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삶, 무한 욕망과의 유한 경주 - 유하론 / 김수이 본문
현대문학 2001 년 4 월호
삶, 무한 욕망과의 유한 경주 - 유하론 / 김수이
1. 이야기의 주체의 자의식과 시의 주체의 자의식
먼저 한 편의 소설에 관해 이야기하자. 움베르토 에코의 역작 『전날의 섬』은 <살아남으려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하나의 문장을 위한 긴 수사(修辭)와도 같다. 소설의 주인공 로베르또는 날짜변경선 근처의 바다를 표류하면서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이 24시간 전의
<전날의 섬>임을 알게 된다. 그가 떠나온 현실세계는 거리상으로는 얼마 떨어져 있지 않지만, 24시간 전의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고 있다.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있을까? 이 막막한 귀환을 꿈꾸며 로베르또가 현재의 삶을 견디는 방법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낯선 세계에 던져진 한 고독한 인간은, 파탄의 운명에 맞서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쓰고 상상의 날개를 퍼덕여 소설을 쓴다. 이런 그에게 이야기란 과거/현재, 현실/상상, 삶/죽음의 경계에서 그 빗금을 지우고, 이야기 주체의 열망에 따라 세계를 재구성하는 욕망의 장이 된다. 『전날의 섬』은 이야기꾼이 탄생하는 계기와 현장을 생생히 보여 주면서, 이야기가 삶을 지속시키고 죽음을 저지하는 힘이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주체의 욕망과 기획이 투영되지 않은 이야기란 없다. 마찬가지로, 시적 주체의 욕망과 기획이 스며들지 않은 시도 존재할 수 없다. 에코의 소설이 확인시켜 주는 것처럼 이야기의 주체의 욕망의 뿌리에 <죽음>이 가로놓여 있다면, 시의 주체의 욕망의 심지에는 <생>이 스며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야기의 주체가 죽음을 저지함으로써 조금씩 생을 확보해 나간다면, 시적 주체는 생의 결핍을 삶[生]으로써 조금씩 죽음을 밀어낸다. 또한 이야기의 주체가 언제나 <영토>의 넓이를 염두에 두는 데 비해, 시적 주체는
<빈 구멍>의 깊이를 계속해서 의식한다. 이야기의 주체가 현재의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전날의 섬>까지를 영토화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면, 시적 주체는 있음이 아닌 없음과 소유가 아닌 상실을 <누리며>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근래의 우리 문학에서 이야기 주체의 자의식과 시적 주체의 자의식은 서로 뒤섞이는 양상을 보인다. 신경숙, 구효서, 윤대녕, 전경린, 한강 등의 소설가들은 시의 호흡을 소설 속에 내면화하며, 김혜순, 김기택, 함성호, 유하, 김선우 등의 시인은 이야기의 입자를 시의 중력으로 흡수하고 있다. 이야기의 주체가 시의 <빈 구멍>을 들여다보고, 시의 주체가 소설의 넓은 <영토>를 배회하는 역전의 현상은 실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지난 몇 년 간 소설가들은 황폐한 세계에 촉촉한 습기를 주려 했고, 시인들은 그 세계에 거주하는 자의 텅 빈 존재감에 생생한 질감을 부여하고자 해 왔다. 하지만 그 결과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더 많이 노출하고 있는 듯하다. 전시대에 비해 소설의 영토는 오히려 축소되었고, 시의 빈 구멍은 간혹 잡다한 내용물로 채워져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다시 에코의 화법을 빌면, 오늘의 우리 문학은 욕망의 날짜변경선을 넘어 문학의 태생지인 <전날의 섬> 근처를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러한 문학 현실에서 유하의 존재는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유하는 이야기와 시의 혼혈이 강하게 나타나는 시인이며, 이야기의 자의식과 시의 자의식을 팽팽하게 견지한 작가이다. 그는 무림과 압구정동과 경마장을 떠돌면서 갖은 이야기를 쏟아 내고, 하나대와 지중해와 추억의 장소 앞에서는 섬세하고 미려한 음률을 조율한다. 자본주의의 문화의 본질이 욕망임을 간파하는 한편, 문화적 욕망의 반대편에 있는 자연과 사랑의 삶에 대한 갈망을 멈추지 않는다. 유하는 자본주의가 낳은 욕망의 문화와 문화적 욕망의 비판자인 동시에 향유자이다. 일찍이 김현이 유하를 두고 <키치 중독자이자 키치 반성자>라고 진단한 것은 앞으로 쓰여질 모든 유하론의 기본 전제가 될 것이다.
