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임동윤 시모음 본문
1948년 경북 울진
소년기와 청년기의 대부분을 강원도 춘천에서 보냄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와 199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표현','우리시' 동인
시집, <연어의 말> <나무 아래서> <함박나무가지에 걸린 봄날>
2002년 수주문학상 대상 수상
그 여자의 세탁소
그 여자의 세탁소는 계단 아래에 있다
가파른 계단을 머리에 인 스팀보일러가
종일 쉭쉭 단내를 토해내는 곳
드라이클리닝기계는 바람을 만들며 돌아가고
매연과 먼지 속을 떠돌다 온 옷들이
불끈 다리미를 쥔 여자의 손에서
대낮의 스트레스를 말끔히 날려보낸다
바짓단 자르며 바지런히 도르르 재봉틀을
돌리는 몸집 작은 여자, 앞가슴에 한껏
실밥을 묻힌 채 엉덩짝을 꿰매는 중이다
납작해진 다리미와 다리미판 사이,
구겨진 사람들이 누우면 더운 김에 훅훅 젖어
하얗게 일어서는 길들, 능숙한 여자의 손끝에서
풀잎처럼 팔랑대는 옷들, 먼 길 돌아온
생애까지 바람에 펄럭펄럭 나부끼고 있다
날마다 찰랑찰랑 물소리를 내는
그 여자의 세탁소는 늘 푸른 대나무 숲
얼굴 씻은 새들이 종일 와서 소리 울고
구겨진 마음들이 온통 제 속을 비우는,
여자는 마침내 푸른 물이 도는 숲으로 일어선다
너덜대는 내 삶도 저 옷처럼 잘라 기우면
모두 반듯하게 펴질 수가 있을까
스팀보일러가 단내를 뿜어대는 계단 아래서
헛짚어 떠돈 하루가 씽씽 씻겨 돌아가는 곳,
불끈, 다리미 고쳐 잡는 여자의 손에
축 쳐진 내 팔 다리도 벌써 움켜잡히고 있다
자연 다쿠멘터리
신갈나무 널따란 잎들이
이마를 마주댄 후미진 산기슭
금성 TV 한 대가 털썩 주저앉아 있다
누가 내다버렸는지
헌옷가지들을 옆구리에 끼고
앉은뱅이책상에 몸을 기댄 채
끊임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19인치 화면에 어제 출연했던
다람쥐가 다시 쪼르륵 화면에 잡히고
풋풋한 도토리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오른 쪽 화면 상단에 핀 구절초가
자신의 보라 빛을 짙게 휘감자
금세 날아드는 손님은 일꾼벌이다
꽁지 짧은 새가 노래를 부르면
나뭇잎들은 바람 따라 팔랑팔랑 춤춘다
조명이 어두워지는 저녁 무렵
오늘의 프로그램도 끝나고
오직 졸졸졸 개울물소리만 틀어준다
전기코드창자는 흙속에 푸욱 꽂아놓고
금성 TV 한 대가 오늘도
숲 속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한다
내일 프로는 개미들의 이동이다
나무 아래서
아버지는 죽어서도 여전히 키 큰 나무다
피가 돌지 않는 아랫도리는 썩고
그 곳으로 벌레들이 몰려와 집을 짓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고통을 호소한 적이 없다
가지마다 연둣빛 자식들을 올망졸망 매달고
크고 탐스러운 열매들을 키워내는 가을이면
아버지는, 한 그루 풍성한 세상의 나무였다
그러던 나무가 갑자기 잎을 떨궈버렸다
바지런히 물 뽑아 올리던 뿌리도 말라버리고
햇빛 맘껏 끌어당기던 연둣빛 눈들이
시들시들 땅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바람 많은 세상의 무수한 죽음 중에서
모든 소임을 다하고 눈을 감은 아버지
그 성스런 최후가 무척 평온한 듯 보였다
아버지를 닮는 것이 소원이지만
나는 안다, 아버지의 행적을 따라가자면
비바람 모진 세월 오래 견뎌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내가 짓는 집들은 너무 작고
눈보라를 감당하기엔 아직 허술하다는 것을
이 고요한 아버지의 비밀을 엿보려고
바람은 국망봉까지 찾아와
푸른 잔디의 등을 부지런히 쓰다듬는다
가난하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잎을 피운,
단단한 열매로 세상을 장식한 저 나무들
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도 거룩한 희생임을
나는 안다, 바람 많은 날 뒤돌아보면
여전히 아버지는 한 그루 나무라는 것을
2002년 수주문학상 대상 4회 수상작품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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