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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선생 타계 40주년

휘수 Hwisu 2006. 3. 1. 00:22

안익태 선생 타계 40주년…“애국가, 작곡에만 6년 걸려”  2006/02/27 05:24

유가족들 “안 선생, 74개 國歌 연구해 ‘애국가’ 만들어” 육성 공개

올해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1906~1965) 선생이 타계한 지 40년이 되는 해다. 내년은 그의 탄생 100주년이다. 지난 3월 말 스페인 발레아르스주 마요르카섬의 팔마시를 찾은 기자는 안익태 선생이 말년을 보낸 자그마한 이층집에서 그가 애국가를 작곡한 과정의 일부를 보여주는 자료를 발견했다. 자료에 따르면 안익태 선생은 그동안 알려진 것처럼 ‘순간적인 감흥’이 아니라 치밀한 준비와 여러 차례의 개작 과정을 통해 애국가를 작곡한 것으로 나타났다.


▲ 왼쪽부터 외손자 미구엘, 아내 롤리타 안과 두 딸.

개화기 여러 종류의 ‘애국가’ 불려

“1930년 제가 처음으로 미국 상항(桑港·샌프란시스코)에 내렸을 때 우리 한인 동포가 그날 밤 환영회를 해주었습니다. 우리나라 회관에서 그 때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았습니다. 많은 기쁨과 감사를 가지고…. 그 후에 우리는 같이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애국가를 불렀는데 그 곡은 졸업식할 때 부르던 스코틀랜드의 것이었습니다. 내가 먼저 할 일은 국가(國歌)를 짓는 것이라 생각했죠. 그래서 74개 국가를 공부했습니다. 1936년에 독일에서 (애국가를) 작곡했고, 그것이 어떻게 돼서 미국으로 가고 중국 중경(중칭)으로 가서…, 전쟁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독립이 되자 악보가 우리나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1960년대 초 일시 귀국한 안익태 선생의 라디오 인터뷰를 녹음한 것으로 추정되는 육성 테이프 중)

▶ 안익태 선생이 사용했던 만년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1930년 9월 선편(船便)으로 상항에 내렸을 때 한교회(韓僑會) 사무실에서 태극기를 생전 처음 대했습니다. 그 때 홀연히 영감에 사로잡혀 애국가의 악상을 얻었지요. 그 후 곡을 다듬고 가다듬는 데 5~6년이 걸렸지요….”(‘애국가가 표절이라고요?’란 제목으로 동양통신의 칼럼니스트 심연섭(沈鍊燮)씨와 인터뷰 내용이 기록된 자료 중)

‘애국가’라는 이름의 가사에 곡조가 붙여져 나타난 것은 조선 말 개화기 이후부터다. 1896년 ‘독립신문’ 창간을 계기로 여러가지의 애국가 가사가 신문에 게재되기 시작했지만 당시 이 노래들이 어떤 곡조로 불렸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대한제국이 서구식 군악대를 조직해 1902년 ‘대한제국 애국가’라는 이름의 국가를 만들어 나라의 주요 행사에 사용했다는 기록은 있다.

오늘날 불리는 애국가의 가사는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던 1907년을 전후해 조국애와 충성심, 자주의식을 북돋우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알려졌다. 노랫말에 붙여진 곡은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곡을 애국가로 채택해 사용, 해외에서 널리 퍼졌고 국내에서도 광복 이후 정부 수립 무렵까지 여전히 스코틀랜드 민요에 맞춰 불렀다.

그동안 국내에 알려진 애국가 창작과정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유럽을 향한 안 선생이 1936년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일본 붐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불현듯 6년 전 미국에서 적어둔 가사를 펴놓고 감격 속에서 애국가의 선율을 완성했다’는 것. 안익태 기념재단 홈페이지의 ‘선생이 걸어오신 길’ 부분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일부 자료에는 ‘(1936년 미국에서 베를린으로 건너가는 선상에서) 하늘의 계시처럼 뇌리를 스치는 애국가의 가락을 신들린 것처럼 오선지도 없이 테이블 크로스(식탁보)에 적어나갔다. 이 때가 1936년 8월로 그 때 독일은 나치스 히틀러가 득세하여 일본과 공수동맹을 맺고 국위선양을 위한 올림픽 붐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는 등 구체적 상황까지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에 안 선생의 육성 자료를 통해 이같은 내용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너무 당혹스럽고 속상해”

▶안익태 선생이 남긴 '나의 사랑 한반도…' 미완성 악보

육성 자료에는 “음악가의 의무는 만인에 사랑과 기쁨을 나눠주는 것”이라는 그의 음악가적 신념도 나타나 있다. “예술적 음악을 듣고 즐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음악 그 자신이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우리 음악하는 사람의 임무입니다. 좋은 음악, 위대한 예술은 사랑과 화합입니다.”