유하의 공적은 <소비하는 인간>으로서의 현대인의 일상과 욕망을 낱낱이 드러낸 점에 있다. 그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 유하는 소비사회의 언어와 풍광을 그대로 빌려 온다. 더 정확히는, 그가 바로 욕망하고 소비하는 인간이기에 그 실상을 그대로 시로 옮기며, 이 과정에서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거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낸다. 유하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욕망의 풍차>1)를 돌리는 한 줄기 <바람>2)이자, 그 풍차에 대적하는 돈키호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반성하는 돈키호테이다. 그는 욕망의 극점을 향해 무모하게 돌진하는 듯 보이지만, 그 욕망에 함몰되지는 않는다. 욕망의 풍차는 그에게 이미지가 아닌 실체이며, 풍차와의 싸움은 한바탕의 혈전이 아닌 장기간의 대치전이 된다. 이 긴장의 본질은 욕망하는 자아의 욕망의 기원에 대한 통찰과 자기 부정이다. 욕망하면서 그 욕망을 경멸하는 것, 욕망의 점멸(點滅)과 함께 on/off를 반복하는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는 것, 욕망이 존재와 삶을 어떻게 말살하는가를 끊임없이 발설하는 것, 이것은 유하가 지닌 이야기꾼으로서의 천품이다. 유하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위협해 온 죽음 3)에 자본주의의 욕망이라는 덕목을 하나 더 추가한다. 자본주의가 양산한 잉여의 욕망들이야말로 진짜의 죽음에 맞먹는, 존재의 근거를 사멸하는 무서운 힘인 까닭이다. 자기의 지속을 위해 자기를 거는 이야기꾼의 운명은 흥미롭게도 우리 시단의 아웃사이더인 유하에게서 돌출된다.4)
그는 [오직 죽음만이, 이 저주받은 이야기꾼의 운명을 / 정지시켜 줄 수 있다](「천일馬화명마 포경선」)고 말한다. 죽음을 저지하면서 삶을 확보하는 이야기꾼의 운명은, 현대사회의 무한 욕망의 틀 속에서 그에게 <저주받은>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유하는 죽음이 현실의 유일한 탈출구가 된 상황에서 저주받은 이야기꾼의 운명을 탄식하되 회피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그의 내부에는 시라는, 끝내 도달하고픈 생의 매혹이 자리잡고 있어 이 저주받은 운명을 견디게 한다. 기발한 악담과 요설로 시의 정체성을 흔든 유하는 이야기꾼/시인의 2인 역할을 하며 이 세계의 음험한 배후를 폭로한다.
2. 압구정동은 없다?
독자들에게 유하는 대체로 <압구정동>과 <하나대>의 양자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압구정동의 이미지가 보다 우세하기는 하나, 이러한 분리는 유하의 시가 지닌 태생적인 이원성에 기인한다. 두 개의 공간 중, 압구정동은 자본주의의 욕망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작용하는 현재의 공간이다. 이곳은 현실 체제와 시의 권위를 함께 공략하는 전략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의 역할을 한다. 둘째로, 하나대는 자연의 충일함으로 가득한 과거의 공간이며, 내면의 근원적인 처소이자 유하의 경험적인(선험적이 아닌) 유토피아에 속한다. 하나대는 유하가 끊임없이 되찾기를 원하는 <오래된 미래>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몸은 압구정동에, 시공을 넘어선 마음은 하나대에 속해 있는 분열의 양상은 유하가 지닌 이야기꾼과 시인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낸다. 한쪽에는 무협지와 삼류 영화와 유행 상품 등의 <세속의 환타지>에 대한 갈증이, 다른 한쪽에는 채울 수 없는 영혼의 노스탤지어가 숨쉬고 있는 것이다. 이 분열을 뒤집으면 안쪽에는 의외로 <통합>이 박음질되어 있다. 농경사회와 산업사회를 함께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 분열은 살아오면서 보아 온 익숙한 두 개의 풍경에 다름아니다. 도시의 거리를 오가면서 하늘의 별빛을 동경하고, 상품과 유행에 목말라하면서 무욕의 자연을 갈망하는 것은 20세기 중․후반을 산 사람들의 모순되면서도 서로 충돌하지 않는 내면 풍경이다. 이는 특히 유하가 <이소룡 세대>라 칭한 60년대산 세대들에게 두드러지는 감각으로, 이들에게 이 이중적인 가치는 경험적으로 체화되어 있다.
