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산문, 낙타과음과 만용에게 두편 / 김수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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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낙타과음과 만용에게 두편 / 김수영

휘수 Hwisu 2006. 12. 28. 00:45

낙타과음

 

 Y여, 내가 어째서 그렇게 과음을 하였는지 모르겠다. 예수교 신자도 아닌 내가 무슨 독실한 신앙심에서 성탄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술을 마신 것도 아니겠고, 단순한 고독과 울분에서 마신 것도 아니다. 어쨌든 근 두달 동안이나 술을 마시지 않다가 별안간에 마신 과음이 나의 마음과 몸을 완전히 허탈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나는 지금 낙타산이, 멀리 겨울의 햇빛을 받고 알을 낳는 암탉모양으로 유순하게 앉아있는 것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이는 다방의 창 앞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Y여, 어저께는 자네집 아틀리에에서 춤을 추고 미친 지랄을 하고 나서 어떻게 걸어나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어떤 자동차 운전수하고 싸움을 한 모양이다. 눈자위와 이마와 손에 상처가 나고 의복이 말이 아니다.


오늘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가 누워있는 곳은 나의 집이 아니라 동대문에 있는 고모의 집이었고 목도리도 모자도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기억이 전혀 없다. 머리가 무거웁고 오장이 뒤집힐 듯 메스꺼워서 오정이 지나고 한참 후에까지 누워있었다.
옷이 이렇게 전부 흙투성이가 되었으니 중앙지대의 번화한 다방에는 나갈 용기가 아니 나고 나가기도 싫고 몸도 피곤하여 여기 이 외떨어진 다방에나 잠시 앉았다가 집으로 들어갈 작정이다.


인제는 궁둥이를 붙이고 있는 데가 내 고장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서 어떻게 앉아있어도 쓸쓸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몹시 쓸쓸하다. B양의 생각이 났다. B양의 어저께 무슨 까닭으로 참석하지 않았는지? 그러고보니 나는 어제 억병이 된 취중에도 B양을 보러 갔던가? 그렇다면 이렇게 이 외떨어진 다방에 고독하게 앉아서 넋없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B양에 대한 그리움이 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B양의 눈맵시, 그리고 그 유닉하게 생긴 입에 칠한 루즈가 주마등과 같이 나의 가슴을 스쳐간다. Y여, 그리고 자네의 애인인 림양이 춤을 추다 말고 나와서 외투와 핸드백을 집어들고 B를 부르러 간 것도 아주 먼 옛날에 일어난 일같이 술이 완전히 깨지 않은 이 머리 안에서 마치 안개 속에 숨은 불빛같이 애절하게 꺼졌다가는 사라진다.


나는 지금 무엇에 홀린 사람모양으로 이 목적 없는 글을 쓰고 있다. 이 무서운 고독의 절정위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겠나?
자네의 모습이며 림양의 모습이며 B양의 모습이 연황색 혹은 연옥색 대리석으로 조각을 하여놓은 것처럼 신선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워 보인다.
이 아름다움으로 사람에게 느끼는 아름다운 냄새를 나는 어떻게 처리하여야 좋을지 모르겠다.
사람에게 환멸과 절망을 느낄수록 사람이 더 그리워지고 끊임없는 열렬한 애정이 솟아오르기만 하는 것이 이상하다.


갈 데가 없으니 다방에라도 가서, 여기가 세상을 내어다보는 유일한 나의 창이거니 생각하고 앉아있는 것인데,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은 언제나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있는 난로 가장자리는 아니고, 몸이 좀 춥더라도 구석쪽 외떨어진 자리를 오히려 택하여 앉기를 즐겨하는 나다. 이렇게 앉아서 고드름이 얼어붙은 창을 어린아이같이 내다보는 것이다. 창을 내다보며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무기체와 같이 그냥 앉아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창밖에는 희고 노란 빛을 띤 낙타산이 바라보인다.
 지금 내 몸은 전부가 공상의 덩어리가 되어있다. 내가 나의 작은 머리를 작용시켜서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전신이 그대로 공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말을 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 사실인즉 미안하지만 자네는 이 마음을 알아 줄 것이다.


목적이 없는 글이니 목적이 없는 정서를 써보아도 좋을 것이라고 나는 스스로 자인한다.
어느 거리, 어느 다방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계집아이들.
붉은 양단 저고리에 비로오드 검정치마를 아껴가며 입고 있는 계집아이들. 내가 이 아이들을 볼 때는 무심하고 범연하게 보고 있지만 이 아이들이 생각에 잠겨있는 지금의 나를 볼 때는 여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걸세.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공연히 엄숙한 마음이 드네. 그리고 그들이 스치고 가는 치맛바람에서 나는 온 인간의 비애를 느끼고 가슴이 뜨거워지네.
 술이 깨어날 대 기진맥진한 이 경지가 나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좋으이.
이것은 내가 안다는 것보다도 느끼는 것에 굶주린 탓이라고 믿네. 즉 생활에 굶주린 탓이고 애정에 기갈을 느끼고 있는 것만 같아!
내 자신에게 고백하기도 무서워. 이를테면 죽음이 아니면 못된 약의 중독 따위일 것이니까.
자네는 나를 "잊어버린 주말"에 나오는 레이 미란드 같다고 놀리지만 정말 자네 말대로 되어가는 것같애.
운명이란 우스운 것이야.


