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박제영 시모음 본문
강원도 춘천 출생
1990년 고대문화상 시부문 수상.
1992년 ‘시문학’으로 등단
‘빈터’동인
2004년 시집 <푸르른 소멸> 문학과경계
詩창작 강의
제3강
명사 20~24개, 동사 24~30개, 부사 10~12개, 형용사는 가급적 넣지 않는 게 좋지만 경우에 따라 3~6개, 그리고 숙성 발효시킨 생각 24그램과 그늘에서 2주 이상 건조시킨 감정 12그램을 준비할 것
명사, 동사, 부사를 숙성 발효시킨 생각 12그램과 함께 섞어 볼에 넣고 중탕으로 열을 가하며 휘핑한다. 거품이 생기는 것을 확인하면서, 온도가 36.5℃가 될 때까지 계속 휘핑한다. 36.5℃가 되면 숙성 발효시킨 생각 나머지 12그램을 넣고, 중탕에서 내려 열이 식을 때까지 휘핑을 계속한다. 그 다음에 온도가 5℃ 아래로 떨어지면 그늘에서 건조시킨 감정 12그램을 넣고 거품이 단단해질 때까지 휘핑을 계속한다. 손가락으로 눌러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거품이 단단해졌으면 드디어 완성이다. 취향에 따라 상황에 따라 장식용으로 형용사 몇 개 올려놓아도 된다.
이 요리의 맛은 재료의 혼합비와 온도에 따라 달라지므로 그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것이 좋다. 생각은 충분히 숙성 발효시킨 것을 써야 한다는 것과 그늘에서 말린 감정을 써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도록!
우리는 마침내 ‘시’를 배웠다.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초등학교도 다 채우지 못했으니 한글 쓰는 일조차 어눌하시다. 아들이 시 쓴답시고 어쩌다 시를 보여드리면 당최 이게 몬 말인지 모르겠네 하신다. 당연하다.
어머니는 참 억척이시다.
17살, 쌀 두 가마에 민며느리로 팔려와서, 말이 며느리지 종살이 3년 하고서야 겨우 종년 신세는 면하셨지만, 시집도 가난하기는 매한가지요, 시어미 청상과부라 시집살이는 또 얼마나 매웠을까, 그래저래 직업군인인 남편 따라 서울 와서 남의 집살이 시다살이 파출부살이 수십년 이골 붙여 자식 셋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 보냈으니, 환갑 넘어서도 저리 억척이시다. 이번에 내 시집 나왔구만 하면, 이눔아 시가 밥인겨 돈인겨 니 처자식 제대로 먹여 살리고는 있는겨 하신다. 당연하다.
무식하고 억척스런 어머니가 내 모국이다. 그 무식한 말들, 억척스런 말들이 내 시의 모국어다. 당연하다.
지금까지 써 온 수백편 시들을 전부 모아 밤새 체를 쳤다. 바람같은 말들, 모래같은 말들, 다 빠져나가고 오롯이 어, 머, 니,만 남았다. 당연하다.
누가, 인간에게 원숭이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주었나
그러니까 대학 1학년 때였는데요 일반물리학 중간고사 시간이었는데요 문제가 다음과 같았는데요
y축으로 y높이의 전봇대가 서 있고, x축으로 x거리 떨어진 곳에 포수가 서 있다. 전봇대 위에 원숭이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실수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원숭이를 맞추려면 포수는 몇 도 각도로 총을 쏘아야 하는가?
정답이 아크탄젠트 y분의 x든, x분의 y든 중요하지 않았는데요 그래서 이렇게 써야만 했는데요 원숭이를 숲에서 쫓아낼 권리를 누가 주었나요 원숭이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누가 주었나요 떨어진 원숭이를 치료해서 다시 숲으로 돌려보내야 하지 않나요
0점을 받고 F학점을 맞았는데요 결국 공학도가 되는 것을 포기했는데요 20년이 지난 지금 아크탄젠트를 정확히 푼 친구들은 대학 교수도 되고 대기업 차장도 되고 잘 살고 있는데요 나란 놈은 마누라랑 새끼들 끼니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은 알량한 시인 나부랭이가 되었는데요 그래도 여전히 정말로 궁금한데요 누가, 인간에게 원숭이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주었나요
문학과 경계, 2004 겨울호
해바라기
일년 중 가장 뜨거운 날,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시각, 언제나 그 순간이었어
빛은 산란을 일으키고 신기루인양 당신을 보았지 사랑을 찾아 우, 우, 숲과 초원을 헤매고 있더군 동굴 속 마녀가 비밀을 말해주는 것도 보았어 "기린아, 네 사랑은 숲 너머에 있구나" 숲의 덩굴이 너무 높았던 당신은 모가지를 늘이고 늘였지 우, 우, 울음은 끝내 삭정이가 되고 불이 되고 불꽃이 타올라 활 활
오, 해바라기
당신의 가늘고 긴 목을 사랑해
덩굴너머 노랗게 타오르는 그, 가늘고 긴
어머니의 만성중이염
피고름 파낸 저 귀,
거죽 뿐인,
뼈란 뼈 전부 녹고 삭은,
안팎의 모진 욕이란 욕
수 십 년 묵혀 마침내 다 품은,
터엉텅
빈
북이다. 네 시간의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막 깨어났는데, "바
쁠텐데 왜 왔니" 하신다. 자식 셋 데리고 모질고 독한 사막의 건기를
그보다 모질게 그보다 독하게 건너온 저 늙은 북이 내 어미다.