유하는 <세속의 환타지>를 갈망할 때도 자연과 영혼의 음률을 잊지 않는다. 그는 자연과 영혼의 방랑에 한껏 매료될 수는 있어도(『세상의 모든 저녁』(1993),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1999)), 무림이나 압구정동․세운상가․경마장에 자신을 통째로 내맡기지는 못한다(『무림일기』(1989),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991),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1995), 『천일馬화』(2000). 유하에게 세속의 공간은 일상과 현실의 층위에서는 전체성을 획득하지만, 내면과 세계의 층위에서는 부분에 국한된다. 이러한 이중적 세계 인식은 첫 시집 『무림일기』에서부터 뚜렷하게 나타난다. 유하가 파격적인 유희의 시인으로 이미지가 굳어진 것은, 그가 문화적으로는 널리 퍼져 있되 문학적으로는 철저히 소외된 대중문화의 세계를 처음으로 시에 등록했기 때문이다. 이는 대량소비사회의 복제기술이 낳은 소비적 예술을 반성하는 <문화적 현실주의>5), 혹은 황지우의 풍자적 요설이 지닌 낭만적인 극적 제스처나 최승호의 문명 비판에 나타나는 비극적 전망보다 <훨씬 건강한 상식주의>6)로 지칭된 바 있다.
유하의 시에 등장하는 무협지, 영화, 만화, 포르노 등의 키치적 언술은 항상 이면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유하는 키치를 즐기고 반성하는 차원을 넘어 키치적 언술 위에 이 시대의 역사, 정치, 사회적 의미를 겹쳐 놓는다. 유하는 키치를 키치 자체로보다는 당대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상징적 장치로서 시에 유입한다. 유하의 재기발랄한 무협담이나 만화, 포르노에 관한 언술들은 현실의 풍경이 함께 부각되면서 선명한 하나의 몽타주가 된다. 유하의 키치시란, 정확하게는 키치의 어법을 빈 상징적인 정치시이며, 사회비판의 풍자시인 것이다.
그 무렵 하남 땅에선 민초들의 항쟁이 있었다
아, 이름하여 하남의 대혈겁
광두일귀는 공수무극파천장을 퍼부어 무림잡배의 폭동을
무사히 제압했다고 공표 무림의 안녕을 거듭 확인했다
그날은 꽃잎도 혈편으로 흐드러졌고 봄비도 피비린내의 살점으로 튀었다
이 엄청난 혈채를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가
무력 19년 가을, 광두일귀는 숭산의 영웅대회에서 잔혼귀존 폭풍마독등과 형식적인 비무를 거친 뒤 무림맹주의 권좌에 등극하였다
―「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무림일기 1」 중에서
<광두일귀>가 <하남의 대혈겁>으로 [무림잡배의 폭동을 무사히 제압하]고 [무림맹주의 권좌에 등극하]는 과정은 광주민주화항쟁을 무협소설의 화법으로 그리고 있다. 이 시는 무협소설의 문체를 빌려역사의 비극을 낯설고 희화적인 모습으로 패러디한다. <무력 19년>은 독재정치의 연혁을, <광두일귀>는 5공화국 시대의 권력자를, <공수무극파천장>은 공수부대의 무력 살상을 비유하면서 독자에게 파행의 역사를 조롱하는 쾌감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이 시가 제시하는 무협소설과 광주항쟁의 몽타주 기법은 현실의 다른 영역에서도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단속반이 뜨면 헉헉대는 화면은 잽싸게 / 보도본부 24시로 바뀌지 / 오늘도 반복되고 있을 포르노와 뉴스 / 그 충돌의 몽타아즈](「파리애마영화사회학」)에서 보듯, 몽타주 기법은 두 개의 장면을 선명히 대비하면서 반응의 강도를 극대화한다. 포르노와 뉴스의 몽타주는 성과 정치라는 이질적인 영역이 모두 <주입>식의 억압적인 체제임을 실감하게 한다. 유하는 대중문화의 텍스트와 현실 사회의 실상을 겹쳐 놓는 패러디와 몽타주 기법을 통해 그가 생각하는 문학의 목적을 압축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형, 소설은 현실의 복사가 아니잖소? 절제가…
무슨 닭뼈다귀 같은 소리냐
무협소설은 무림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그 뜻이 있어
내일도 모레도 애 꿎은 자들
몇 백 명 더 죽어야 내가 쓰는 무협지가 끝이 날지……
―「무협지 작가와의 대화무림일기 2」 중에서
이 시로 미루어 <소설은 현실의 복사>이며, <무협소설은 무림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 그 뜻이 있다.> 무협소설은 현실세계를 비추는 사실적인 거울의 역할을 한다. 나아가, 무협소설의 상상적 무대인 무림은 오늘의 한국의 상황이 투영되는 순간 실제의 현실이 된다. 대학 입시에 혈안이 된 <무림고교>는 서양에서 온 <정통종합검법>을 가르치고(「정통종합검법」), 미모의 여검객 <홍낭자>는 <절륜한 면도검법>으로 퇴폐이발소를 운영하며(「중원무림 태평천하」), 혼탁한
