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이명윤 시모음 본문
항남우짜 *
당신은 늘 우동 아니면 짜장
왜 사는 게 그 모양인지
시대적 교양 없이 물어보지 않을게요
그래요, 그래서 우짜라구요
우동이냐 짜장이냐
이제 피곤한 선택은 끝장내 드리죠
짜장에 우동 국물을 부어 태어난 우짜
단짝 같은 메뉴끼리 사이좋게 가기로 해요
화려한 풀코스 고급요리 식당이 진을 친 항남동
눈치 볼 것 있나요 뒷골목 돌아
친구처럼 기다리는 항남우짜로 오세요
꿈틀대는 이마 주름에 꾸깃한 작업복
당신도 면발계층이군요
면발처럼 긴 가난을 말아 올려요
입가에 덕지덕지 짜장웃음 바르고
우동처럼 후루룩 웃어 보세요
후딱 한 그릇 비우고 큰 걸음으로
호주머니의 설움을 빠져 나가야죠
달그락 우동그릇 씻는 소리
가난한 날의 저녁이 달그락 달그락 쉴 새 없이 몰려와요
아저씨 또 오셨네요, 여기 우짜 한 그릇이요
꼬깃한 지폐 들고 망설이다
문을 열고 들어선 얼굴
어쩌겠어요 삶이 진부하게 그대를 속일지라도
오늘도 우짜, 웃자, 라구요
* 통영시 항남동에 위치한 분식집 이름. 우동과 짜장을 섞어 만든
우짜메뉴로 유명하다
풀 2
1
풀 한 포기
보도블록 틈새 비집고 설레설레 고개를 든다
봄이 왔다고 한 소식 전하신다
들은 척 만 척
구두가 밟고 지나간다
납작해진 풀의 모습이
꼭
한 마디 욕설 같았다
2
노점상 일제단속 후 거리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리어카는 파란 천막으로 덮여 있었고
누군가 그날의 소란이 새지 않도록
밧줄로 꽁꽁 묶어 놓았다
(빨리안치워모못한다이눔들아챙그라앙어어이아줌마
가미쳤나저리안비켜어억어딜물어이런씨팔년이저리
비켜아악우리가튼사람은우에살라꼬야야야빨리뿌셔
어억헉이개새끼드라아차라리나알죽여라아아아아악)
3
비 그치고 우체국 가는 길
다시 그를 만났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물기를 털며 쓱 허리를 편다 일순
팽팽해진 그의 몸이 칼날 같았다
도로변의 눈빛들이 밟히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었다
봄은 모든 곳에서 피어날 권리가 있다
우수수, 바람마저 베어지고 없던
숨 막히게 고운 날이었다
오래된 책
1. 지구
저자는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아, 첫 페이지는 흐려서 읽기가 어려워 어느 책의 후속작이라고도 하고 신작이라고도 해, 우주서점에 꽂힌 수많은 책들 중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책은 달이라 불리는 한 권의 부록이 있어, 느리게 또는 빠르게 읽어가는, 밑줄을 긋기도 하고 때론 페이지를 찢는 바람, 웃다가 잔뜩 찌푸리는 구름, 쉬지 않고 줄기차게 읽어가는 저 공중의 빛나는 눈을 보아, 단락마다 피고 지는 주인공들, 낮과 밤의 행갈이가 한 치 오차 없이 이어지고 사랑과 전쟁, 폭력과 평화,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끝없는 이야기, 과연 누가 이 길고 엄청난 소설을 쓰고 있을까,
2. 지구인
