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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스크랩] 순식간에 화사한 꽃밭으로 변한 운동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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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자들이 청군과 백군으로 나눠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
ⓒ 유진택 |
성당에서 행사가 있으면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장형과 나 같은 사람들이 맨 먼저 팔을 걷어붙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날씨가 흐려 야외미사를 취소할 줄 알고 신경 쓰지 않은 것이 큰 실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장형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약간 불만 섞인 목소리가 왕왕 새어 나왔다.
“지금 전화하면 어떻게 해, 난 새벽부터 나와 천막을 치고 있는데.”
“비가 와서 취소할 줄 알았지.”
“성당에서 하는 행사 언제 취소하는 것 봤어. 일단 날을 잡아놓으면 홍수가 나도 취소하는 법이 없다고.”
손바닥만한 운동장엔 각 구역별로 쳐놓은 천막들이 들어차 있어 아주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내가 속한 9구역 천막을 확인하곤 그 안에 짐을 풀었다. 매년 한 번씩 야외에서 열리는 행사라 그런지 신자들 모두 들떠 있었다. 한 시간 동안의 야외미사가 끝나고 바로 벌어질 체육경기 때문이었다.
체육경기라고 해보았자 아주 간단한 종목들이었다. 신자들 대부분이 60세 이상 된 노인 분들이라 체력에 걸맞는 종목들이 대부분이었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주로 하는 줄다리기나 50m 이어달리기 같은 기본적인 종목으로 생각하면 딱 맞았다. 이윽고 야외미사가 시작되었을 때 어렵사리 개었던 날씨가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꽉 채운 구름덩이가 잠깐 벗겨져 드문드문 푸른 하늘을 내미는가 하면 순식간에 구름이 몰려와 소나기를 퍼부을 듯 불안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미사를 보는 중에 정신이 심란하여 견딜 수 없었다. 사방이 숲으로 꽉 들어찬 야산지대라 그런지 한시도 쉬지 않고 울어대는 유별난 새소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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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매말톱(왼쪽)과 땅싸리꽃 |
ⓒ 유진택 |
한 시간 동안의 미사가 끝나고 점심을 먹고 나자 바로 체육경기가 이어졌다. 청군, 백군을 갈라 경기를 진행시킬 목적으로 주최측에서 각 신자들에게 비닐을 잘게 쪼갠 술로 만든 도구를 나눠줄 때 행사는 절정을 이루었다.
청군은 빨간 술, 백군은 노란 술인데 시범 삼아 흔들었더니 운동장이 순식간에 꽃을 피운 것처럼 환했다. 그러나 노인 신자 분들을 위한 경기라 그런지 나 같은 젊은 축들은 재미가 없었다. 경기에 열정적으로 참가해 함성도 지르고 신나게 춤을 추며 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맥빠진 기분으로 앉아 있었더니 내 옆에 있던 신자 분이 한마디를 건넨다.
“저 운동장 뒤편 산자락 숲길을 한번 둘러봐. 참 좋아.”
안 그래도 숲길을 거닐며 꽃바람을 쐴까 하고 생각하던 차에 그 신자의 말이 달콤하게 들려왔다.
나는 사회자의 마이크 소리가 왕왕거리는 운동장을 살며시 벗어나 한적한 숲길로 접어들었다. 마이크 소리가 내 귀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숲길은 호젓하게 다가왔고 한창 연두 빛으로 물든 숲들이 뿜어내는 공기가 마음을 상쾌하게 씻어주었다. 몇 발짝 오르자 숲길 옆에 설치해 놓은 극기 훈련용 기구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통나무로 만든 훈련용 기구들은 아주 다양했다. 스카이점프장, 섬뛰기, 아취건너기, 벼랑건너기, 세줄타기, 로프오르기 등, 그 중에서도 굵은 동아줄을 얼기설기 엮어 허공으로 길게 다리처럼 매달아 놓은 세줄타기 기구를 타고 건너편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줄은 뒤집힐 듯 울렁울렁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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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랭이꽃 | |
ⓒ 유진택 |
야, 저건 하늘매발톱 아니야. 꽃잎을 쫙 펴들고 있는 꼴을 보니 영락없는 매발톱을 닮았군, 꽃잎 좀 봐, 한번 할퀴면 뼈도 못 추리겠는걸, 난 예전에 허공을 둥그렇게 순회하던 매를 제일 무서워했는데, 그 아래 산토끼 같은 힘없는 동물이 있다면 순식간에 채 올렸거든, 저 발톱이야. 영락없는 매 발톱이야.