<중원>에는 <愛夷酒 환자 일만 명>(「오늘의 전서구무림일기 5」)이 불치병(에이즈)에 신음하고 있다. B급 문화의 텍스트와 실제 현실의 넘나듦은 무협소설에만 머물지 않는다. 만화영화 좥요괴인간좦의 주인공 <베라>는 은폐된 <진실(vera)>과 짝을 이루고(「태풍속보」), 정의의 사이보그 로보캅은 부패한 <사이비오그 경찰>과 대비되어(「로보캅 영화사회학」)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무림일기」와 「영화사회학」 연작에 반영된 현실은 유하에게는 적대적인 타자로 인식된다. 폭력으로 점철된 한국의 현대사와 모순에 찬 사회상은 가차 없는 풍자의 대상이 되며, 대중문화의 텍스트는 이러한 세계의 부정성을 파헤치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이와는 달리,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 실린 「압구정동」 연작에서 주체와 타자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으며, 폭로 또한 유쾌하지만은 않다. 소비사회의 욕망의 작동방식을 분해한 이 시편들에서 유하는 비판의 주체이자 대상이 된다. 자본주의의 욕망의 구조를 해체하면서 자신 역시 하나의 부품임을 깨닫는 일은 그에게 깊은 허무를 안겨 준다. 유하는 <욕망의 통조림 공장>인 <압구정동>의 실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는데,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대중문화가 욕망을 가르쳐주는 기계라면 압구정동은 욕망의 찌꺼기나 폐기물로 붐비는 쓰레기통]7) 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가 말하는 압구정동은 [협의의 압구정동이 아닌 광의의 압구정동]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이렇게 볼 때, <압구정동>은 1980년대부터 한국에 본격화된 거대소비사회를 축소한 상징이며, 자본주의가 욕망의 전략을 통해 대중을 지배하는 권력 실현의 장(場)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다
국화빵 기계다 지하철 자동 개찰구다 어디 한번 그 투입구에
당신을 넣어 보라 당신의 와꾸를 디밀어 보라
(…)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오, 욕망과 유혹의 삼투압이여
자, 오관으로 느껴보라, 안락하게 푹 절여진 만화방창 각종 쾌락의 묘지, 체제의 꽁치통조림 공장, 그 거대한 피스톤이. 톱니바퀴가 검은 기름의 몸체를 번득이며 손짓하는 현장을
왕성하게 숨막히게 숨가쁘게
그러나 갈수록 섹시하게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욕망의 통조림 또는 묘지」 중에서
압구정성, 그 온갖 구매욕의 슈퍼마켓이 헉헉 내뿜는
현란한 바람의 향기가 온 천지로 휘몰아치며
온갖 잔잔했던 것들을 숨가쁘게 풍차 돌리는구나
죽음이라는 육신의 일시적 브레이크도
지칠 줄 모르고 미끄러져가는 저 가속도의 색혼들을
끝내, 멈추게 할 수 없으리라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9게으름의 찬양」 중에서
<압구정동>이라는 욕망의 공장의 주인은 체제이며, 공장은 욕망의 삽입을 반복하는 <거대한 피스톤>에 의해 가동된다. 피스톤의 압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어서 이곳에서는 누구도 <욕망의 통조림>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일시적 브레이크>의 기능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압구정동은 욕망의 피스톤에 눌려 시체가 된 후 다시 남의 살을 뜯어먹는 <좀비族>들로 북적이며(「시인 유氏의 하루 2」), 이들이 탐하는 [불의 부페 색의 盛饌]은 날이 갈수록 더 성대해진다](「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4불의 부페」). 기꺼이 <욕망의 통조림>이 되려는 인간들이 끊임없이 [와꾸를 디밀]고 있는 까닭이다. <압구정동>에서 죽음은, 체제가 하나의 인간(제품)에 대한 가공과 사용의 과정을 마쳤음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과정은 끝없이 반복되며 점점 더 빨라진다. 통조림의 원료인 인간은 무한하고, 공장은 쉬지 않고 가동되며, 욕망을 삽입하는 피스톤의 속도는 한계를 모르고 올라가는 탓이다.