어머니의 어머니가 어머니를 낳듯 우리는 모두 지루한 문장이지, 노을이 웅크린 저녁, 내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지, 가끔 바람의 손가락이 지난 페이지를 들추곤 해, 나를 읽어가는 힘이 참 시원시원 느껴지다 내 몸에 밑줄을 치면 나는 조용히 나를 덮고 자리를 뜨지, 이마의 주름은 그렇게 생겨나는 거 아니겠어, 오늘밤 불현듯 나를 더듬더듬 오독하던 점쟁이가 생각나 키득 웃음이 나, 나는 아주 모호한 문장으로 기록되고 있나 봐, 창밖을 봐, 달이 반쯤 접혀 있고 담장 위 고양이 한 마리 물음표로 앉아 있어,
그 동네 신발들은 공손하지 않다
먼저 신발1에 대해 말하자면
오늘도 길바닥 어딘가에 노숙 중이다
그의 아내는 울며 개집에 앉아 있다
신발2는 성격차이로 갈라섰다 제법
메이커 있는 커플인데 서로 끈 색깔이 다르다 했다
소문난 해커인 신발3, 남의 집 방문을 열고 들어가
개인정보침해로 구속됐다
내가 남자라서가 아니라 커피 배달중인 그녀
신발4를 빼 놓을 수 없다 껌, 아니
보도블록을 딱딱 씹으며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다
훤히 드러난 뒤태를 훔치며 신발5가 뛰어간다
신발1의 아들인 신발5는 깡통을 걷어차는 일이
주특기, 사춘기를 겪고 있다
신발6을 생각하니 답답하다 상갓집에서 다섯 시간째
다른 신발들의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다
길가 신음소리 내며 걸어오는 신발7은
석 달째 투병중인 노인이다
몸에 담석이 여러 개 박혀 있는데
아무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는다
신발8, 아아, 신발의 본분을 잊고 거실을 날아
거울을 박살냈다 그치지 않는 고성이
밤을 북북 찢어 놓는다
누구도 아침을 낳지 못했으므로
그 동네 신발들은 서로 인사하지 않는다
신발3의 모친인 신발9의 집을 엿본다
늘 그렇듯 방문 앞에 앉아 빈집을 지키고 있다
마당에 눈빛 사나운 개집이 있다
개밥그릇 하나
울음소리 새지 않도록 한나절 뒤집혀 있다
변소를 화장실로 부르기 시작했을 때
아름다운 날들의 시작이었다
싸러 가지 않고 볼일 보러 갔다
약간 모호했지만 꽤 어른스런 말이었다
큰 거? 작은 거? 철없이 묻는 친구의 입에서
뒷간에 쌓인 신문지 곰팡내가 났다
나이가 들자
말도 얼굴처럼 화장이 필요했다
가끔 욕설이 민얼굴로
햇빛 속으로 뛰쳐나오려 할 땐 황급히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옆집 여자가 널어놓은 하얀 뽕브라를 보며
구름 몇 송이 깔깔거리며 떠다닐 무렵
유세장에서
말도 넥타이를 매고 무스를 발라야
폼이 난다는 것도 배웠다
냄새가 없는 말의 날들이
造花처럼 지루하게 피고 지고
우리는 그것을 교양이라 불렀고
발음이 잘 안되던 앞집 상남이 할매는
그것을 고양이라 불렀다
이상한 일은 이제 꽤 세월이 흘러
외갓집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날에
외할머니의 똥꼬 같은 입이
이따금 생각나는 것인데
귀신이 불쑥 손이라도 내밀듯 무서웠던 그날 밤
뒷간 앞에서
똥 다 쌌냐? 고 물으면 아즉 멀었따
인자 다 쌌냐? 고 물으면 아즉 남았따
멋쩍게 대답했던
알전구처럼 따스했던 기억이 꽃술처럼
오므렸다 펴지고, 오므렸다 펴지고,
하는 것인데
홍합
바람이 세찬 날
시장에서 사온 홍합을 씻어 냄비에 담는다
몸 전체가 굳게 다문 입이다
바글바글 뜨거운 냄비 속에서
결국 참았던 입을 연다
쩍, 쩍, 쩍,
비밀의 화원이 열리고
단 한 번도 발설하지 않았던 혀가
웅크린 채 서느런 웃음을 피우고 있다
식구들이 식탁에 앉아
홍합을 먹는다
처얼썩, 처얼썩,
먼 바다가 쉴 새 없이 창문을 두드린다