어라, 저 꽃은 또 뭐람, 싸리나무꽃을 닮았어. 아니, 그보단 아카시아 꽃잎을 많이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 키는 땅에 닿을 듯 땅딸막한데. 아, 그래서 땅싸리군, 우습다 우스워.
오, 저건 또 뭐야, 패랭이꽃, 옛날 천한 사람들이 쓰던 패랭이를 닮았어. 햇살이 쨍쨍 내리쬐면 저 모자로 뜨거운 햇살을 막았거든, 그런데 너무 아름다워, 진분홍의 꽃빛깔이 마음 속에서 사르르 녹을 만치 애절한 색이야. 초등학교 때 등하굣 길에 패랭이꽃하고 말동무하던 기억이 나. 그것을 꺾어 패랭이처럼 쓰고 있는 흉내를 내기도 했었지, 패랭이꽃에 관한 시 한번 들어봐, 얼마나 애절한지, 이향아라는 시인이 쓴 '패랭이꽃 피었다' 라는 시인데 참 좋아.
패랭이꽃 피었다
잊어버렸던 젊은날의 약속을
조용히 일러주며 패랭이꽃 피었다
묵은 정 쇤 정 쏟아 바쳐서
나도 다시 필꺼나
천둥처럼 필꺼나
세월이야 흐르라지
가던 길을 좇아서
해 아래 사는 일이 꿈만 같은 하루
해 아래 얼굴 들어 빛 바래면서
윤유월 염천에 번지는 진홍
나도 다시 필꺼나
무념 속에 필꺼나
옛날에 씨뿌려 둔 패랭이꽃 피었다
아직은 괜한 일에 목울음도 잠기고
아직은 믿고 싶은 몇 마디 말도 있어
저게 나야,
저게 나야,
던져 뒀던 세상의 거리에 나가
소리소리 패랭이꽃 외쳐 피었다
아아, 이번엔 작약이군, 모란처럼 보이기도 해. 사실 난 지금도 작약하고 모란 구별을 잘 못해, 식구들도 마찬가지야. 집 화단에 모란이 피었는데 아직까지 작약으로 알고 있거든, 모란이 이 사실을 알면 보통 서운한 게 아니겠어, 이름을 제대로 불러줘야 그 꽃도 향기를 더 진하게 뿌릴 것 같거든. 구별하기 쉬운 방법이 있더군, 모란은 목본이고 작약은 초본이야.
꽃들과 한참동안 대화를 하고 나서 산길을 걷다보니 시간은 많이 흘러갔다. 그렇지만 운동장과 가까운 야산이라 그런지 경기를 진행시키는 사회자의 마이크 소리는 여전히 산 속에 왕왕 울려 퍼졌다. 신자들이 내지르는 함성소리도 꽉 차 올랐다. 하얀 꽃이 망울망울 뒤덮인 쥐똥나무 숲길을 걷다가 나는 빽빽이 들어찬 신록 사이로 드문드문 스치는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그 때였다. 함성소리와 함께 한꺼번에 손을 흔드는 술들이 빨강과 노랑의 꽃으로 피어났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화사한 꽃밭으로 변해 버렸다. 내가 지금 산길에서 만났던 빨갛고 노란 야생화들이 금세 운동장에서 활짝 피어난 것 같았다. 늘 황토빛 메마른 땅으로 남아 있던 운동장이 오늘만큼은 늦은 봄날의 싱그러운 꽃향기로 가득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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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군과 백군이 힘차게 흔드는 술이 순식간에 피어난 화사한 꽃처럼 보였다 |
ⓒ 유진택 |
출처 : 겟세마네
글쓴이 : 유진택 스테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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