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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의 현재와 미래 - 2005의 젊은 시인들 / 박남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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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의 현재와 미래 - 2005의 젊은 시인들 / 박남희

휘수 Hwisu 2006. 7. 14. 08:24

우리 시의 현재와 미래 -2005년의 젊은 시인들 / 박남희

1. 혼종의 문법과 개인화

1990년대 이후 거대 담론이 사라지면서 시단의 흐름은 집단 또는 전체에서 차츰 개인 쪽으로 방향을 선회해 온 것이 사실이다. 80년대가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탈이데올로기를 통한 새로운 서정이 주류를 형성했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우리 시단은 전통적 낭만주의에 기반을 둔 유기체적 상상력이 하나의 줄기를 이루고, 한편에서는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해체적 문법을 통한 혼종화된 시들이 또 다른 주류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두 가지 큰 흐름은 종래의 서정시와 포스트모더니즘시가 양극화되어 발전되어 온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읽혀진다. 현 시단의 가장 뚜렷한 특징으로 대변되는 서정시의 전통성과 전위시의 새로움은 각각 우리 시의 깊이와 넓이를 담보해 준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의가 있다.


이 글은 우리 시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현 시단의 두 가지 큰 흐름인 동일성의 시학에 바탕을 둔 시와, 차이를 바탕으로 한 혼종의 문법 안에 포섭되는 그로테스크한 시들을 분석함으로써 현 시단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성을 진단해보고 반성해보려는데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
현재 가장 권위있다고 인정되는 미당문학상이나, 소월시문학상,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현대시작품상, 현대시학작품상 등의 수상작이나 후보작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개 동일성의 시학에 바탕을 둔 서정시가 주종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흐름만 보면 현 시단의 주류가 서정시임이 드러나지만, 젊은 시인들을 주축으로 한 해체적이고 혼종적인 미학을 바탕으로 한 일군의 시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의 시야말로 전통 서정시의 안온함을 대체할만한 새로움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문학상 중에서 미당문학상은 상금이 다른 문학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는 점에서 많은 시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상금과 문학상의 권위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물질이 인간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시대에는 상금의 크기가 문학상의 권위를 어느 정도 대변해 주기도 한다. 2004년과 2005년 문인들이 뽑은 가장 좋은 시인 문태준은 2005년도 미당문학상 수상자에 오름으로써 다시 한번 시단의 주목을 받은바 있다. 이 정도면 가히 2000년대는 문태준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문태준 시의 어떤 면이 뛰어나서 우리 시단은 문태준에 그처럼 환호하고 있는 것일까? 우선 문태준 시의 행보를 하나씩 따라가 보자.

2.문태준이라는 텍스트

문태준의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문태준이라는 텍스트를 동시에 읽는다. 그것은 문태준이 구사하는 언어가 단순히 씌어진 것이 아니라 문태준이라는 몸을 입고 탄생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대상에 대한 남다른 직관과 우리말을 폭넓게 아우르는 언어감각, 가슴을 울리는 가족사와 고향체험의 진정성, 우주의 원리를 꿰뚫는 상상력이 고르게 녹아 있다. 문태준은 1970년에 태어난 70년대 시인이면서도 그 전대(前代)가 체험한 풍속과 풍경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시인이라는 점에서 요즘의 신세대 시인들과 변별된다. 그의 시에 빈번히 등장하는 농촌체험은 고은, 신경림, 정희성, 김용택 등으로 이어지는 농촌시들을 거슬러 올라 백석에게까지 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태준 시가 우리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전통적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언어감각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따뜻하면서도 예리하고, 자연을 그냥 따라가는 듯하면서도 그 속에 울림이 있다. 농촌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문태준 시의 이야기적인 요소는 적절한 언어적 절제와 서정적 울림과 만나면서 균형을 얻는다. 문태준 시가 많은 시인과 비평가들로부터 공히 좋은 시로 거론되는 것은 그의 시가 이러한 균형미를 획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문태준의 미당문학상 수상작을 읽어보자.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
넝쿨에
작은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 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 낼 수 없는