계간 정인문학, 2006년 창간호
일요일 오후 세 시
죽어라죽어라 살아야 한다
유전된 누대의 기억,을 더듬어 온 일생
짐작이 가고도 남을 저 휜 허리
늙은 사내는
제 몸보다 더 큰 박스더미를 싣고
제 삶보다 더 무거운 리어카를 끌고
일요일 오후 세 시
뙤약볕 좁은 언덕길을 꾸역꾸역 오르고 있다
내려오던 마을버스, 올라오던 승용차
그 뒤로 줄지어 선 자동차들
경적소리 욕지거리 날카롭게 섞여서
비키라고 빨리 좀 비키라고
성난 개처럼 으르렁거린다
쌈 난 줄 알고 모여든 구경꾼들
난장 한 가운데 꼼짝 없이 끼어버린
이제 넘어지면 다시 못일어날지도 몰라
죽어라죽어라 중심만은 놓지 않고 있는
저 늙은 사내
일요일 오후 세 시를 지나고 있다
계간 정인문학, 2006년 창간호
푸르른 소멸·69
- 물수제비가 나를 흔든다
1
딸이 운다 물수제비뜨다 말고 딸이 운다
가라앉아 돌이 가라앉아
달처럼 이쁜 딸이 운다
돌아앉은 작은 등에 파르륵 파문이 인다
2
이리 온 아가, 아비 등에 업히렴
조금 멀리 가고 조금 오래 뜰 뿐이야
지금이야 너를 업고 물수제비처럼 얕은 내를 건너고 있지만
수심은 깊어질 것이고 아비도 끝내는 가라앉을 것이야
강은 잠시 길을 내어줄 뿐, 돌멩이가 강을 건널 수는 없단다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돌처럼 둥글게 딸이 잔다
아비 등 위에 새근새근 파문을 새긴다
3
내가 뜬 물수제비가 나를 흔든다, 오래 전 내가
가라앉은 아버지를 흔든 것처럼
*박제영 시인의 홈에서
장미여관 김씨는 모른다
벌건 대낮에 장미여관 앞 큰 길에서 개 두마리가 흘레 붙었다
이런 쌍넘의 개새끼들, 여관집 김씨가 뜨거운 물을 붓는다
두어차례 물세례를 더 받고서야 붉은 몸이 붉은 몸을 빠져나온다
투숙객의 자동차 번호판에 덮개를 씌우고 있는
장미여관 김씨는 모른다
대낮의 투명함을 견디는 것은 오직
저 개들 뿐이란 것을
여관을 빠져나오는데 백미러 속에서 개가 짖는다
김씨가 다시 물을 붓고 있다
두 몸이, 붉어져 하나가 된 몸이, 컹컹 운다
그 여자, 문을 열지 않는다
돌아갈까
기다려야 하나
당신의 마흔은
이제
그 경계에서
흔들리는데
여전히
그 여자, 문을 열지 않는다
처음부터
빈 집이었을지도 모르는
모르는 그 여자, 밖에
모르는 당신
관양동 1376번지 백합타운 202호
그곳에 마흔의 아내가 산다
가령과 설령
가령
이것이 시다, 라고 쓴 대부분의 것은 시가 아니다
설령
이것이 시가 되지 않더라도, 라고 쓰여진 것은 대부분 시다
가령(佳嶺)은 도처에 있다. 가령 화사하고 화려한 것. 가령 사랑이란 단어. 가령 그리움이란 단어. 봄날 꽃놀이 관광버스가 가 닿는 곳. 그곳이 가령이다.
설령(雪嶺)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 스며 있다. 어둡고 춥고 배고픈, 눈과 귀와 혀의 뿌리. 설령 어시장 좌판이라도. 설령 공중화장실이라도. 설령 무덤이라도. 설령 보이지 않더라도. 그곳에 있다.
