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이어령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일본에서 근 1년 집필 작업을 끝내고 돌아온 직후여서 화제에
올릴 사연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는 ‘세상의 끝’을 향한 불길한 기운을 보고 온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참으로 몇 년
전 세기말 현상 속에서 지겹도록 듣던 말을 세기초에 만나는 느낌은 남달랐습니다. 어어령하면 우리 나라에서는 문명의 흐름을 읽는 독보적 석학으로
자리한 인물 아닙니까. 그가 본 세상의 끝을 예고하는 징후가 궁금했습니다.
그 답은 다름 아닌 ‘가족 해체’-. 너무
평범하다구요. 특히 그 다음 얘기가 일본에서 불고 있는 ‘욘사마 신드롬’(드라마 <겨울 연가>주인공 배용준 바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별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할 만했습니다.
“남편을 둔 멀쩡한 중년의 주부가 ‘배용준이 방금 이 앞을 지나갔다’며 울고
부는 모습이 믿기지 않더라. 그것은 가족이 무너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 다음은 뭔가. 불길하게도 우리가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문명의 붕괴가 아닐지 모르겠다.”
이어령 선생님의 이런 발언에 저는 내심 놀랐습니다. 요즘 저 머리를 맴돌고 있는 화두가 문명의
붕괴거든요. 대개는 터무는 없는 가설 정도로 간주하기 십상입니다. “이 화려하고 거대한 문명이 어찌 무너진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정도의
멘트가 고작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금도 해석이 되지 않고 있는 고대 잉카나 마야 문명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레이저와
컴퓨터에 준하는 첨단기술로 건설된 것으로 평가되는 그 문명은 지금 폐허로 남아있고 그 문명을 건설하고 누렸던 주체는 베일?가려진 채
그대로입니다. 오죽하면 우주인이 만들었거나 그들의 습격에 의해 무너졌을 것이라고 할까요.
어느 시대든 문명은 담당한 주체들은
당시로선 최첨단의 기술을 구현했을 터입니다.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원시라는 단어가 어울릴지 몰라도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거죠. 하지만
경제력의 장기침체든, 급작스런 고령화든, 아니면 자연재앙이든, 그 무슨 요인에 의해 이미 일으켜세운 시설과 제도를 관리할 수 없게 됐을 때
그것은 폐허가 되고 맙니다. 가령 그것이 수년 혹은 수십년이 아니라 수백년에 걸쳐 서서히 다가온다면 아무도 맞설 수 없는 재앙이 되고 맙니다.
저는 요즘 그 현저한 요인 중 하나로 복잡계를 생각합니다. 반도체 기술개발이 몰고온 인터넷과 이동통신으로 인한 삶의 변화는 가히
혁명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존 학문의 이론과 체계로 설명되지 않는 사연이 너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복잡계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다름 아닌 단순화의 후유증으로 풀이합니다. 아이작 뉴턴 (1642∼1727) 이후 근대학문은 복잡한 현상의 배후에
깔린 법칙과 규칙을 규명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심지어는 이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해 공식으로 만들기에 익숙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유행하는 복잡계는
그 반작용이라는 거죠.
1990년대말 일본의 시오자와 요시노리(鹽澤由典, 오사카시립대 경제학) 교수는 '복잡한 것은 복잡하게
해명하자'는 것을 요지로 <왜 복잡계 경제학인가>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지식 패러다임의 대전환'이라는 책의 부제에서 알 수 있듯
단순 경제서가 아니라 물리, 화학 등 과학은 물론 철학분야까지 아우르고 있는 책입니다.
그에 의하면 '복잡계' 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국 뉴멕시코주 소재의 산타페연구소를 정점으로 최근 10여년 사이 개별 과학을 넘어선 하나의 학문운동으로 번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산타페연구소는 로스앨러모스 국립과학연구소의 화학자 조지 카우언과 노벨 물리학상의 머레이 겔만 및 필립 앤더슨, 노벨 경제학상의
케네스 애로 등이 참가해 지난 1984년 설립한 비영리단체 (NPO)입니다. 1984년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열린 '복잡함과 과학의 실천'
심포지엄 역시 복잡계 논의의 기폭제였습니다.
여기서도 세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맨프레드 아이겐, 일리야
프리고진(이상 화학상), 허버트 사이먼(경제학)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특히 프리고진이 주도한 '복잡함을 배운다-태어나고 있는 패러다임'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등은 복잡계를 철학 혹은 사상으로 확산하는 계기를 만든 것으로 유명합니다.