-「누가 울고 간다」전문

이 시는 흡사 백석의「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을 읽고 있는 느낌을 준다. 남신의주 유동에 살고 있는 박시봉이라는 사람의 집에 세들어 살고 있는 이가 보낸 편지 형식을 빌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과 그리움, 객지 생활의 외로운 심정을 편지쓰듯 써 내려가고 있는 백석의 시는, 특히 시적 상황이 눈이 오는 겨울이라는 점과, 외로움과 울음과 그리움의 정서가 섞여있다는 점과, 토속적인 우리말이 정감을 더해준다는 점에서 문태준의 시와 상당히 많이 닮아있다. 단지 다른 점은 문태준의 시는 백석의 시에 비해서 짧은 시행으로 절제되어 있다는 정도이다. 문태준의 시에서 시인의 독창적인 조어인 듯한 “외따롭고”도 백석 시의 “따로 외로이”의 합성어로 읽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문태준의 시에서 누구인지 구체적인 대상이 생략되어 있는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은 혹시 백석을 두고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넝쿨에 와서 울고 가는 가슴이 붉은 작은 새는 아마 백석일 것이다. 백석과 문태준은 서로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이지 않은가? 이러한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문태준은 백석을 넘어서는 예리한 감성과 언어감각을 지니고 있다. 위의 시에서 “빛처럼/문풍지로 들어온/겨울빛처럼/여리고 여려” “ 가슴속으로/붉게/번지고 스며/이제는/누구도 끄집어 낼 수 없는” 그 새의 울음소리를 “누가/내 귀에서” “꺼내 펴나”고 노래할 수 있는 시적 감수성은 아무나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문태준 시의 장점은 이렇듯 대상을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섬세한 언어로 표현해 내는데 있다. 어쩌면 「누가 울고 간다」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간듯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가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묽다

-「묽다」전문

이 시의 장점은 ‘새’로 표상되는 인간의 존재론적 시간성의 경계를 시인의 우주적 상상력을 통해 예리하게 포착해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 시에서 전선에 외롭게 앉아있는 새는 문명 속을 살아가는 고독한 현대인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흘러들어가고 있”는 현상은 어둠이 짙어 오는 일몰상황을 가리키는 동시에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해 가는 인간의 시간적 존재양상을 암시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이 “환하고 어두운 것”과 “차고 미지근한 것”의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시인이 대상을 내면화시켜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빛과 어둠이나 삶과 죽음처럼 상반된 것들이 무수히 존재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서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져 있다는 것을 이 시는 암시해준다. 특히 이 시가 돋보이는 것은 삶과 죽음, 외적 대상과 내면의 경계를 ‘묽다’라는 한마디의 형용사로 함축해 내는 시인의 놀라운 감수성에 있다.


문태준의 시가 소월이나 백석처럼 전통적인 서정에 기대고 있으면서도 그들과 구별되는 것은 대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그것에서 삶의 비의를 찾아내는 시인의 예리한 눈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또다른 시 「가재미」에서 시인이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 즉 삶 쪽에서 죽음 쪽으로 눈이 쏠려있는 그녀를 ‘가재미’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나,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같은 날들을 보고 있”는 두 가재미(나와 그녀)의 엇갈린 시선의 아이러니를 포착해내고 있는 것도 문태준 시인의 타고난 감수성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시단이 현재 문태준과 같이 뛰어난 젊은 서정시인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축복이다. 하지만 한편에서 보면 문태준의 시가 보여주는 세계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그것은 문태준의 시가 얼마 가지 않아서 ‘익숙함’의 매너리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왜냐하면 ‘익숙함’은 다른 말로 말하면 새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미당문학상 작품론에서 “현실의 높은 파고에 정면으로 맞서, 다소 거칠더라도 시의 범주를 확장해 나가”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 김주연의 언급을 새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이 밖에 문태준과 비슷한 연배이면서 동일성의 시학을 바탕으로한 서정시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시인으로는 2005년 애지 문학상을 수상한 손택수, 2002년도 첫 시집『거미』출간 이후 활발한 시작황동을 보여주고 있는 박성우, 2004년에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김선우 등을 꼽을 수 있다. 먼저 손택수는 우리의 전통이나 자연 속에서 소재를 발견해 내고 이를 시로 형상화 하는. 신토불이의 정신을 자신의 몸으로 체득해 보여주는 시인이다. 그의 시에 보이는 자연친화적이면서도 토속적인 농촌의 정서는 문태준의 시와도 어느 정도 닮아있다. 박성우 역시 농촌적 가난이나 개인, 또는 가족의 아픔을 당당하면서도 절제있는 어조로 형상화시킬 줄 아는 시인이다. 특히 대상을 직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대상을 통해 아픈 이야기들을 추체험해 내는 감각이 남다르다. 김선우는 나이는 70년 생으로 이들과 비슷하지만 이미 개성적인 자신의 시세계를 나름대로 구축해 놓은 시인이다. 그는 자신의 여성성을 자연친화적으로 건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특장을 지닌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여성적 관능이 드러나 있지만, 그 관능이 음침하거나 노골적이지 않고 건강한 생명감이 넘쳐 흐른다. 그의 시는 특히 모성적 긍정에 바탕을 둔 따뜻한 시선이 녹아있고 무엇보다도 시적 표현이 진솔하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3. 새로운 감각의 젊은 시인들

