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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쉬잔느 발라동 & 에릭 사티...그리고 위트릴로

휘수 Hwisu 2006. 4. 6. 18:05
글쓴이 ;클라

 

 

쉬잔느 발라동 & 에릭 사티...그리고 위트릴로  
 Gnossiennes No.1 그노시엔느<--

Suzanne Valadon (1865-1938)

Self-Portrait,1909

아래는 로트렉이 그린 쉬잔 발라동

로트랙 미술관의 ...압상트를 마주한 발라동

Gueule de bois /Suzanne Valadon 1887 / Musée Toulouse Lautrec Albi Bildnis.

르느와르 그림속의 발라동 Danse à Bougival (Suzanne Valadon et Paul Lhote) 1883

Museum of Fine Arts - Boston -USA 左

Auguste Renoir 作 Suzanne Valadon 右

쉬잔 발라동과 그의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

좀 묘한 인연으로 몽마르트 거리에서 만나 우정을 키워오던 청년 사티와 소년 위트릴로는

그가 자기 어머니랑 뜨거운 염문으로 유명해지나 에릭 사티를 저주하며 집 문 앞에다 사티가 좋아하던 떠돌이 개를 죽여 상자에 담아 놓아두었던 외로운 소년이었지요

그 뒤에 어머니 발라동은 돈많은 부호랑 결혼을(그림에 심취해서 화가가될 욕망이었는지도...)

이 사건으로 (약자끼리^^) 사티와 위트릴로의 사이는 다시 우호적으로 변했답디다만...(아래 편지참조)

가난한 하층민인 곡예사에서 르느와르 로트렉 드가의 모델로 -그 당시의 모델들은 대부분 화가들의 정부?- 별반 차이 없는 생활을 하던 그녀는 드가의 권유로 그림공부에 몰두하게 되고 ....

그녀의 그림은 보다시피 그 당시 여느 화가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지요

그리고 이 여인만 사랑하다 딱 6개월 만에 헤어지고

그 뒤로는 아무 여인에게도 맘을 열지않고 독신으로 보내면서

그녀를 향한 열정을 음악으로 승화시긴 아주 유명한 (?)곡이 있지요

*벡사시옹(Vexations 아래 에피소드 참조)

피폐하고 뚤어진 성격의 아들에게서 예술적 소질을 발견,

정신병원까지 수용된 그를 알콜중독에서 구하고

몽마르뜨르의 화가란 이름을 얻게하지요

많은 화가들에게 모델로도 유능한 이 여인은

시쳇말로 신분상승의 고지도 탈환했고 말년에는

아들과도 화해하여 부러울 게 없어 보이지만

더러는 "팜므 파탈" 쪽으로도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는 건

아들 위트릴로랑 비숫한 연배의 청년과도 염문을 뿌리고

철갑상어알을 고양이에게 먹인다거나

당근으로 만든 코사지를 달고 다니는 등 이상한 행동들로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려서인지도...?

발라동이 그린 아들 위트릴로의 초상

Suzanne_Valadon,-Portrait de Maurice Utrillo, vers 1921

참고로 "모리스 위트릴로"의 아버지는 로트렉, 고흐 라는등

구구한 소문도 있지만 그의 이름대로 위트릴로 라는 사람이

양자로 입양한 사실 밖에는 뚜렷하게 밝혀진 사실은 없다고 합니다.

위트릴로 이름을 빌려준 사람과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지요...

그녀의 많은 자화상, 여성의 눈으로 들여다 본 누드는

그녀의 질곡된 삶을 여실히 나타내는 수작이 많다고 하지만

정물화 또한...여튼 그녀의 기질을 알아낸 드가가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끼리끼리 통한다더니... 참 대단한 예술가들이지요

"Bouquet of Flowers" / 24.50 x 20.25

Adam and Eve (1909)

Deux nus au bain - 1923 左 / 右 Nu au canapé rouge 1920 | Öl auf Leinwand | 80 x 120 cm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그녀의 삶 때문인지

상상력을 동원한 영화나 소설도 많은 모양입디다

특히 에팰탑의 검은 고양이라는 별명의 에릭 사티와는

에펠탑의 검은 고양이

아라이 만 저/김석희 역 | 한길사 | 2000년 10월 판매가 : 10,200원

괴짜·이단·천재 작곡자 사티의 삶 | 한겨레신문 잠깐독서 오철우 기자 | 2000-11-06 |
평생 가난한 카바레 피아니스트로 살았으나 음악열정을 불살라 새로운 현대 음악어법을 창조해낸 천재 작곡가,

언제나 검은 모자에 검은 옷과 검은 고양이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박쥐우산을 들고 다녔고 악보엔 이상한 지시어를 남겼던 괴짜 작곡가 에리크 사티(1866~1925)의 일생은 그 자체가 19세기 동시대에선 하나의 소설감이었다.

열정과 자유분방 그리고 고독을 즐겼던 사티의 예술과 삶을 다룬 소설 <에펠탑의 검은 고양이>는, 그래서 실존인물 소설이면서도 허구에 못잖게 소설다운 이야기를 풀어낸다.