복잡계 연구를 위한 구체적인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최근 유행하는 카오스 (혼돈), 프랙탈(형상), 퍼지(법석), 카타스트로피(파국) 이론 등입니다. 시오자와는 이들을
경제현상으로 끌어와, '대상, 주체, 인식의 복잡성' 이라는 세가지 양상을 복잡계 경제학의 기본원리로 삼고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시야,
합리성, 활동작용의 한계' 를 거론하면서 새로운 이론의 틀을 완성해 갑니다.
종래 경제학의 전제는 경제주체의 '무한 합리성' 과
'규모에 대한 수확체감의 법칙' 에 근거한 균형이론입니다. 하지만 이는 불규칙한 상호 인과관계를 무시한 단순화의 결과일 뿐, 이미 현실과는
상반된 가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니다. 대신 시오자와는 합리성의 상실과 기술진보, 정보화 등으로 인한 수확체증 현상을 새로운 두개의 전제로
내세웁니다. 그러면서 그는 복잡성에 대한 최소한의 대응책으로 분산화와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문득 떠오르는 것은 고고학자 조지프 테인터의 언급입니다. "과거 문명의 붕괴는 복잡성에 대한 통제실패와 같은 선상에 서 있다" 는 지적 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문명의 붕괴> (대원사 펴냄, 1999년)라는 책에서 번영의 정점에는 기존 질서를 해체시키는 '복잡성' 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거기가 바로 지속가능한 발전의 한계점이라는 거죠.
테인트에 의하면 복잡성은 사회적 이질화와
동의어로서 그런 사회는 팽창과 혼란의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회적 유지비용을 증대시키고 결국에는 한계비용이 한계수익을
넘어서는 점에 이르고 만다는 논리입니다.
이로부터 붕괴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채집 공동체뿐 아니라 거대한 제국에 이르기까지
예외없이 반복적으로 일어나지만 아주 복잡하게 조직된 사회일수록 붕괴의 속도는 더 급작스럽습니다. 테인트가 진단하는 첫 조짐은 사회의 기본 틀을
유지하는 권력인 ‘중앙으로부터의 이탈 현상’입니다.
이 때를 기해 중심 권력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주변으로 이탈하려는 사회집단의
움직임이 가시화합니다. 함께 드러나는 붕괴의 요인들은 갈등, 모순, 과오의 상황 반복, 사회적 기능의 마비, 신비주의적 요소 대두, 우연적
사건의 누적적 악순환 그리고 종국에는 경제로부터 시작된 파멸입니다. 서로마제국, 마야제국, 그리고 차코사회 (뉴멕시코 북서부 산후안 분지의
문명사회) 의 붕괴가 바로 그러했다는 게 그의 분석이기도 합니다.
붕괴와 문화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부분에서는 상당한 논란의
소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테인터는 문명이라는 단어를 폐허와 접목시키길 즐기는 세인들의 습관을 먼저 지적하면서 역동성을 갖는 '문화' 의 곪아터진
형식이 바로 '문명' 이라는 분석가들의 지적을 거론합니다. 역사학자 슈펭글러의 말로는 "오늘날 예술활동은 무기력과 허위에 불과하다" 는 것.
테인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재화생산에 투입돼야 할 자원이 예술이나 비생산적 지식분야에 전용될 때 체제는 문명은 약화와
붕괴의 길을 걷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패와 퇴폐성으로 인한 '문화적 피로'는 같은 맥락에서 나옵니다.
오늘(현대)의 붕괴론에
대해 테인트는 어떤 관점을 취할까요. 그는 "붕괴는 단절이 아니라 또 다른 문명의 생성을 의미한다"는 사회학자 피트림 소로킨의 말과 물리학자
막스 플랑클의 "과학적 진보가 이뤄질 때마다 더 힘든 과업이 나타난다"는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습니다.
“어차피
인간사회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만들어진 조직이다. 낙관/비관론의 향방은 지금 우리에게 유예된 시간의 활용 여부에 달려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복잡계를 일컬어 수리과학의 새로운 유행현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경솔해 보이는군요. 종말을 예고하는 신호를 그냥 새 경향 정도로 치부하는
것이 아무래도 위태롭기만 합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의 복잡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터입니다. 바로 그것을 체계화하려는
노력이 바로 복잡계 학문입니다. 그런데 복잡함으로부터 문명의 붕괴가 시작된다는 주장에 일견 동의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요. 도시 문명을 버리고 시골로 떠나는 행렬이 그 징후를 먼저 읽은 소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듭니다. 그 곳의
단순계에서 복잡계의 해법이 발견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아마 너무 낭만적인 기대일 게 분명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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