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배정원 시모음 본문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그리운 약국> 당선.
1998년 시집 <지루한 유언> 청년정신
1998 년 동시,동요교육서
<나의 첫 동시쓰기> 청솔
지루한 유언
그의 유언은 정말 길었다
초저녁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던 긴 문장은
서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의 최후를 지키느라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지샌
그의 부인과, 자식들과, 며느리들은
물 먹은 두루마리 휴지처럼 지쳤다
쏟아지는 피로와 졸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죽음의 目前에 선 아버님이
마지막 말씀을 하시는데 졸 수야 있나
그들은 이를 악물고 견뎌야 했다
가습기 소리 클클거리는 겨울밤도 길었지만
그의 유언은 한참 더 길었다
달싹거리는 마른 입술 사이로 말들은
집요하게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마침내는
그의 유언이 식솔들의 인내를 이겼다
제일 먼저 며느리들이 졸더니 다음은
자식들이
급기야는 그의 부인도 먼저 눈을 감았다
창 밖은 창백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창 밖에선 기다리다 지친
저승사자마저
쪼그리고 앉아 잠들어 있었다
그리운 약국
세 번째 약국엔 새장이 있었다
햇살은 넉넉하였고 한 쌍의
카나리아는 하얀 진통제를 쪼고 있었다
구리반지보다 더
가느다란 손이
진열장을 열면 아스피린들,
눈처럼 쏟아져
아직 녹지 않은 눈은 눈물겨웠다
병든 과일나무 분재의 웃음이
석유스토브의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던, 겨울
아침 저물 무렵
시장골목이 끝나는 곳에
세 번째 약국이 있었고 그곳엔
소복을 걸친 약사와, 정적과, 불치의
病이 있었다
캡슐에
든 흰 가루를
드링크제의 목을 비틀어 마셔도
해독되지 않는 날들은
식도의 어디쯤에서 분해되는가
유리문을 열고 거리로
나서면
햇살은 또 그렇게
저희끼리 몰려다니며 깔깔대고 있었다.
테이블 밑으로 시계를 보았다
맥주거품처럼 말들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하품이 나오려 할 때마다 나는
식은 맥주를 마시거나
담배를 태웠다
요란한 건배 소리에
놀란 맥주병이 넘어지고 병뚜껑들은 또 다시
틀어막을 뭔가를 찾아 맥주 위로 미끄러지듯
달려갈 때, 내
안경은
테이블 밑으로 시계를 보았다
일어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는
생각을 세 번 정도 하고 나서
다시 잠이
몰려왔다
김의 사업얘기가 끝나고, 박의 신세타령도
최의 정치 평론과 다른 김의 늦사랑 얘기도
모두 끝나갈 무렵
창
밖에는 팝콘 같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늙은 웨이터가 와서
테이블에 얼룩진 말들을 천천히 닦고 가고
잔기침만이 간간이 정적을
방해할 때, 다들
테이블 밑으로 시계를 보았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장터에서
― 늙은 프로메테우스
나의 사랑은 아주 조금씩 타들어간다 불길도 없이
한 줄기 연기로 피어오른다 누군가 나에게 불빛을 보여달라
말한다 춥다고, 한 잎의 바람처럼 떨린다고 중얼거린다
비틀거리며 연기는 피어오른다 누가 나를 좀 눌러서
꺼주었으면,
무성음들이 성대를 울리며 튀어나온다 공복의 줄담배처럼
노래가 이어진다 실핏줄들이 힘없이 뻗어가듯
그렇게 피어나는 연기에 감은 눈이
아파서 한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천천히
천막 속으로 흘러든다 나의 연기는
사랑이다 한낮으로 향하는 지루한 사랑 속에 여름은 가고
시계의 초점보다
가느다란 것이 그러나 끊어지지도
않는다 그는 오늘도 한 줌 불씨를 들고 거리를
헤맬 것이다 아무도 받지 않을
그것을 들고
젖은 꽁초 하나 주워 물고,
두루마리 휴지가 풀려가듯
한 친구가 내게 말한다
너는 이제 잘 풀려가는 것 같다고
그래, 난 요즘 잘 풀리고 있다
두루마리 휴지가 잘 풀려가듯
그렇게 잘 풀려서
生의 내리막길을 쾌속으로
질주하고 있다
잠시의 멈춤도 없이 구르다
구르다 돌아보면 한줄기
위태로운 하얀 선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얇은 목숨
바닥으로만 내달리는
가속이 주는 현기증 속에서
기억할
것도 없는 지나침 속에서
그래, 난 아주 잘 풀려가고 있다
마침내 살은 다 풀어 버리고
한 개의 마분지통으로 남아 관 속에
툭,
떨어질 그날까지
길바닥에 나를 바르며, 나를 벼르며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