
모든 현들은
어미집 같은 한없는 구멍 속에서
제 소리를 일군다지
그 구멍 속에서 마음놓고 운다지


뒷심


모든 그림자는 빛의 뒤편으로 무너진다는데
모든 풀은 바람 뒤로 밀리고 바람 뒤로 눕는다는데
모든 줄다리기는 뒤편을 향해 당겨진다는데
모든 말은 침묵 뒤편으로 고인다는데
모든 사람들은 뒤가 실해야 당당히 설 수 있다는데
모든 사랑은 기다림 뒤편에서 완성된다는데


모든 그림자에게 뒤는 내려앉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풀에게 되는 맞서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줄다리기에서 뒤는 버티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말에게 되는 숨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뒤는 돌아보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사랑에게 되는 젖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앞에 대항하는 바로 그 心 
 
어떤 자리


어떤 손이 모과를 거두어 갔을까
내가 바라본 것은 모과뿐이었다
잠시 모과 이파리를 본 것도 같고
또 아주 잠시 모과 꽃을 보았던 것도 같은데
모과 이파리가 돋아나는 동안
모과 꽃이 피어나는 동안
그리고 모과 열매가 익어가는 내내
나는 모과만을 보았다
바라보면 볼수록 모과는 나의 것이었는데
어느 날 순식간에 모과가 사라졌다
내 눈맞춤이 모과 꼭지를 숨막히게 했을까
내 눈독(毒)이 모과 살을 멍들게 했을까
처음부터 무과는 없었던 게 아닐까 의심하는 동안
모과는 사라졌고 진눈깨비가 내렸다
젖은 가지 끝으로 신열이 올랐다
신음 소리가 났고 모과는 사라졌고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에 주먹만한 허공이 피었다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를 보고 있다
보면 볼수록 모과는 여전히 나의 것이건만
모과 즙에 닿은 눈시울이 아리다
모과가 떨어진 자리에서
미끄러지는 차연(次緣)의 슬픔
이 사랑의 배후

 
출처, 간이역에이는시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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