사랑과 화합을 위해 애국가를 작곡했지만 유족들은 지난 3월 ‘저작권 논란’을 겪으며 마음에 적잖은 상처를 받았다. 한국을 찾아 애국가의 저작권을 정부에 무상양도하고 마요르카로 돌아간 지 2주일. 안익태 선생의 외손자 미구엘(28)씨는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인터넷을 통해 찬반 논란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애국가의 저작권을 한국 국민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한국에서는 여러가지 좋지 않은 의견이 올라오더군요. ‘안익태 선생의 유족이 스페인에 사는 것도 한국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유족이 다른 뜻을 품고 흥정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고, 심지어는 ‘이번 기회에 애국가를 바꾸자’는 극단적인 의견도 나왔습니다.”

그는 할머니 롤리타 안(89) 여사에겐 한국의 분위기를 단 한마디도 전할 수 없었다고 했다. 남편과 한국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할머니가 얼마나 속상해할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왜 한국민이 우리 가족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까, 저작권에 대한 불만은 정부에 제기해야 하는 것 아닐까. 뒷짐지고 있는 정부에 대해서도 화가 났습니다.”


그는 “1960년대에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국제음악제를 개최할 때 국내 음악계의 몰이해에 부딪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40년이 지난 뒤 우리 가족이 또 다시 그와 비슷한 입장에 마주친 셈”이라고 했다. “애국가 저작권을 놓고 국민의 의견이 나뉘는 것은 온국민을 하나로 만들고 화합시키기 위해 애국가를 작곡한 할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난번에 한국을 찾은 것은 ‘2005 경기 방문의 해’ 홍보대사직을 수락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더 이상 이 문제 때문에 국민이 분열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작권 양도에) 깨끗이 서명한 것입니다. 당시 여러 경로를 통해 연락이 닿은 한국 언론도 결국은 ‘무상(for free) 양도냐 아니냐’는 부분에만 관심을 집중하더군요. 씁쓸했습니다.”

“마요르카 집을 ‘안익태 기념박물관’으로”

사실 안익태 선생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태가 아니다. 안익태 재단에서 매달 보내주는 2500달러가 이들 수입의 전부다. 부쩍 오른 마요르카의 물가도 이들의 삶을 쪼들리게 하고 있다. 미구엘이 최근 3년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안 선생의 셋째딸 레오노르(53)씨가 어머니 롤리타 여사를 돌보기 위해 집으로 들어와 있고 현재 다른 벌이는 없는 상태다.


▲ 안익태 선생 집에 걸려 있는 사진들.

미구엘이 들고 다니는 검정색 손가방에는 ‘안익태’라는 이름이 노란색 실로 새겨져 있다. 그 위에는 태극기가 붙어있다. 그가 사용하는 이메일 주소는 ‘koreame’와 ‘ahneaktai’로 시작한다. 8년 전부터 그의 휴대전화 벨소리는 애국가다. 법학을 전공한 미구엘은 “안익태의 후손으로 한국과 스페인을 잇는 다리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꿈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현재 할머니·어머니와 함께 ‘2005 경기 방문의 해’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것이 전부다.

그가 살고 있는 마요르카 집의 소유권은 한국 정부에 있다. 1990년대 초반 현지에서 원양업체를 운영하던 권영호씨가 사재를 털어 매입한 뒤 정부에 기증한 것이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갈 때 그곳에서 첫 번째 ‘내 집’을 마련하겠다”던 안 선생의 뜻에 따라 유족은 수십 년간 집을 갖지 않고 전세살이를 했다. 미구엘의 소망은 할아버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마요르카의 집이 ‘안익태 기념박물관’으로 거듭나는 것.

▶ 애국가 창작 과정을 적은 동양통신 칼럼니스트 심연섭씨와의 인터뷰 문건

“할아버지의 친필 악보를 얇은 종이로 감싸 보관하고 있지만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었습니다. 체계적인 관리가 절실합니다. 거실 장식장에 빼곡한 각종 안 선생의 유품이 언제 도난당할 지 모릅니다. 불안할 따름입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이웃 건물 탓에 집 주변은 예전의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담 한쪽이 무너지기도 했다. 집 바로 옆의 건물이 언제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 헐린 뒤 그 자리에 아파트 건물이 들어설지도 걱정거리다.

“가능하다면 주변의 건물을 구입해서 아름다운 한국식 정원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많은 한국 동포와 외국 관람객이 이곳을 찾아 애국가와 그것을 작곡한 안익태 선생을 기억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팔마(스페인)=채성진 조선일보 전국뉴스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