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유강희 시모음 본문

OUT/詩모음

유강희 시모음

휘수 Hwisu 2007. 3. 10. 00:22

1967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어머니의 겨울>이 당선
1996년 시집 <불태운 시집>(문학동네)
2005년 <오리막> 문학동네

 

감나무가 있는 빈집

 

 여자가 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놋화로 하나 들고 마당 모롱이에 서 있었네
 봄부터 죽어라 마른걸레 물걸레 오갔을
 그리하여 자루에 담긴 팥냄새 같기도 하고
 할머니 비녀 냄새 같기도 한 것이
 실꾸리처럼 스르르 풀렸다 감기기도 하고
 어느 날은 정갈한 빈 사발을 보여주어
 매미는 제 폭폭한 울음도 다 퍼내지 못하고
 서둘러 그곳을 떠나기도 했으나

 

 여자는 열다섯에 시집을 와 일 년도 채 못 살고 소박맞은 색시같이
 그 자리에 꿈쩍 않고 선 채 놋화로를 마치 커다란 꽃숭어리인 양 받들고만 있었네

 

 그러다 무청이 처마 끝에 조기 새끼처럼 엮이어 말라가고
 깊어진 제 눈망울만큼이나 소의 군것질도 점점 늘어가면서
 여자는 낮으로 낮으로 가을볕도 가랑가랑한 놈만 골라
 불씨를 만들기 시작했네

 

 그러던 어느 아침 두드리면 금방이라도 텅, 텅, 울릴 것만 같은 놋화로 위엔
 서글서글한 빨간 불씨들이 소보록이 담겨 있었네

 

 하지만 그 여자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뜨거운 놋화로 머리에 인 채
 다만 제 안의 슬픔을 누르듯 마당 모롱이에 오래도록 서 있기만 했네

 

외가집

 

 소가 새끼를 낳았다. 찬물 한 그릇 떠서 누렁콩도 소복이 담아 외양간 앞에 놓았다. 이틀밖에 안된 송아지가 머리로 툭툭 차면서 퉁퉁 불은 젖을 빨아먹는다. 눈이 선한 어미는 마른 지푸라기를 소리 없이 새김질하며 이따금 꼬리를 흔들어 쇠파리를 쫓는다. 오래 된 낡은 대문에는 한지를 잘라 끼운 쌍줄을 쳤다. 지나가던 이웃 사람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고 복만이 있는가, 큰 소리로 삼춘 이름만 부르곤 한다. 거기에는 한쪽 다리를 끌고 일흔이 넘은 외할머니가 산다.

 

시집, 불태운 시집, 1996년 문학동네

 

오리막4 

 

오리막을 지키는 할아버지

피 어리지 말라고

사발에 소주 한 잔 붓고

금방 목을 딴

뻘겋고 뜨건 오리 피 받아

단숨에 꿀꺽 마신다

새앙 한쪽 씹는다

 

오리 피가 풍(風), 풍(風)에 좋단다

 
돌확

 

자식 일곱 뽑아낸 이제는 폐문이
되어버린 우리 어머니의 늙은 자궁 같은
오래된 돌확이 마당에 있네
귀퉁이가 떨어져나가고 이끼가 낀 돌확은
주름 같은 그늘을 또아리처럼 감고 있네
황학동 시장이나 고풍한 집 정원에는 제법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비가 오면 그냥 비를 받아먹으며
뿌리를 내릴 생각도 않네
뿌리 대신 앉은 자리엔 쥐며느리들만
오글오글 세월처럼 모여 사네
하지만 지금 돌확 속엔
내가 싸릿재 저수지에서 잡아온 새끼 우렁 하나
돌젖을 빨아먹으며 자라고 있네
돌젖에 눈물처럼 금이 가 있네

 

시집, 오리막 2005년 문학동네

 

외딴집

 

무덤 옆에 딱 붙어있어
무덤이 키운다는 그 집

 

무덤이 퉁퉁 불은 젖을
밤이면 에미 없이 자라는 아이 입에 몰래 몰래 물려주었다는

 

홀애비와 어린 아들
단둘만이 산다는 그 집

 

아이가 날마다 무덤보고
엄마, 젖 주세요 한다는 

 

무서운 옛날 이야기와 같은
그 외딴집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OUT > 詩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류장에서 또 한 소절 / 최갑수  (0) 2007.03.12
고영조 시모음  (0) 2007.03.11
밥 정情 / 정휘립  (0) 2007.03.09
고등어 울음소리를 듣다 / 김경주  (0) 2007.03.08
[스크랩] <詩> 그리운 봄날  (0) 2007.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