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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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제 시모음

휘수 Hwisu 2006. 9. 11. 00:04

1963 전북 정읍 출생
서강대 신방과, 서울 예술신학대 기독문학과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詩 '나는 날마다 전송된다' 당선
시집 '삼류극장에서의 한 때', ' 이 달콤한 감각'


향기에 대한 관찰
 
젖은 쓰레기 더미 위에서
치자꽃 무리가 피었다
깨진 유리병과 망가진 잡동사니 따위로
딱딱한 형태를 견뎌낸 것들,
텅 빈 공기의 틈으로 주입되는 한 호흡의
향기가 되기 위해 몰입한다
역한 핏물이 주루룩 몸밖으로 흘러나갈 때까지
부패의 꿈속으로 매몰된다
그 속에서 뿌리들이 번식하는 소리,
뿌리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꽃과 열매와 벌레와 여자와 아이들이 익어간다
이곳에 이르면 모든 경계는 모호해지고
날카로움도 망가짐도 눈부신 풍경이 된다
새들 속에서 우는 잡동사니와
나뭇잎 속에서 펄럭이는 고철과
꽃들 속에서 반짝이는 유리조각,
온갖 황홀한 향기로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사물들, 사물들 모두 응고된 공기의 흔적은 아닐지
배설물이거나 발자국이거나 혹은 눈물?
뿌리내린 것들은 지탱할 수 없을 때까지
몸을 부풀려 꿈속 배경이 된다
망가질수록 황홀해지는 지상의 풍경
 
치자꽃 향기가 코 속으로 스민다
나는 느릿느릿 고정된 생의 형태를 망가뜨리며
수많은 사물들 사이에 눕는다.


나는 눈물이다


비가 그친 뒤, 흘러가지 못한 채
나뭇잎 풀잎에 앉아 흔들리다 때를 놓쳐버린 눈물
잎새 아래 웅덩이로 굴러 떨어지는 눈물
높다란 건물 위에서 추락하다
투명한 유리창에 얼룩지는 눈물
나는 웅덩이에 갇혀 있다
고랑을 이루고 내를 이루어 굽이치고 싶던 꿈,
떠돌던 먼지와 뒤섞여 점점 메말라가는 눈물
더러 사람들이 이놈의 진창 하며 비켜가는 눈물
모퉁이 음지에 낮게낮게 엎드려도
자꾸 움츠러드는 눈물
희고 투명한, 아른거림으로 비치는 눈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눈물
그러나 그때 나는 허공을 굽이쳐 흘러가는 꿈,
가장 가벼운 무엇의 일부가 되는
그날까지 나는 그저 눈물이다


누드 모델

 

누울까요 앉을까요 엎드릴까요
자 그러면 완전하게 보이나요
얼굴을 그리고 있네요
잘 보이나요, 내 눈속에서 몇 개의 별들이 허물어졌는지
코를 통해 얼마만큼의 허공이 스며들고
입술이 먹어치운 풍경의 양이 잘 그려지나요
뱃살의 두께가 정확히 표현됐군요
살과 살 속의 사막,
맛있는 것들만 내 속에 들어왔겠어요
혈관을 통해 무수히 많은 것이 흘러요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 때부터 흘러온 시간들,
또 소화되지 못한 슬픔들이
내장을 통과하며 가끔은 복통을 일으키지요
그것까지 그릴 수 있게 마저 벗어 드릴까요
드러난 가슴은 그리면서 심장은 왜 안 그리시죠?
내 일생을 흔드는 것들이 거기에 있는데
머리 속의 블랙박스도 열어보세요
깜짝 놀랄 그림들이 많이 있을 거에요
자세히도 보시네요.
항문과 음부가 어떤 풍경들을 배설하는지
잘 그려보세요


투명한 날들

 

벌써 여러 날 동안 얼어붙은 저수지
마치 맑은 거울 속처럼
풍경들이 모여 쉬고 있었다

나도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아
가장자리를 밟는 순간
바닥이 갑자기 쩡쩡,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칼처럼 날카로운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한 바닥 전부가 날카로운 것들로 이루어졌는지
베인 햇살들이
깊어진 병[病]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시 허공을 지그시 눌러보았다
그곳에서도 투명한 것들이 쩡, 소리를 내며
날을 세운 바람으로 마구 돋아났다
내 눈빛을 가르며 지나갔다
저린 가슴속으로 갖가지 조각난 마음들이 흘렀다
하얗게 질린 은사시나무 곁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투명해진 날들이 수없이 지나갔다
숨을 쉴 때마다
예리한 하루하루가 내 잠을 난도질하며 빛났다
창밖으로 꿈꾸는 듯한 풍경들만 모여들고
꿈들은 죽은 듯이 가라앉는다
그러한 날들을 오래 들여다본다
점점 더 투명하고 고요해지는 나날들에 비치는 마음들을