시가 새롭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시적 미덕 중의 하나이다. 우리 시사에서 李箱을 필두로 한 다다와 초현실 주의 시, 후반기 동인들의 시나 김수영, 황지우, 오규원,박남철,이성복의 맥락을 잇는 90년대적 포스트모더니즘 시에 이르기 까지 이른바 해체 시나 탈서정주의 시들이 우리 시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새로움’과 무관하지 않다.


요즘의 시단을 살펴보면 이러한 시사적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눈에 띈다. 이미 여러 평론가들에 의해서 거론된 바 있는 황병승을 비롯해서 김민정,장석원,김행숙,김언,김근,이민하,이영주,유형진,진수미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작품은 주로 신세대 문화를 바탕으로 한 환상성과 탈주체적 인식, 혼종성과 다변성, 다성성의 언어를 도구로 삼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가 그동안 우리 시가 지향해온 전통적인 문법과 동일성의 원리에 귀착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의 시에는 수 많은 문화적 콘텐츠들이 뒤섞여 있거나 유령적인 화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무의식에 가까운 언술로 자신의 내면을 낯설게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자학 및 피학, 또는 음란이나 성도착의 무질서를 보여주거나 도시적 문명에 중독된 존재의 가상적 현실을 환상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렇듯 종래의 시 문법을 거부하고 있는 이들의 시는 한편으로는 새롭고 한편으로는 난해하고 한편으로는 혼란스럽고 한편으로는 불온하다. 시가 새로움을 추구하는 장르이긴 하지만, 그 극단에 소통 불가능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칫 자기모순에 빠지기 쉽다. 시는 전통성과 전위성, 의미와 무의미, 질서와 무질서, 단성성과 다성성(혼종성), 동일성과 차이성 등의 양면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장르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새로움을 추구하는 젊은 시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은 시적 논리의 결여와 지나친 난해성이라고 말할수 있다. 아무리 실험적인 시라고 할지라도 좋은 시는 나름대로의 문법과 논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시는 종종 난해하긴 하지만 나름대로의 해석의 길을 열어두고 있다. 먼저 황병승의 시를 읽어보자.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예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금뻐금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황병승,「커밍아웃」전문

황병승의 첫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에 세 번째로 실려있는 이 시는 황병승의 시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는지 그 뿌리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의 진짜를 알기 위해 얼굴을 맨 바닥에 갈아버리고 뒤통수를 통해 뒤로 걷거나, 입술을 뜯어버리고 항문으로 말을 한다. 여기서 ‘뒤통수’나 ‘항문’은 보이지 않거나 은폐되어 있는 것들로 ‘부끄러움’의 환유적 대상물들이다. 시집 제목처럼 ‘커밍아웃’이야말로 부끄러운 부분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행위이며, 시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당당하게 드러냄으로써 자아와 타자의 진실성에 가까이 다가서고 싶어한다. 시인이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다고 하는 말은 사실 무수한 ‘당신’으로 표현되는 은폐된 타자들을 통해서 자아의 진실을 더 많이 알고 싶다는 말이다. 황병승의 시에는 ‘여장남자 시코쿠’,‘고양이 짐보’,‘앨리스 부인’,‘아끼코’,‘프랑스 이모’등 무수히 많은 캘릭터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캘릭터들은 시인의 내면에 숨기고 있던 부끄러움을 커밍아웃하기 위한 퍼소나들이다.

