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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할머니였다 (펌)

휘수 Hwisu 2006. 2. 19. 00:07
선덕여왕은 할머니였다
 
삼국유사 이혜동진조(二惠同塵條)에 지귀설화가 있다. 평소 선덕여왕을 사모하던 지귀는 여왕이 영묘사(靈廟寺)에 온다는 말을 듣고 탑에서 기다린다. 지귀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절에 온 여왕은 지귀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팔찌를 두고 간다. 잠에서 깬 지귀는 여왕이 두고 간 팔찌를 보고 심장이 타올라 그 불이 탑을 태우고 절까지 태웠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아리따운 여왕을 상상할 것이다. 그리고 팔찌를 두고 간 여왕의 자상한 성품을 그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할머니가 다 되어 왕이 된 것이다.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는 선덕여왕을 기리는 숭모전이 있다. 이처럼 그 공덕이 추앙되고 있지만 선덕여왕에 대해선 베일에 싸인 부분이 많다. 특히 몇 살에 왕위에 올랐는지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평왕(재위 579~632)이 아들을 두지 않고 돌아갔다고 되어 있다. 대신 세 딸이 있었는데 맏딸은 덕만(德蔓) 훗날 선덕여왕,두째딸 천명(天明)은 김춘추의 어머니,막내딸 선화(善花)는 훗날 백제 무왕과 결혼한다.선덕여왕의 나이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아버지의 재위기간으로,진평왕은 무려 53년 동안 통치한다.
 
진평왕이 죽고 선덕여왕이 즉위한 해는 632년, 이 해를 중심으로 주변 인물을 통해 여왕의 나이를 추정해 보면,선덕여왕의 조카인 김춘추는 603년에 태어났다. 그렇다면 선덕여왕이 즉위한 632년 김춘추는 서른 살이다. 김춘추의 어머니이자 선덕여왕의 동생인 천명부인의 나이도 짐작할 수 있다. 천명부인이 최소한 스무 살에 김춘추를 낳았다고 가정해 보자. 언니가 왕위에 올랐을 때 아들이 서른 살이라면 천명부인은 쉰 살이 된다. 왕위에 오를 당시 동생이 쉰 살이었다면 선덕여왕도 이미 쉰 살이 넘었을 것이다. 덕만공주는 할머니가 다 되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선덕여왕이 결혼을 했는지도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선덕여왕의 결혼과 남편의 이름까지 거론한다. 선덕여왕의 남편은 음갈문왕(飮葛文王)이다. 갈문왕은 왕과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붙는 명예호칭으로, 왕과 왕비의 아버지나 동생,그리고 여왕일 경우는 남편에게도 붙는다.
 
선덕여왕은 내정에서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고 구휼사업에 힘썼으며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였다. 자장법사(慈藏法師)를 당에 보내어 불법을 수입하였으며, 첨성대(瞻星臺), 황룡사 구층탑(皇龍寺九層塔), 분황사 모전석탑(芬皇寺模塼石塔)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분황사 모전석탑                                     첨성대
 
삼국사기는 선덕여왕의 성품을 관인명민(寬仁明敏)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도량이 넓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다는 뜻이다. 왕이 되기에 충분한 자질이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왕의 통치에 저항하는 세력도 있었을 것이다. 647년 비담(毗曇) ·염종(廉宗)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왕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 반란의 와중에서 선덕여왕이 죽는다. 그리고 여왕의 사촌 여동생인 승만(勝曼)공주가 바로 왕위를 잇는데 그녀가 두 번째 여왕인 진덕여왕(재위 647~654)이다.
 
선덕여왕릉
 
 *참고문헌: 역사스페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