병[病]의 이름으로 뽀족해진 것들도
내 조각들임이 분명할 것이니


나는 날마다 전송 된다

 

  TV에서 본 <스타트랙>이라는 영화, 몇 세기 후라던가? 물체나 사람이(혹은 그냥 생명체) 원반에 올라 스위치를 누르면 원자분해되어 어디론가 전송되었다. 그리고 목적된 곳에서 정 확하게 재결합되어 나타났다. 지옥이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1

나는 자주 꿈을 꾼다
의식의 미세한 입자들이 신비로운 곳을 향해 날아간다
환상 속 연인과 동침을 하며 춤을 춘다
때때로 예언자처럼 먼 미래에 미리 가보곤 고개를 끄덕인다
내 꿈의 성능은 엉망이어서
변질된 모습을 드러낼 때가 더 많다
스핑크스 형상으로 사막의 모래바람에서 우우거리거나
털 없는 늑대가 되어 붉은 달을 물어뜯는다
암흑의 전당포에 들러 추억을 저당잡히고 새로운 길을 산다
흘러나간 그림자 모두 거친 발톱을 세운다
그곳에서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구경한다
단세포 같은, 벌레 같은, 바람 같은, 짐승 같은, 로봇 같은 석탑 같은, 공룡 같은, 괴물 같 은...
검은 석실에 갇혀 바둥거린다, 나는 겁에 질린
영혼을 꺼내 짓이기면서 사나운 울음소리를 낸다
출구 없는 꿈을 벗어나려고
의식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어댄다
오, 꿈은 이토록 견고한 공포를 향해 나를 보냈던가
어쩌려고 내 생은 한동안 꿈의 의식을 건설했던가
잠자리에 누워 채 걷히지 않은 비명의 메아리를 토한다
나는 절망의 입자로 재결합된다
몸 밖으로 증발되는 무수한 물기, 꿈의 증거를 말리고 있다

 

2

내 몸 안에서 무언가 끝없이 전송된다

  호흡이, 시선이, 소리가, 체온이, 청춘이, 눈물이, 생각이, 생각 속 상상이 전송되고, 지친 희 망들이 전송되고, 엄청난 양의 기억들이 날마다 미래를 향하여 전송되고, 내가 가진 자그마 한 종교가 두려움 또는 가벼운 신앙으로 전송된다. 그리고,
 
흑백의 내 생이 천천히 두꺼운 무덤을 향해 전송되고 있다.


그녀의 깊은 속

 

들여다본다, 깊은 그녀의 속
그곳은 이미 입구부터 어두웠고
내 눈의 검은 창엔 검은 빛으로 가득해진다
검은 문고리를 더듬더듬 만지며 핥으며
그녀 속으로 들어간다

 

검은 담이 있고 창이 있고 식탁이 있고 텃밭이 있고
언덕이 있고 강이 있고 바다가 있고,
온통 검은 것들이어서 처음엔
여기가 우주라는 걸 영 몰랐다
핥고 부벼대면서 그 익숙한 맛과 향기에 나는
한 생애를 기억해낸다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한때
그때, 검은 세계는 검은 것이 아니었다
바다가 요람이었고 늪이 놀이터였고
함께 숨쉬던 내 일부였다
온갖 비밀이 내것이었던 생애,

 

검고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생성의 비밀들
이제 검은 것을 보지 못한다
빛을 관찰할 능력 외 대부분의 시력을 잃었다
이후의 생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전혀 안 보이는,
내 존재의 생성이 끝나버린 세계에서
우두커니,
컴컴한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녀의 깊은 속.