나도 모르게 내가 빠지는 것이고, 또 내가 빠져있는 것이고 한 것이 운명이야.
실로 운명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야. 그것은 말할 수없이 가벼운 것이고 연약한 것이야.
Y여, 자네의 집에서 열린 간밤의 성탄제 잔치는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아하고 구수한 것이었어. 나는 이대로 죽어도 원이 없을 것같으이. 이것은 결코 단순한 비관이 아닐세.
낙타산에 붙어있던 햇빛이 없어지고 하늘은 금시 눈이라도 내릴 것같이 무거우이.
Y여, 나의 가슴에도 언제 눈이 오나?
새해에는 나의 가슴에도 눈이 올까?
서러운 눈이 올까?
머릿속은 방망이로 얻어맞는 것같이 지끈지끈 아프고 늑골옆에서는 철철거리며 개울물 내려가는 소리가 나네.
이렇게 고통스러운 순간이 다닥칠 때 나라는 동물은 비로소 생명을 느낄 수 있고 설움의 물결이 이 동물의 가슴을 휘감아 돌 때 암흑에 가까운 낙타산의 원경이 황금빛을 띠고 번쩍거리네.
나는 확실한 미치지 않은 미친 사람일쎄 그려.
아름다움으로 병든 미친 사람일세.

 

만용에게

   - 김수영

 

收入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너나 나나 매일반이다

모이 한 가마니에 四百三拾圓이니

한달에 十二, 三萬원이 소리없이 들어가고

알은 하루 六十개밖에 안 나오니

묵은 닭까지 합한 닭모이값이

一週日에 六日을 먹고

사람은 하루를 먹는 편이다


모르는 사람은 봄에 알을 많이 받을 것이니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봄에는 알값이 떨어진다

여편네의 계산에 의하면 七割을 낳아도

만용이(닭 시중하는 놈)의 학비를 빼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한다


나는 點燈을 하고 새벽모이를 주자고 주장하지만

여편네는 지금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아니 四百三拾圓짜리 한 가마니면 이틀은 먹을 터인데

어떻게 된 셈이냐고 오늘 아침에도 뇌까렸다

이렇게 週期的인 收入騷動이 날 때만은

네가 부리는 독살에도 나는 지지 않는다


무능한 내가 지지 않는 것은 이때만이다

너의 毒氣가 예에 없이 걸레쪽같이 보이고

너와 내가 半半---

[어디 마음대로 화를 부려보려무나!]

 

<1962. 10. 25>


養鷄 辨明

 

……전략……

 


양계일을 보느라고 둔 담양에서 올라온 머슴아이가 우리집에서 야간중학교를 마치고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년에 야간대학에 들어갔는데 이 아이의 인건비가 안 나옵니다. 새학기에 수업료를 또 내주어야겠는데 이것이 참 난감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전에는 모이를 사러 조합에 갔다가 모이 두 가마니를 실어놓은 것을 오줌을 누러 간 사이에 자전거째 도둑을 맞았다고 커다란 대학생놈이 꺼이꺼이 울고 들어왔습니다. 집안이 온통 배 파선한 집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집에도 양계를 하니까 돈이 있는 줄 알고 또 얼마전에는 도둑까지 들었습니다. 잠을 자다가 떠들썩하는 소리가 나서 일어나보니 여편네가 도둑이 들었다고 고함을 치고 있습니다. 도둑이 어디 들었느냐고 물으니 만용이(만용이란 닭시중을 하는 앞서 말한 대학생) 방쪽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나는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고 여편네와 함께 계사 끝에 떨어져있는 만용이방쪽으로 기어갔습니다. 어둠을 뚫고 맞지도 않는 신짝을 끌고 가보니 만용이는 도둑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도둑이리는 사람은 나이 50이 넘은 사나이였습니다. 헙수룩한 양복을 입고 외투는 입지 않고 만용이 방 밖에 서서, 무슨 동네에서 말이라도 온 사람처럼 태연하게 서있었습니다. 『당신 뭐요?』하고 나는 위세를 보이느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나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도둑의 얼굴이 너무 온순하고 너무 맥이 풀려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무말이 없습니다. 『여보 당신 어디 사는 사람이오? 이 방중에 남의 집엔 무엇하러 들어왔어?』말이 없습니다. 『닭 훔치러 들어왔오?』말이 없습니다. 여편네가 고반소에 신고해야겠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도 말이 없습니다. 나는 버럭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흉기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아래위를 훑어보았으나 그런 기색도 없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거 보세요, 이런 야밤에……』하고 존댓말을 썼습니다. 그제서야 사나이는 『백번 죽여주십쇼, 잘못했습니다!』하고 비는 것이었습니다. 말투가 퍽 술이 취한 듯했으나 얼굴로 보아서는 싯뻘건 얼굴이 술이 취해 그런지 추위에 달아 그런지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즉각적으로 이 사람이 밤길을 잃은 醉漢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이 어디요?』쑥스러운 질문이었습니다.

 

『우이동입니다.』

『우이동 사는 사람이 왜 이리로 왔소?』

『모릅니다…… 여기서 좀 잘 수가 없나요?』이 말을 듣자 나는 어이가 없어졌습니다. 『여보, 술 취한 척하지 말고, 어서 가시오.』도둑은 발길을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두어서너 발자죽 걸어나가더니 다시 뒤를 돌아보고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하고 태연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나는 도둑의 이 말이 무슨 상징적인 의미같이 생각되어 아직까지도 귀에 선하고, 기가 막히고도 우스운 생각이 듭니다. 도둑은 철조망을 넘어왔던 것입니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이 말은 사람이 보지 않을 제는 거리낌없이 넘어왔지만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다시 넘어나가기는 겸연쩍다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구태여 갖다붙이자면 내가 양계를 집어치우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장면을 바꾸어 생각한다면, 도둑은 나고 나는 만용이입니다. 철조망을 넘어온 나는 만용에게 『백번 죽여주십쇼, 백번 죽여주십쇼.』하고 노상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하고 떼를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