유하가 묘사하는 <광의의 압구정동>은 실제의 장소 압구정동과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 문제는 유하가 말하는 광의의 압구정동이 가공된 이미지에 더 가깝다는 데 있다. 유하는 압구정동의 <오렌지족>을 보드리야르의 저지 전략의 논법으로 해석하면서, 한국 사회가
<오렌지족>에게 갖은 퇴폐상을 뒤집어씌우고 이를 사회의 건강성을 담보하는 기호로 활용하고 있다고 간파한다.8) 동일한 관점을 적용하면, 유하 역시 <압구정동>이라는 상징 기호에 우리 사회의 온갖 부정적인 면을 이월시킨 혐의가 있다. 압구정동은 인간의 이성은 물론 미세한 감각과 욕망까지도 조작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전략이 전시되는 공간으로, 실제 생활세계보다 단순하고 과장된 모습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유하가 그리는 압구정동에는 개인의 주체적 선택과 저항이 개입될 소지가 없다. 철저히 관리되는 왜소한 개인은 권력과 체제의 확대재생산에 강제 투입될 뿐이다. 철저하게 폐쇄된 압구정동에는 어떠한 탈출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하가 압구정동의 반대편에 <하나대>를 상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압구정동은 하나대와 한 쌍을 이룰 때 비로소 <바깥>의 틈새를 갖게 되며 비판적인 반성의 대상이 된다. 뒤집어 말하면, 하나대가 더 아름답고 완전한 세계가 되기 위해서 압구정동은 더 악랄한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유하에게 압구정동은 추억 속의 하나대를 지키기 위한 저지 전략의 상징적인 기호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압구정동과 하나대는 현재/과거, 안/바깥의 관계에서 현실/당위, 외부/내면의 관계로 바뀐다. 압구정동은 하나대로 가는 길목에 놓인 방해물인 동시에 하나대에 대한 열망을 더욱 증폭시키는 발판이다. 현실과 기호가 결합된 압구정동은 유하가 만든 현대소비사회의 모델하우스인 셈이다. 이 점은 유하가 끊임없이 다른 상징 공간을 찾아 나서는 데서도 확인된다. 압구정동의 상징 공간이 현실을 충분히 담아 내지 못했기에, 유하는 보다 정밀한 상징을 찾을 필요성을 느낀다. 이 경우 가장 좋은 원천은 경험이다. 유하는 청소년기에 [한 편의 불량 비디오에 의해 미래가 바뀌길 바라]며 드나들었던 <세운상가>에서 욕망과 소비의 맹렬한 주체가 되었던 경험을 반추한다. 압구정동에서의 그가 구경하는 방관자에 불과하다면, 세운상가에서의 그는 이곳을 집 삼아 성장한 <세운상가 키드>, 즉 주민이었다. 욕망의 추억이 밀집해 있는 세운상가에서 유하가 확인하는 것은 [아무것도 저지르지 못한 삶, 난 언젠가 인생의 안전핀을 제거할 거](「드루 배리모어, 장미의 이름으로」)라는 자조와 [내 몸의 내부, 어두운 욕망의 벌집이 웅웅댄다/그렇게 끊임없이 웅웅대다가 죽음을 맞으리라](「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2」)는 두려운 절망이다. 이 점에서 압구정동과 세운상가에서 유하가 도달하는 결론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두 개의 음울한 공간이 오히려 서정적인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우는 것도 유사하다. 그러나 압구정동이 이미지와 기호로 포화된 공간이라면, 세운상가는 체험과 추억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구별된다. 또한 압구정동이 자신과는 다른 타자들의 거리라면, 세운상가는 유하 자신의 내적 공간에 해당한다.
『세상의 모든 저녁』과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는 압구정동과 세운상가 사이에 놓인 일종의 완충지대이다. 이 두 권의 서정적인 시집에서 유하는 파탄의 현실에서 낭만적인 실존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삶의 미적 순간을 찾아 끝없이 방황하는 낭만적인 자아에게 중요한 것은 여행과 기억, 사랑과 이별, 소멸과 죽음 등의 존재적 사건들이다. 이제 그에게 삶은 [소멸과의 기나긴 싸움을 끝낸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 쓸쓸하게 허물어지는 것](「세상의 모든 저녁 1」)으로 채색되며, 사랑은 처절한 고백과 함께 초라한 실체를 드러낸다. 즉, [죽음을 걸었던, 너를 향한 내 구애의 말들 / 덧없음이여, 나는 나 이외에 /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는 자기 부정의 대상이 된다. 부서진 존재의 비극은 현실과 일상을 넘어 내면과 기억, 먼 이국의 땅에서도 계속된다. 그렇다면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자유와 안식은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비극적인 낭만성의 폐부를 거침없이 드러낸 두 권의 시집에서 유하는 그렇다고 대답하는 듯하다. 하지만 한계 없이 방황하고 절망하는 것, 방황과 절망이 그 자체로 미적 순간이 되는 지독한 카타르시스야말로 유하가 <욕망의 제국> 밖에서 찾으려 한 <무엇>이 아니었을까? 역설적이게도 이 도저한 절망과 허무는 존재의 존재감을 최대한 증폭시킴으로써 그에게 삶을 유지하는 힘이 되어 준다. 자본주의가 양산한 죽음의 반대편에서 유하는 죽음이 부재하는 곳이 아니라, [죽음도 깃들지 못하고 비껴가는 곳]을 발견한다. [정적이 정적을 잡아먹고 / 마침내 정적의 뼛속까지 후벼먹는](「세상의 모든 저녁 2」) 이곳은 죽음보다 더 죽음으로 가득한 곳이며, 유하의 낭만적 방황이 엿본 최종 지점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그는 다시 현실과의 싸움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3. 무엇에 베팅할 것인가, 다름 아닌 이 <나>를!