삼류극장에서의 한때 1

 

거추장스러운 날들이 주머니 속에서 뒹굴던 한때,
그때 나 삼류극장의 어둑한 통로를 걸어
환각의 세계로 잠입했었네
내게 요구하는 주머니 속의 시간들을 서슴없이 지불하면서,
아무리 소비해도 온천수처럼 솟아 뜨거워지던
뜨거워질 뿐 흘러갈 도랑 하나 찾을 수 없던
가혹한 청춘을 향해 가래침을 뱉아내었네
쓴 기억의 껍질을 벗기고 질겅질겅 껌을 씹으면
목구멍으로 흡수되는 어둠의 단맛,
삼류극장 안에서 나는 몇 방울의 오르가슴이 되기 위해 살과 피를 함부로 도려내었네

 

온갖 문구들이 눈빛에 선명하게 박히고
그 강렬한 추파에 응답하는 내 젊음의 한때,
검은 장막 안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갔네
다만 천국으로 향하는 비밀통로를 열어주는
한 줄기 긴 빛과 신음 소리 앞에서 마른 침을 삼켰네
그것은 육체의 법칙,
무릎과 무릎 사이에 엎드려
깊은 밤 깊은 곳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네
뻐꾸기가 밤에 우는 이유를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 난
날마다 허물벗는 꽃뱀의 매끄러운 살결을 더듬으며
사랑의 방식에 터득했네
어둠의 성역에서 타락과 포옹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신이 감춰둔 또 하나의 천국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라고,

 

시간은 단단한 벽으로 밀봉된 바깥 세상에서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곤 했지만,
삼류극장의 어둠에 그을린 수 많은 애욕 포스터로
포장된 나는 평화로웠네
풍요로운 연인들과 함께 아름다운 도피중이었네
그 곳에 오래도록 머물기 위해
책이나 옷을 팔고, 많은 물건들과 청춘 따위 같은
그 동안 가졌던 것들을 아낌없이 바쳤네
내 시계 위에 검은 비늘이 덮여 있는 동안,
고속주행되는 세월에게 감동의 기립박수를 퍼부었네
어느 날 모퉁이에서 아주 늙어 버린 내가 발견되길 고대하면서.


몰락은 아름다운가


더운 입술로 땅 위를 핥던 하루가 나무 숲 너머로 걸어간다
종일 환호성 지르던 풀잎들은 그 쪽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리고
노래를 마친 새들도 둥지 속으로 머리를 파 묻는다
이 평온한 한때를 위하여,
숨구멍을 통과하는 공기는 싸늘한 침묵을 삼킨다
강렬했던 빛이 내력을 상실하고
꽃이파리에 날카로운 이슬이 꽂히기 시작할 때,
나무숲에서 자란 어둠이 뚝뚝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땅 위를 걸어다니던 발자국들이 지워진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새의 목숨이 끊어져도 상관없단 말인가
찬란했던 꽃이파리가 떨어져
영영 사라진다 해도 아주 상관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둠의 늪에 발목을 묻고
먼저 죽어간 영혼들의 속삭임에 귀기울여야 한다
여지껏 고백을 꺼려했던 공포들도 쉽사리 드러난다
이미 편안한 터전을 가꾼 저 오래된 영혼들
자유로움이 부럽다, 도피가 끝난 것들 속에서
나는 잠깐씩 반항의 불꽃을 피워보지만
고요한 것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초라한 껍질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소등한다
은밀한 그들의 날개 한 쪽 깃에 매달려 더욱더 깊숙하게,
그 휴식의 비밀을 익혀야 한다
나는 이미 어둠의 늪에 발목을 묻어두었으므로.


꿈은 또 하나의 쓰레기 봉투이다


밤새 고양이가 할퀴고 간 쓰레기 봉투 안,
내가 헝크러진 채 쏟아진다
몇 장의 고지서이거나 구겨진 낙서 조각으로
또는 삼키지 못한 음식물 찌꺼기가 되어
역겨운 냄새를 풀풀 날리고 있다
그것은 살이 뜯긴 앙상한 과거이거나
버려진 기억의 나,

 

그러한 나를 간혹 꿈속에서 만날 때가 있다
낯익은 형상들이 모퉁이마다 뒹굴고
일그러진 표정을 가진 기억에 꿈은
축축한 땀을 쏟으며 한없이 어두워진다
꿈이 되풀이될수록 더욱 많은 내가 들어찬다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곳으로부터
압착된 무수한 나는 천천히 썩어간다
꿈은 모두 악취로 가득하다

 

나는 연신 코를 막으며 삐져나온 것들을
봉투에 쓸어담아 입구를 단단히 동여맨다
묻혀야 할 흔적의 오수가 흘러나온다
날카로운 빛이 꿈의 벽을 할퀴며 지나간 아침,
얇은 꿈에 구멍이 나고 나는 문 앞에 돌아와 서 있다

 

곪아터진 뜨겁고 끈적한 진물이 주루룩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