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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배추 끌텅

휘수 Hwisu 2006. 12. 16. 11:21
이기갑
kiglee@mokpo.ac.kr
서울대 언어학과 졸, 동대학원 석·박사
국어문법학, 국어방언학, 국어담화론 등 전공 / 현 목포대 국문과 교수

배추 끌텅

점심 무렵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오늘 김장을 하는 날이니, 와서 점심을 먹으라는 말씀이시다. 올해 여든 여섯인 어머니는 아직도 홀로 김장을 하신다. 며느리래야 다들 직장에 다니느라 아무런 보탬이 못 되니, 그저 당신 손수 젓갈도 준비하고, 배추도 사서 절이고 해서 드디어 오늘 버무리시는 모양이었다.

김장은 흔히 겨울 농사라 하지 않는가?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때는 김장이 집안의 커다란 행사였다. 우선 백여 포기가 넘는 배추를 사들이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때에 따라서는 밭에 가서 직접 배추를 뽑아 손수레로 집에까지 운반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사실 김장의 본격적인 단계는 사온 배추를 씻고 절이는 일이었을텐데, 이때부터는 우리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었으므로 특별히 생각나는 것은 없다. 그저 우물가 가득히 절여 놓은 배추가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던 기억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양념과 멸치젓을 섞은 소를, 절인 배추에 버무리는 것이 김장의 전부인 줄 알았지만, 사실 그 이전의 작업이 훨씬 고된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온 가족이 동원되어 담근 김장 김치는 이웃과 으레 나눠 먹곤 했는데, 그래서 김장철이면 온 이웃의 김치 맛 품평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제 옛날처럼 그렇게 많은 김치를 담그는 집은 없다. 그저 당장 먹을 정도의 양이면 충분한 것이다. 더구나 가게에서 절인 배추를 아예 사다 김장을 하는 수도 있으니, 주부의 고생도 그만큼 덜게 되었다. 이웃과 서로 오고가는 일이 많지 않은 터라 김치를 돌리는 일도 드물게 되었으니, 솜씨 없는 주부들은 특별히 염려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김치 냉장고'라는 세계에 없는 특별한 냉장고가 개발된 뒤로는 김치 항아리를 땅에 묻을 필요도 없게 되었다. 문득 팔순 노모가 버무린 김장 김치를 한 입 가득 넣으면서, 파파 할머니가 되어 버린 어머니의 모습처럼 김장의 풍속도 전혀 달라졌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밭에서 뽑은 배추는 그대로 소금에 절일 수는 없다. 벌레 먹은 잎사귀는 솎아 내야 하고, 흙이 묻은 뿌리는 칼로 베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베어 낸 배추 뿌리는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다. 물에 씻어 그대로 먹어도 달콤한 맛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라도에서는 배추의 뿌리 윗부분을 따로 '끌텅'이라 부른다. 표준말로 한다면 '그루터기'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루터기는 흔히 나무나 곡식 등의 베어 내고 남은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끌텅'은 나무, 곡식뿐 아니라 배추와 같은 채소에도 쓰일 수 있는 말이라는 점이 다르다. 심지어는 사람의 이뿌리를 가리킬 때에도 이 '끌텅'을 써서 '이빨 끌텅'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자어 '발본색원(拔本塞源)'의 '本'에 해당하는 것도 바로 이 '끌텅'이다. 그래서 '부패의 끌텅부텀 뽑아 붑시다'라는 전라도식 구호도 가능할 것이다.

'끌텅'과 '그루터기'는 어원이 같다. 표준말에서 '그루터기'의 '그루'는 '나무나 곡식의 줄기 밑동'을 가리키고, '그루터기'는 '자르고 남은 밑동'을 가리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전라도말에서 '끌텅'은 이 두 경우에 함께 쓰인다. 전라도말의 '끌텅'은 서 있는 나무의 '그루'를 가리킬 수도 있고, 베어낸 뒤에 남은 '그루터기'를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태적으로 '끌텅'은 '그루터기'에 대응한다. '그루'는 옛말에서 '그릏'으로 나타나는데, 『월인석보』에 '이운 그르히 잇거늘'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래서 '그루터기'는 아마도 '그릏'과 '더기'라는 말이 합해진 '그르터기'에서 오늘의 '그루터기'로 변했을 것이다. 전라도말 '끌텅'의 '끌'은 바로 '그르'가 줄어든 것이다.

마치 접속어 '그리고'를 '글고'처럼 말하듯이 '그르'가 '글'을 거쳐 '끌'로 변했던 것이다. '그루터기'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강원도의 '글테기'나 경상도의 '끌터리', '끌티기', '껄때기', '껄띵이', 충청북도의 '끌턱'에서 보이는 '글', '끌', '껄' 등은 모두 '그르'가 줄어든 것으로서 전라도말의 '끌'과 같은 것이다. '그르'에 표준어는 '더기'를 결합시켰지만 전라도말에서는 '덩'이 결합된 것이 다르다. 즉 '그릏 + 덩'이 '그르텅'이 된 뒤 다시 음절이 줄어들어 '글텅'이 되고 첫소리가 된소리로 변하여 오늘의 '끌텅'이 된 것이다.

오늘날 '배추 끌텅'은 먹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배추의 종류가 달라져서, 먹을 만큼 큰 끌텅을 가진 배추를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일식집에서는 특별히 재배된 배추에서 얻은 끌텅이 귀한 안주로 나오기도 한다. 옛날에는 김장 때면 누구나 먹을 수 있었던 이 끌텅이 어느새 귀한 음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출처 : 夢中自遊人
글쓴이 : 自遊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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