여섯 번째 시집 『천일馬화』에서 유하는 다시 소비사회의 한가운데로 돌아온다. 그가 소비사회의 첨예한 상징 공간으로 새롭게 선정한 장소는 <경마장>이다. 말[馬/言]의 헛된 질주가 계속되는 경마장은 새로운 형태의 <욕망의 공장>이며, 경마장의 트랙은 끝없이 돌고 도는 컨베이어벨트와도 같다. 겉으로 보기에 경마장에서 트랙을 질주하는 것은 말이지만, 실제로는 경마장의 트랙/컨베이어벨트가 빠르게 회전하면서 말을 달리게 만든다. 경마장의 말들은 무엇을 위하여 트랙을 질주하는 것일까? 그 트랙은 어째서 한없이 이어지는 원형이며, 궁극적으로 경마장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유하의 답은 이러하다. 첫째, 수많은 갬블러들의 <베팅>을 위해서이고, 둘째, 가장 잘 베팅한 갬블러에게 가장 많이
<배당>하기 위해서이며, 셋째, 다 잃을 때까지 베팅한 갬블러들의 돈을 결국 경마장이 긁어모으기 위해서이다. 경마장의 주인은 말도 기수도 갬블러도 아닌, 경마장 자체라는 것이다. 경마장의 질주는 경마장을 위해 계속되며, 경마장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즉, 경마장은 자기 조절과 증식의 시스템을 완벽히 갖춘 현대사회의 축소판이며, 개개의 인간은 이 체제의 무한한 증식을 위해 끝없이 질주하는 말이자, 모든 걸 잃을 때까지 베팅하는 갬블러인 것이다.
「천일馬화」 연작은 말의 질주와 갬블러의 베팅, 경마장의 규칙을 통해 현대사회의 실체를 풍자하면서, 이 시스템이 그대로 시와 문학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천일馬화」 연작은 말(馬)의 천일야화이자 말(言)의 천일야화로, 그 속에 비극적인 결말을 내장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말[馬/言]의 서글픈 운명을 보여 준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왕비 셰헤라자데가 죽음의 위협에 맞서 매일 이야기를 지어 낸 것처럼, 경마장의 말들은 죽음의 위협에 맞서 쉬지 않고 트랙을 달린다. 그러나 경마장의 말은 포악한 왕의 마음을 바꾼 왕비와는 달리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며, 한 인간을 구원하는 등의 숭고한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 오직 순위를 위해 질주하는 말은 경마장의 추악한 욕망에 봉사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이곳은 거대한 경마장, 말은 달린다.
말은 멈추지 않는다, 아니 말은 멈출 수 없다.
당신의 도박, 거짓말, 아양, 허세, 투표, 잡문, 몽상, 매음, 위선, 인신 공격, 자유 사상, 그리고
당신의 천 배당 꿈을 위하여, 당신의 무너진 게임의 규칙을 위하여
―「천일馬화걸리버 여행기」 중에서
요즘 나는 질주가 싫다. 일종의 직업병이랄까, 이 돌고 도는 말의 원형 트랙 속에서 가지 않은 길을 꿈꾸는 자는 불행하다. 세인들은 그를 똥말이라 부른다
―「천일馬화변마의 독백」 중에서
나는 말을 탄 기수,
지금 내겐 말 이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여 나는 한없이 지껄인다
말의 황금박스여,
말의 고액배당을 꿈꾸며
언젠가는 터질 거라 확신했던 靈感의 대박을 위하여
나는 오랫동안 후미 탐색만을 거듭해왔다
생의 부진마들을 사랑했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
―「천일馬화경마장의 함정」 중에서
유하는 자신이 인간의 온갖 위선과 허영심을 위해 달리는 <말>이며, 대박을 꿈꾸며 소심하게 [후미 탐색만을 거듭]하는 <기수>라고 말한다. [말의 고액배당]과 [靈感의 대박]을 꿈꾸는 시인인 그는 자신이 경마장의 도박사들과도 별 차이가 없다고 본다. 무엇보다 그가 만든 가장 가혹한 별칭은 <똥말>이다. 그는 질주를 싫어하고 경마장의 트랙 밖의 다른 길을 꿈꾸는 자신을 <똥말>이라고 부른다. 경마장에서 <대박>과 <탈출>을 동시에 꿈꾸는 부진마인 <똥말>은 오늘의 시인으로서의 유하의 서글픈 자의식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와 함께 그는 현재의 문학 풍토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거침없이 제기한다. [이제 문학도 막판 경주 같지 않아요? 밑천은 떨어져 가고 루머는 번성합니다. 뚜껑은 열리고 엉뚱한 말들이 배당판을 움직이고 있어요 / 自害냐, 해탈이냐? 이게 요즈음 나의 화두죠](「천일馬화-1800M 1군 핸디캡 연령 오픈 일반 경주 발주 10분 전 경마 예상가 金馬氏를 만나다」). <자해>와 <해탈>의 극단을 선택할 것을 강요하는 막판의 현실은 극심한 혼란의 난장판이 되어 있다.