등반자여 혹은 동반자여
가령은 도처에 있고 설령은 도무지 없다
도대체 어디를 오를 것인가
시평, 2005년 여름호
늙은 거미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거문개똥거미가 마른 항문으로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암컷 거문개똥거미가 제 마지막 거미줄 위에 맺힌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죽은 할머니가 그러셨지. 아가, 거미는 제 뱃속의 내장을 뽑아서 거미줄을 만드는 거란다. 그 거미줄로 새끼들 집도 짓고 새끼들 먹이도 잡는 거란다. 그렇게 새끼들 다 키우면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나가고 거죽만 남는 것이지. 새끼들 다 떠나보낸 늙은 거미가 마지막 남은 한 올 내장을 꺼내 거미줄을 치고 있다면 아가,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수의를 짓고 있는 거란다.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자신을 위해 만드는 처음이자 마지막 거미줄이란다. 거미는 그렇게 살다 가는 거야. 할머니가 검은 똥을 쌌던 그해 여름, 할머니는 늙은 거미처럼 제 거미줄을 치고 있었지.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전봇대
벽과 벽, 골목과 골목, 허공과 허공, 막다른 사이에는 언제나 그가 서있다
그는 빛과 예언이며 또한 어둠과 상처였으니, 모든 기도는 그를 통해 전송되었지만 그로 인해 혼선도 빚어졌다 일용할 양식과 일자리를 구해주기도 하였지만 장기매매와 성매매를 주선하기도 했다 길 잃은 아이를 찾아주었지만 아이의 가출을 부추기기도 했다
취한 자나 떠돌이 개가 오줌을 갈길 수도 있겠지만, 그는 여전히 막다른 곳에서 막다른 자들에게 신처럼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죽음은 늘 과속이다
지상의 마지막 톨게이트를 건너는 친구에게 지전으로 하얀 봉투를 찔러 준다. 남은 자의 슬픔은 결코 죽은 자의 속도를 따라 잡지는 못한다. 과속의 차선을 단 한번도 이탈하지 못했던 녀석. 죽어서야 비로소 멈춰 선 녀석의 얼굴. 녀석은 알고 있었을까. 제 몸 안의 속도를 털어내려고 어둠 속을 질주했지만 그 어둠의 배후 또한 과속이었다는 것을. 시속 140킬로미터의 속도로 화투패를 내려친다. 무인카메라의 후레시가 터진다. 한 컷 한 컷 필름은 돌고, 마침내 인화되는 사진 한 장 - 상복 입은 아내와 아이들의 마른 울음소리. 불타는 차 안에서 녀석의 피 묻은 손가락들이 과속으로 움켜쥐고 있던 그 사진 한 장.
우연
문상이란 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보다는 남은 자와의 관계를 지불하는 의식, 부조금이란 사자가 지상의 마지막 톨게이트를 지날 때 지불해야 할 통행료를 대납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남은 자들의 슬픔은 그러나 결국 죽은 자에게 닿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가속이 붙는다 시속 140킬로미터 어둠 속을 질주하는 것은 이 순간 무엇이지, 무엇, 퍽, 무인카메라의 후레시가 터지고 일순, 어둠 속에서 제 몸을 드러낸 과속의 덩어리
갓길에 차를 세우고 담배 한대를 문다 꽃은 어디 가고 대궁만 남은 민들레를 보다가 낮게 엎드린 대궁을 흔들다가 문득 궁금해진다 풀 아래 뿌리쯤에서 이 순간 벌어지고 있을 우주운행에 관한 비밀들 - 벌을 잡아먹다 말고 도망치고 있는 스라소니거미와 제 몸을 말고있는 쥐며느리의 긴장에 대해서, 다음달 과태료를 내면 그 뿐일 이 우연한 사건에 대해서
새는
죽어서도 날개를 하늘에 묻어야 하는 것
날개 꺾인 비둘기
아스팔트 위를 기고 있다
기어 온 이력만큼 낭자한 상처들
피 냄새를 맡은
검은 개들은 지금
사내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는 중이다
침 흘리는 저 개들의 아가리가 새의 무덤이었던 것
새
막차를 놓친 그 밤,
나는 들었네
호루라기 소리에 선 잠마저 빼앗긴
가늘디 가는 다리로 뒤뚱거리며 쫓기고 있는
지상의 무거움을 끝내 버티지 못하고 마는
끝끝내 허공의 유배지로 돌아가는
새들의 비명소리를
막차를 놓친 그 밤,
나는 보았네
지상의 터를 빼앗긴 새들의
무섭고 무거운 비상을
마침내 오지 않을 차갑고 캄캄한 미래를
가라앉는 배
수 십 년 당신들, 강을 건네주었으니
이제 나 가라앉는다
슬퍼하지 말기를
수 십 년 당신들 건네주었다고, 강이
이제서야 나를
받아주는 것이니
할아버지는 그렇게 가라앉았는데
열 세 살 소년은 마흔이 되어서야
그날,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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