 

시인이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라고 말하는 것은 ‘호주머니’나 ‘서랍’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부끄러움의 환유적 타자들이 무수히 많이 숨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은 “부끄러운게 싫어서”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하면서 수많은 캘릭터들을 그의 시에 등장시켜서 ‘부끄러움’을 커밍아웃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황병승의 시는 다분히 프로이트적이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의 부끄러움과 만나서 악수를 하기 위해서 자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즉 부끄러움의 원천을 찾아서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황병승의 시는 자신의 내면적 부끄러움 뿐 아니라 허위적이고 도착적인 세계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를 시적 근거로 삼고 있다. 그가 루이스 케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 고양이의 말을 빌어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 없어 어차피 양쪽 모두 미친 것들이니까”(「Cheshire Catꡑs Psycho Boots_7th sauce」)라고 말하는 것도 세계에 대한 불신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 이러한 그의 의식은 기존의 가치관과 전통적 질서 뿐만 아니라 현대시의 전통적인 문법까지도 무시해 버린다. 그의 시에 유독 ‘시코쿠’, ‘아키코’와 같은 이질적인 외래어가 판을 치고 있는 것도, 시를 쓸 때 우리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나 일본말에 대한 거부감 등을 의도적으로 전복시켜 보려는 시인의 의도가 그 속에 숨어있는 것이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기존의 고정관념에 대한 일종의 커밍아웃인 셈이다.

둥글고 붉은 토마토가 있다 四角의 방 안에 있다 한 사람이 옆에 있다 아버지의 안경을 쓴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가만히 보니 애인의 얼굴이다 그의 핏발 선 두 눈이 군침을 삼키던 나를 불결한 듯 욕실로 떠다민다 입이 파랗게 허기진 나는 높다란 선반에서 꺼낸 구름으로 입안 가득 이빨을 문질러 닦고는 돌아온다 방으로 오는데 한나절이 걸린다 사람이 사라졌다 둥글고 붉은 토마토가 사라졌다 새하얀 사각의 캔버스만 놓여있다 캔버스를 들여다보니 둥글고 붉은 토마토가 거기 있다 나는 캔버스 안으로 들어가 두리번거린다 둥글고 붉은 토마토 옆에 한 사람이 있다 애인의 넥타이를 맨 그는 고개를 돌려 내게 호통을 친다 가만히 보니 아버지의 얼굴이다 그의 둔탁한 목소리가 군침을 삼키던 나를 불온한 듯 캔버스 밖으로 떠다민다 나는 왼쪽 모서리에 매달려 안간힘을 쓴다 캔버스 밖은 낭떠러지다 아득한 곳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 들린다 그는 내가 매달려 대롱거리는 캔버스를 들고 또 다른 사각의 방으로 옮긴다 몸이 심하게 흔들리자 나는 캔버스에서 떨어져 끝없이 추락한다 둥글고 붉은 토마토가 함께 굴러 떨어진다 나는 추락하면서 둥글고 붉은 토마토를 걱정한다 눈을 떠보니 한 사람이 옆에 있다 아버지의 파이프를 입에 문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애인의 빨갛게 익은 혀가 내 입속으로 들어와 아침인사를 한다 비릿하고 물컹하다 그의 등 너머로 둥글고 붉은 토마토가 보인다 다시 死角의 방이다


―이민하,「토마토」전문

이민하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인 『환상수족』은 시집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환상적 상상력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시집이다. ‘환상수족’은 수족이 절단된 후에도 없어진 부위가 아직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태를 말하는데, 그의 시의 대표적 상징성을 지닌 이 용어 속에는 시인이 자신의 욕망의 억압과 결핍을 환상을 통해서 보상받으려는 내재적 심리가 깔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용 시 역시 ‘토마토’로 상징되는 욕망을 둘러싼 아버지(억압)와 애인(사랑) 사이의 갈등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녀가 먹고 싶어하는 토마토는 항상 사각의 방 안에 있고 그녀의 곁에는 한 사람이 있다. 그 한 사람은 아버지도 되었다가 애인도 되는데, 문제는 온전한 아버지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아버지의 안경을 쓴 애인이거나 애인의 넥타이를 맨 아버지이다. 이러한 상황은 시인의 내면에 사랑과 억압이 공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시에서 사각의 방은 억압의 심리기제가 내장되어 있는 ‘四角의 방’이며, 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 ‘死角의 방’이다.