이토록 많은 사람을 욕망이 파멸시켰으리라 나는 생각지 못했다
끝없이 돌고 도는 원형 트랙, 내 마음의 변마는 변마답게 진짜 斜行을 하고 싶어요
나는 가끔, 무한의 우주 공간 속으로 영영 사라져버린 보이저 1호를 생각한답니다
ꡒ서두르세요, 창구를 닫을 시간입니다ꡓ
마지막 경주, 불모지(33전 0/3)란 말을 놓고 한 구멍 박아버려요
ꡒ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ꡓ
박 터진 당신, 義齒 값은 만들어야잖아요. 왜 이리 밀어, 이 씨발년이, 일단 찍어, 찍어, 찍으라잖아, 원래 막판은 이래요, 모두들 뚜껑이 열려 있거든요
ꡒ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ꡓ
―「천일馬화The Waste Land」 중에서
막판에 달한 세계는 , 고갈되고 황폐해진 황무지로 표현된다. 이 거대한 광적인 소모는 바타유가 말한 비생산적이고 파괴적인 소모를 떠올리게 한다. 바타유는 소비를 <생산활동에 필요한 소비>와 <소모 자체가 목적이 되는 파괴적인 소비>로 나눈 후, 사치, 장례, 전쟁, 종교 예식, 도박, 예술 등의 잉여의 범주를 무조건적인 소모에 필요한 <저주의 몫>으로 규정한다.9) 바타유는 인간 사회가 생산과 보존의 원칙에 못지 않게 <파멸의 원칙>에 의해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일례로, 인간의 희생에 기초한 종교의식은 파멸을 통해 성스러움을 구현하며, 비극적 파멸(실추나 죽음)의 상징적 형상화를 추구하는 시는 파멸의 의한 창조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준다.
이런 관점에서, 유하가 포착한 경마장은 현대사회의 파괴적인 소모가 대량으로, 그리고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경마장은 우리 사회가 파멸을 위한 <저주의 몫>으로 뚝 떼어 놓은, 처음부터 예정된 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과 갬블러들이 벌이는 소모의 게임은 경마장이라는 자본주의의 체제를 살찌우는 일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활용된다. 체제는 개인들의 파괴적인 소비를 통해 <생산>을 달성하는데, 이 생산은 소모된 개인들이나 사회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지극히 위험할 수밖에 없다. 체제의 유지와 강화에 봉사하는 생산은 파괴를 위한 소모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파괴한다. 결코 파괴해서는 안 될 본질적인 것, 다름 아닌 인간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 현장을 목격한 유하가 <인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의 중심이 아니라 인간의 아웃사이더이다
아웃사이더의 서정이다
숲으로 난 길을 사랑하는 산책가의 몸이다
산책가는 누구를 추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2」 중에서
유하는 경마장의 <똥말>과 <질주>에 <산책가의 몸>과 <느린 걸음>을 맞세운다. 하나대, 지중해, 사랑과 추억으로 이어진 시적 자의식의 계보는 이제 <자전거의 노래>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는다. 유하는 <자전거의 노래>의 내용을 [인간의 아웃사이더의 서정]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바, 이는 인간과 숲이 <느림>을 통해 하나가 되는 시간을 지칭한다. 또한 <자전거>는 인간의 몸의 수고에 의해, 바퀴살들 사이의 [텅 빔의 에너지]에 의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텅 빔의 에너지가 자전거를 나아가게 한다
나는 언제나 은륜의 텅 빈 중심을 닮고 싶었다
은빛 바퀴살들이 텅 빈 중심에 모여
자전거를 굴리듯
네 상상력도 그 텅 빈 중심에 바쳐지길
그리하여 세속의 온갖 속도 바깥에서
찬란한 시의 月輪을 굴리기를, 꿈꾸어왔다
(…)
길이여, 나를 태운 은륜은 게으르되 게으르지 않다
무의 페달을 밟으며
내 영혼은 녹슬 겨를도 없이 自轉하리라
―「無의 페달을 밟으며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1」 중에서
포화된 욕망과 텅 빔의 에너지를, 미친 듯이 질주하는 말과 <무의 페달>을 함께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유하의 시는 우리 시대의 시가 탐구해야 할 두 개의 극점을 한꺼번에 움켜쥐고 있다. 지금까지 유하는 그 먼 거리를 부지런히 왕복해 온 바, 시집 『천일馬화』에 이르러서는 현대사회의 파멸적인 구조에 대한 해부와 진정한 인간(성)의 실현에 대한 탐색을 더 깊이 있게 행하고 있다. 특히, <경마장>이라는 상징 공간에 자본주의와 문학, 시인의 자의식의 세 가지 주제를 겹쳐 놓고 동시다발적인 탐구를 행한 것은 상당한 시적 긴장이 요구되는 작업이었음에 틀림없다. 다양한 화자를 등장시켜 주체와 타자의 목소리가 공존하는 장을 만든 것도 이전의 무림이나 압구정동, 세운상가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마장의 시편들은 시인 자신을 방치하는 듯한 냉소적 어조와 주어의 갑작스러운 교체, 어투의 잦은 변화로 인해 독자의 심적 거리를 오히려 벌려 놓는 측면이 있다. 