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적인 휴머니즘으로 포장된 영화나 소설은 우리에게 실제로 그런 인간적인 감동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뜨리게 하는 환각제에 불과하다.
그렇듯이 현실은 언제나 100%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다. 진실도 없고 미학도 없는 사이비 휴머니즘이 도처에 있다. 그것은 이상한 형태로, 그동안
우리를 현혹해왔다.
담배연기 자욱한 영화 [스모크]는 그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 사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다. 분명 대단히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고나면 남는 것이 있고,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 때 다시 한 번더 보고싶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를 것이다.
웨인 왕 감독은 타란티노가 아니다. 그는 서로 다른 다섯명의 이야기를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나누어서
다섯가지 다른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 모두를 연결하는 장소는 오기의 담배가게, 그들은 담배 한 모금의 연기가 얼마나 무거운 것일까에 관해서
생각해 본다. 모두들 가슴 아픈 상처를 마음속에 숨기고 있지만 담배를 피우는 순간만은 속이지 못한다. 그리고 그 상처가 ‘스모크’로 공기 속에
퍼져 나간다. 고통은 무게가 아니라 숨쉬며 살아가는 일상생활이다.
강도로 변한 행인이 백주대낮에 거리에서 어떤 이의 아내와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생명을 앗아가고, 그로 하여 평생토록 한 남자가 방안에 처박혀 사람들을 멀리하게 되는 곳. 아버지를 증오하고 또 간절히
그리며 반쪽의 기억 없이 자란 착한 소년이 길거리에서 횡재한더러운 돈을 보듬고 자신의 유일한 미래라고 자연스레 내뱉게 되는 곳. 낡은 어릴
적 사진을 지갑 깊숙히 꼭꼭 넣고 다니던 거리의 아이가 구멍가게에서 잡물을 훔치고 달아나다 어느날 그 기억의 짜투리마저 잃어버리고 마는 곳 .
아리따운 소녀가 마약에 중독 되고 그 몸뚱아리에 붙은 아이를 지우고 다시 비틀린 쓰레기 같은 방에서 찌들어 가는 곳. 구석구석 이런 이야기들을
숨기고 있는 곳 브룩클린. 거기 한 길가 모퉁이에 하비케이틀은 오기라는 이름으로 터줏대감처럼 들어앉아 있다.오기는 이 동네와 사람들에게 빚진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지는 이 남자의 사연 많은 과거만큼이나 알 수 없지만, 그가 매일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지점에서 셔터를 눌러 담아
내는 ‘기록’은 그의 부채를 갚아주는 듯하다.
스모크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꾼인 오기는 하비케이틀의 입을 통해서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들려주고 얇은 입술이 클로즈업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 다음 뒤로 물러난 카메라에 담배를 잡고 알듯말듯한 미소를 띠며 마주한 오기와 풀이
보인다. 두 사람은 이 이야기에 관객들이 빠져 있는 동안 어느새 친구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담배를 사고 길을 걷고
사람을 만나지만 인생은 그 누구에게도 관대하지 않다. 사람들은 사람들의 세상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받기도 한다. 사람들의 오랜기억 뒤엔
분명히 한 두가지의 슬픔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모크]는 사람들의 상처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상처를 덮어줄 따뜻한 이해와 용서를
이야기 하고 있다.
[스모크]는 단 한 명도 정상적인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던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를 생각하게 한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브룩클린의 사람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브룩클린으로 가는 ...]가 보여주었던 처참한 비애와
[스모크]의 따듯한 인간애는 손을 마주 잡고 있는 것처럼 가깝게 다가 서 있다 담배와 카메라와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있는 [스모크]는
언제나 찾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다.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로 가득찬 화면을 통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낯설지 않은 이유는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14년간 매일 아침 8시에 같은 장소를 찍는 주인공은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일상의 소중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놓쳐버린 한순간 한순간의 아름다움들이 아쉽게 느껴진다. 영화 [스모크]를 기억할 때마다
지금도 시차가 다른 지구 반대편 그 속에서 여느 날처럼 사진을 찍을 그 남자를 우선 떠올리게 될 것이다. 또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그는 늘
그렇게 거기 있을 것이다.
황인철/시인
출처, 시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