이 시 속의 시간도 자세히 보면 현실적인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시적 화자가 욕실에서 이빨을 닦고 방으로 돌아오는데 한나절이 걸린다는 진술에 드러나 있다. 그리고 공간 역시 시적 화자가 캔버스 속을 드나든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이처럼 이민하는 환상적인 상상력을 시 속에 도입해서 내면의 풍경이나 억압을 구체적인 상황으로 제시해 보여준다. 황병승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동화적 상상력을 통해서 현실적 제약을 극복하려 했다면, 이민하는 현실적 시공간을 뛰어넘는 환상을 통해서 결핍과 고통을 내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 ‘유령’이라는 퍼소나를 등장시키는 경우(김언), 현실의 위악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유형진), 기존의 시적 문법를 파괴하고 다성적 목소리를 등장 시키는 경우(장석원)등도 그 성격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넓게 보면 무의식이나 환상의 범주에 포섭된다. 이들 시들은 나름대로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통해서 우리 시단의 새로움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자칫 개인적 맹목성이나 개인화의 우상에 매몰되기 쉽다는 염려가 따른다.


요즘의 젊은 시인들의 시가 황지우, 이성복, 박남철 등으로 대표되는 80년대의 전위 시와 변별되는 점은 80년대 시가 시대적 우울과 좌절의 산물이라면,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개인적인 차원의 억압이나 고통을 내면화시키고 있는 경우가 많는 점이다. 말하자면 전위 시의 관심이 전체에서 개인으로 옮겨온 셈인데, 그 중간에 걸쳐있는 것이 90년대를 전후한 유하의 압구정동 시편들이다. 현대문화의 전방위적 환유공간인 압구정동의 풍경들을 시에 끌어들인 유하의 시편들은 물신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와 그 속에 내재해 있는 개인의 욕망을 내밀히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와 개인의 중간자적 성격을 지닌다.


요즘의 젊은 시인과는 약간 변별되기는 하지만 권혁웅의 두 번 째 시집『마징가 계보학』역시 과거에서 현대에 이르는 추억 속의 풍속도를 ‘계보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유하와 닮아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는 ‘마징가’나 ‘수퍼맨’, ‘스파이더맨’등의 시적 소재나 어법이 젊은 시인들 편에 서있다는 점에서 유하의 시와 구별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권혁웅의 시는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와 이전 시의 가교 역할을 담당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밖에 새롭게 주목되는 시인은 2005년도 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한 조용미 시인과 올해 첫 시집『번개를 치다』를 낸 정병근 시인, 그리고 자신의 독특한 병 체험을 ‘목숨’의 언어로 승화시킨 박진성 시인을 꼽을 수 있다.


조용미 시인은 2004년에 그의 세 번째 시집『삼베옷을 입은 자화상』을 낸 중견급 시인이지만, 병을 앓고 있는 자신의 몸을 하나의 텍스트로 삼아 그 속에서 우주적 비의를 읽어내는 그의 눈은 깊고도 넓다. 특히 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한 대표 시 「검은 담즙」은 인간의 몸에서 자연의 언어를 찾아내는 탁월한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정병근 시인은 그의 작품 「유리의 기술」에서 보듯 대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예리한 눈과 감각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아픔이나 그늘이 묻어있지만 엄살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절제된 감정을 담담하게 시로 녹여낼 줄 안다.
박진성 시인은 조용미 시인처럼 몸에 병을 지니고 있지만, 그 절박함은 조용미 시인에 비해서 훨씬 직접적이다. 따라서 그의 시들은 일종의 병상일기이며, 병과의 처절한 싸움의 기록이다. ‘상습불면’,‘자살충동’,‘공황발작’ 등으로 표현되는 그의 병은 그의 시를 자연스럽게 고흐에게로 끌고 간다. 고흐와 연관 된 그의 시편들이 더욱 감동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80년대 해체시를 주도했던 황지우가 “나는 말할 수 없음으로 양식을 파괴한다. 나는 파괴를 양식화한다.”고 했을 때, 그 시대의 시인들은 그 ‘말할 수 없음’에 공감하고 그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요즘의 젊은 시인들은 ‘말할 수 없음’ 때문에 양식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서 양식을 파괴한다. 그들의 말은 기성세대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문법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그들만의 문법인 셈이다. 그들에게는 시대적 공감 보다는 개인적 중얼거림이 더욱 절실하다. 그들은 이 시대에 희망을 걸고 더 이상 꿈꾸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답답한 가슴을 치밀고 올라오는 무언가를 불연속적으로 툭툭, 토해내는 것을 양식화 해 나갈 뿐이다.

<빈터>동인 시집(2006년) 특집원고

 

출처, 시산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