이로 인해 시의 전개가 산만하고 간혹 혼선을 빚는다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이에 비해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연작에서 하나대에서 출발한 서정적 지향은 보다 부드럽고 따뜻해져 있다. 결과적으로, 유하의 제 6시집 『천일馬화』에서 그가 견지해 온 두 개의 극점의 거리는 더욱 멀어진 상태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야기와 시의 자의식을 동시에 소유한 유하의 기질적인 요인으로 환원될 문제는 아니다. 날이 갈수록 더 견고해지는 자본주의의 성채가 그 격차를 더 크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두 세계 사이에서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려는 유하의 시적 싸움은 처음부터 거대한 균열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 균열이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각오했을 터이지만, 그의 앞에 펼쳐진 길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그가 노래했듯이, [무의 페달을 밟으며] 그의 영혼이 [녹슬 겨를도 없이 자전]하여야만, 그는 이 균열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 터이다. 유희적인, 때로 지나치게 유희적인 유하의 시에서 가장 지독한 비애와 마주치게 되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 각주
1) 유하, 「압구정동에 관한 세 개의 글」,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p. 140.
2)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는 그의 유명한 에피그램에서 <바람>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이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것은 존재의 실체를 찾기 위한 정신적 방황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한 개체가 이 세계로부터 학습하고 복사한 욕망이 그의 내부에서 활발히 작동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3) 이야기의 욕망이란 존재의 자기실현의 욕망, 즉 삶의 욕망이며, 이야기를 저지하려는 힘은 존재로부터 존재의 근거와 의지를 박탈하려는 살의의 욕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때 이야기의 주체가 대면해야 하는 죽음은 단순히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존재론적 의미의 죽음, 즉 존재의 자립성과 창조성이 0도가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4) 이는 진이정의 발문에 나오는 다음의 에피소드를 죽음/이야기의 관점에서 읽게 만든다. [1985년의 새 봄, 명실상부하게 건달이 된 그와 나는 일단 등단을 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우리는 그때 장난삼아 <시 비즈니스>라는 2인 동인을 결성하기도 했는데, 시를 함께 공부한다는 차원에서는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 한번은 어느 선배가 우리를 보고, 뭘 그리 열심히 하느냐고 비꼬듯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그 선배도 한때는 문학청년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죠>라고 유하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진이정, 「유하, 오래 오래 뒤돌아보는」, 『세상의 모든 저녁』 발문, 민음사, 1993, p. 97.)
여기서 진이정은 유하의 <살아남음>을 이 시집의 주제와 관련하여 죽음과도 같은 실연의 고통으로부터의 살아남음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자기 존재의 소멸과의 싸움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김현, 「키치 비판의 의미」, 『무림일기』 해설, p. 143.
6) 박철화, 「<하나대>와 압구정동 사이의 긴장」,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해설, p. 155.
7) 유하, 앞의 글, p. 146147 참조.
8) 유하, 앞의 글, p. 149 참조.
9) 조르주 바타유, 조한경 역, 『저주의 몫』, 문학동네, 2000, pp. 32-38 참조.
김수이
1968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고,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문학동네』에 [타자와 만나는 두 가지 방식]이 당선되어 등단했고,
평론집으로 『환각의 칼날』이 있다.
출처, 네블, 아삽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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