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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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험준한 사랑

휘수 Hwisu 2006. 2. 9. 10:24
 

험준한 사랑 / 박 철 어제 문경 새재를 넘으며 맺지 못한 생각이 저녁 내내 나를 괴롭힌다 험준했던, 내 험준한 사랑 나무들 파헤쳐져 터널이 뚫리고 나도 어둠을 기어나와 한 생애를 사랑으로 보냈구나 사랑은 낄낄거려도 아픔이다 마곡동 허름한 밥집에서 키 작은 필리피노와 앞뒤로 앉아 텔레비전을 바라보면서 밥을 먹다가 지난밤 문경 새재를 넘으며 다시 찾은 험준한 사랑에 목이 멘다 인도에 가서 극장 검표원이라도 하며 살아야겠다던 소설 <광장>의 이명준 같은 푸른 작업복의 작은 필리피노는 강서구 마곡동 섀시집에서 쇠톱질을 한다 이를테면 지금도 그는 험준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보름달을 보듯 텔레비전을 올려다보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는 무얼 삼킨다 그게 지난밤 문경 새재를 넘어온 한 청맹과니건 코리안 드림을 안고 날아온 눈 둥그런 필리피노건 아직 험준한 골짜기에서 발을 묻고서 ---------------------------------------------------------------- 싸락눈이 흩날리는 추운 날이었다. 서울 변두리의 한 책방 안에서 어떤 꼬마가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나이 든 여주인은 무슨 일인가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책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둥그렇게 등짝만 보였다. 꼬마를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꼬마는 책이 욕심 났다. 조용한 주변을 확인한 꼬마는 얇은 점퍼 안으로 책을 슬쩍 밀어넣었다. 그 순간 다른 쪽 서가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던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겁에 질린 아이의 눈망울이 화등잔보다 커졌다. 아이는 황급히 책을 내려놓고 서둘러 책방을 빠져나갔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꼬마는 한겨울인데도 얇은 옷차림이었다. 사내는 책방 문을 닫고 달아나는 아이를 따라 문밖으로 나섰다. 아이가 훔친 책보다는 그 얇은 옷이 눈에 밟혔다. 저만치 뛰어가는 아이를 뒤쫓아가 어깨를 움켜쥐었다. 하얗게 얼굴색이 변한 아이는 윗동네에 산다고 몸을 떨며 말했다. 사내는 그 윗동네를 잘 알고 있었다. 그곳은 더욱 바람이 거센 곳이다. 아이가 걸치고 있는 얇은 옷조차 인정사정 두지 않을 것이다. 사내는 그 찬 바람 때문에 그만 마음까지 시려졌다. 사내는 "앞으로 네가 보고 싶은 책은 다 사주겠다"고 덜컥 약속을 하고 말았다. 제 입성 또한 기름기 없기는 마찬가지인 사내로서는 참 무책임한 약속이었다. 사내는 집으로 돌아와 궁리를 거듭하다가 S전자 회장님 앞으로 편지를 썼다. 보름쯤 지났을까. 담당 여직원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회사로서는 이 같은 개인적인 일에 일일이 배려를 할 수는 없다"라고 서두를 꺼낸 후, "그러나 제가 개인적으로 책값을 보내주도록 노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S전자의 여직원 또한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민 고민 하다가 이 여직원은 오래 전에 헤어진 첫 애인에게 사연을 풀어놓았다. 왜냐하면 그 첫 애인이 책방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 곳에 살고 있는 첫 애인은 15년 만에 새로 연결된 옛 여인에게 밝게 웃으며 "그렇게 해주마"고 대답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꼬마가 읽고 싶은 책들은 몇 사람의 손을 거쳐 본인에게 전해졌다. 공간적으로는 꽤 멀리 돌아온 책들이었다. 사실은 책방 여주인과 그 꼬마는 아주 가까이 몇 집 건너 살고 있었다. 아무도 모를 뿐이었다. 이 꼬마는 훗날 시인이 됐다. 이름이 박철(朴哲)이다. 박 시인이 최근 여섯 번째 시집 '험준한 사랑'(창비)을 펴냈다. 그리고 그는 두 번째 도둑 사건을 고해하고 있다. 박철 시인의 부인은 미학사라는 출판사에 다녔다. 한때 잘 나가던 그 출판사는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문 닫던 날 그곳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던 부인은 남편을 위해 용달차를 불러 원고용지를 '횡령'했다. 남편이 평생을 쓰고도 남을 분량이었다. 이 횡령 사건은 출판사의 실제 주인이었던 박의상 시인도, 그리고 사장이었던 배문성 시인도 감쪽같이 모르는 일이었다고 한다. 부인은 무모하고 용감했다. 박철 시인은 "원래 그런 여자였다"고 쓰면서, 부인은 광화문에서 사무실이 있고, 자신은 김포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지하철-버스-마을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아내는 논길이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남편은 노을진 논둑에 앉아 있다가 아내를 마중한다고 한다. 지금 그 원고용지는 퇴색되어 가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각단지지 못한 시인에게 지금도 세상은, "한 생애를 사랑으로 보내기에는" 그저 험준할 뿐이다. <어느 시인의 고해 - 김광일> ----------------------------- 다른 곳에 걸린 글이다. 빨랫줄에 널어진 남의 내의를 훔치듯 쥐어들고 왔다. 어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꽁지야 나 살려라 내달렸는지도 모른다. 왜 그랬을까? 얌전을 빼며 천천이 팔자걸음을 걸으며 들고왔어도 괜찮었을건데, 이유야 이렇다. 사랑한다고 가슴에 그 열매가 성숙되기도 전에 입에 발린 말로 나풀거리곤 한다. 쉽게 나불거릴수록 향기가 떨어지는 것을. 아! 입을 잠그자. 누구? 내 입.

 
출처 : 블로그 > 거울 | 글쓴이 : 거울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