식구들은 비밀 하나씩 가지고 있다
홍합을 먹으며 모두들
한 숟갈의 고백이 얼마나 속 시원한 것임을 안다
그리하여 국물에 대한 칭찬을
한마디씩 거들었지만
봉분처럼 쌓여가는 빈 껍질을 보며
그들의 눈빛은 서로가 모르게 희번덕거렸다
검은 입들이 둘러 앉아
조용히 홍합을 먹는 저녁
쉿,
발설하면 죽는다
위험한 골목
1
그 골목엔 구멍이 많다
아이들 대부분은 연탄구멍에서 나왔다
구멍 숭숭한 슬레이트지붕 아래 잠자고
지갑의 구멍을 보여주는 여자에게 구멍 난 얼굴을 하고
학교에 가면 선생들은 구멍환경조사를 한다
골목 담벼락에 구멍을 그려 놓고 킬킬 웃기도 하고
공터에서 구멍을 파고 놀며 구멍으로 세상을 보기도 한다
아이들 몸에 가득한 구멍들
구멍의 색깔은 링거액처럼 노랗다
2
간판이 기우뚱한 구멍가게에선
유통기한이 없는 구멍을 판다
와장창 밤의 고요에 구멍을 내는 골목의 남자
구멍에 악다구니를 퍼붓는 골목의 여자
눈두덩에 푸른 멍이 드는 골목의 저녁마다
구멍은 상처를 먹고 달처럼 자란다 가끔은
여러 개의 구멍을 품은 여자가
짙은 화장을 한 채 사라지는 지독한 구멍의 골목
도둑고양이 담장에 엎드려 야아옹
울음을 둥글게 마는 오후
평상에 앉아 있는 백발의 할머니에게 길을 묻는 일은
어리석다
그녀는 세상을 시청하지 않는다 두 눈이
우물처럼 비어 있으므로
구멍은 깊어질수록 점점 환해진다
3
그 골목을 지날 땐
골목의 침묵이 다치지 않게 느리게 걸어야 한다
구멍 사이로 잠자던 구멍들이, 멍들이
멍,멍,멍,
당신의 그림자를 와락 물어버릴 것이니,
가슴이 쿵쿵거리는 까닭
세상에는
아름답네요, 멋있어요, 하며
치장한 말들이 많이 돌아다니지만
진정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입은 말문을 닫고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입보다 말은 먼저 알고 있다
당장 뛰쳐나가고도 싶지만
그의 요란한 발굽에
그의 뒤뚱거리는 몸짓에
그가 일으키는 바람에
혹시라도 아름다운 상대방이
놀라거나 다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은 문 앞에서
스스로 짧은 비명으로 멈춰선 뒤
발길을 돌려
가슴이라는 초원에서
숨이 차도록
뛰어 다니는 것이다
동백
별들이 다시 지상에 왔다
눈 먼 바람의 시린 손이 마을을 더듬는
아직도 이곳은 위험한 계절이다
서로를 믿었으므로 개의치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눈 속에 묻힌 오래된 말들이 하나 둘 눈을 뜬다
너는 지상에서 꽃이라 불리지만
바람 앞에 맨살로 피어나는 것은
꽃이 아니라 신념인 것
신념은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또 다시 두 겹 세 겹 포위해 오는 겨울 앞에
부릅뜬 눈동자로 선 너는
곧 우수수 목소리가 잘려나갈 위험한 사랑이다
봄으로 가는 암호를 스스로 찢어 깨물은
붉은 입술은 네 순결한 사랑의 증표인 것을
감히 누가 사랑을 진압하였다 말하는가
해마다 망각을 찢고 불쑥 불쑥 세상을 겨누는
저 붉은 총구 앞에
첫시집 <수화기 속의 여자>
1968년 경남 통영 출생
2006년 시마을 문학상. 전태일 문학상 수상
2007년 계간 시안 신인상 수상
제 9 회 구상 솟대문학상 대상
시집, 수화기 속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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