물론 상당 부분은 사티 사망 75주기에 이 소설을 바친다는, 일본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 아라이 만의 상상력과 문체 덕분이다. 소설 속 사티는 `가난뱅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닐 정도로 가난한 삶을 즐기며,

몽마르트 언덕의 술집 거리를 이리저리 누비던 기인 예술가였고, 20대에 모델 쉬잔 발라둥을 만나 반년간 열애에 빠지고, 이후 독신으로서 화가·작곡가·가수 등 예술인들과 교우하며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19세기 고전음악의 `이단"으로 살아온 그의 행적이 찬찬히 드러난다

Erik Satie, by Suzanne Valadon <--左

30년 뒤에야 배달된 러브레터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에릭 사티가 예술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죽은 지 38년 만이다.

에릭 사티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 것은 가난과 독신이었다. 그는 평생 ‘무슈 르 포브르’ 즉,

‘가난뱅이 씨’라고 불릴 만큼 가난했으며 단 한 번의 연애를 끝으로 독신으로 살았다.

묻혀 있던 그를 다시 발견한 것은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말이었다.

1963년, 루이 말 감독은 자신의 영화 <도깨비불>의 영화음악으로 사티의 피아노 곡을 사용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아름다운 이 음악은 대체 누가 작곡한 거지? 뭐? 사티라고?

도대체 그가 누구야?’ 하며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마치 두껍고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계단을 올라가듯 툭툭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짐노페디>나 <그노시엔>. 큰 소리로 외치는 게 아니라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피아노 소리.

에릭 사티의 음악을 글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파리 몽마르트르로 이사 온 시골 청년 사티는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곤궁한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술집에서 처음 쉬잔 발라동을 보았을 때, 그녀는 그 당시 이미 유명했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 사티는 절대로 겁먹을 것 같지 않은 야생의 냄새를 풍기는 그녀를 보며

‘섣불리 손댔다가는 깨물릴 것 같군’ 하는 생각을 한다. 쉬잔 역시 로트레크의 어깨 너머로

사티를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다시 만난 건 2년 뒤의 일이다.

그가 한평생 사랑했던 여자, 쉬잔 발라동.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와 르누아르,

퓌비 드 샤반의 모델이며 그들의 연인이기도 했던 쉬잔. 사티는 그녀를 사랑했다.

사티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 둘의 모습은 거울처럼 닮아 있었다.

사티가 몽마르트르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소년 위트릴로는 쉬잔이 열여덟 살 때 낳은 사생아다.

사티가 쉬잔과 사귈 때, 사티의 집 문 앞에다 사티가 좋아하던 떠돌이 개를 죽여 상자에 담아 놓아두었던 소년.

그러나 먼 훗날, 부자와 결혼을 앞둔 쉬잔을 두고 사티가 몽마르트르를 떠나려고 할 때

함께 가게 해 달라며 사티에게 매달렸던 소년. 그 소년이 훗날 ‘몽마르트르의 화가’라고 불렸던,

몽마르트르에서 살고 몽마르트르에서 죽은 화가 위트릴로이다.

그는 어머니 쉬잔을 사랑했지만 쉬잔은 평생 그를 냉대했다.

그러나 위트릴로에게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한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위트릴로는 어머니 쉬잔을 사랑했고 쉬잔은 사티를 사랑했고

사티는 일곱 살 때 죽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사티와 쉬잔이 헤어진 건 어머니 때문이다. 르누아르의 모델을 하면서 그의 그림을

흉내내기 시작하며 화가의 꿈을 키워 가던 쉬잔은 사티에게 모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들의 동거는 반년 동안 지속된다. 어느 날 쉬잔과 사랑을 나누고 있던 사티는

맞은편 거울 속에서 벌거벗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된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벌거벗은 쉬잔이 “당신, 갑자기 왜 그래요?”라며 묻는다.

그날 이후로 사티는 쉬잔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사티의 초상화를 완성한 쉬잔이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걸 그릴 때 내 몸과 마음이 참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어쩐지 이건 내가 그린 게 아니라, 내 몸 속에 들어온 당신 어머니가 그린 것 같아요.”

헤어지고 두 달 뒤 사티는 쉬잔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소.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이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오.’

그 뒤 사티는 애달프고 슬픈 음악들을 계속 작곡하였지만 한동안

압생트라는 독한 술에 빠져 살았다.

쉬잔은 그녀의 소망대로 프랑스의 표현주의 화가로 성공했다.

사티는 59세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 아르크에 있던 그의 방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 한 묶음이 발견되었다.

수신인은 모두 쉬잔 발라동이었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쉬잔과 그의 아들 위트릴로와 개 한 마리가 나란히 있는.

그리고 뒷면에는 ‘사랑스러운 쉬잔 발라동의 사진’이라는 사티의 고딕 필체가 남아 있는.

이 사진 속에 사티는 보이지 않는다. 사티가 죽은 뒤 이 사진을 건네받은 쉬잔이

개줄을 쥐고 있던 맨 왼쪽 사티의 모습을 도려낸 것이다.

30여 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겨우 배달된 사티의 편지를 받은,

61세의 유명인사 쉬잔은 이렇게 고백한다.

“솟아나는 추억은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지만….”

그 말줄임표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숨겨진 의미 때문에 쉬잔은

사진 속 사티의 모습을 도려내 버렸던 것일까. 쉬잔을 떠올리며 작곡할 때,

사티는 생각했다. 쉬잔을 육체적으로는 소유할 수 없었지만 예술적으로는 가질 수 있다, 라고.

결국 쉬잔에 대한 사티의 예술적 소유는 지금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사티의 음악,

즉 예술로 승화한 것이다. 단 한 번의 연애. 사티가 쉬잔을 만난 건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 때였다.

글: 소설가 조경란


출처 : 진리와 생명의 길로
글쓴이 : 가브리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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