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나태주 시모음 본문
1945 충남 서천 출생으로 공주사범대학교를 졸업
1971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흙의문학상, 충청남도문화상,
현대불교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등을 수상
시집「대숲 아래서」「누님의 가을」「막동리 소묘」
「굴뚝각시」「아버지를 찾습니다」
「그대 지키는 나의 등불」「추억이 손짓하거든」「딸을 위하여」
「풀잎 속 작은 길」「슬픔에 손목 잡혀」「섬을 건너다보는 자리」
「물고기와 만나다」등
산문집 「대숲에 어리는 별빛」, 「절망, 그 검은 꽃송이」,
「추억이 말하게 하라」,
시화집「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송수권·이성선·나태주 3인 시집「별 아래 잠든 시인」등
현재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고욤감나무를 슬퍼함
고욤감나무 한 그루가 베어졌다 올봄의 일이다
해마다 봄이면 새하얀 감꽃을 일구고
가을이면 또 밤톨보다도 작고 새까만
고욤감들을
다닥다닥 매다는 순종의 조선감나무
아마도 땅주인에게 오랫동안 쓸모 없다
밉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이 나무를 안다
삼십 년 가까운 옛날의 모습을 안다
지금 스물여덟인 딸아이
제 엄마 뱃속에 들어 있을
때
공주로 학교를 옮기고 이사갈 요량으로 이 집 저 집
빈 방 하나 얻기 위해 다리 아프게 싸돌아 다닐 때
처음 만났던 나무가
이 나무다
빈방이 있기는 하지만 아이 딸린 나 같은 사람에게
못 주겠노라 거절당하고 나오면서 민망하고
서러운 이마로 문득
맞닥뜨린 나무가 바로 이 나무다
저나 내나 용케 오래 살아남았구나
오며 가며 반가운 친구 만나듯
만나곤 했었지 꽤나 오랜 날들이었지
그런데 그만 올봄엔
무사히 넘기지 못하고
일을 당하고 만 것이다
둥그런 그루터기로만 남아 있을 뿐인 저것은
나무의 일이 아니다
나의 일이고
당신의 일이다
고욤감나무 사이
나 홀로 여기와 오늘 슬퍼하노니
욕스런 목숨을 접고 부디 편히 잠드시라
아름다운 짐승
젊었을 때는 몰랐지
어렸을 때는 더욱 몰랐지
아내가 내 아이를 가졌을 때도
그게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 아름다운
일인지
모른 채 지났지
사는 일이 그냥 바쁘고 힘겨워서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고 옆을 두리번거릴 짬이 없었지
이제 나이
들어 모자 하나 빌려 쓰고 어정어정
길거리 떠돌 때
모처럼 만나는 애기 밴 여자
커다란 항아리 하나 엎어서 안고 있는 젊은
여자
살아 있는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또 한 사람을
그 뱃속에 품고 있다니!
고마운지고 거룩한지고
꽃봉오리 물고 있는 어느
꽃나무가 이보다도 더 눈물겨우랴
캥거루는 다 큰 새끼도 제 몸속의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오래도록 젖을 물려 키운다
그랬지
그렇다면 캥거루는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짐승 아니겠나!
캥거루란 호주의 원주민 말로 난 몰라요, 란
뜻이랬지
캥거루, 캥거루, 난 몰라요
아직도 난 캥거루다
시계에게 밥을 먹인다
한밤중에 깨어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는다
이런, 이런, 태엽이 많이 풀렸군
중얼거리며 양쪽 태엽을 골고루 감는다
어려서
외할머니는 괘종시계 태엽을 감는 것을
시계에게 밥을 준다 그랬다
이 시계는 아내보다도 먼저 나한테 온 시계다
결혼하기 전 시골
학교에 시계장수가 왔을 때 월부로 사서
고향집 벽에 걸었던 시계다
우리 집에도 괘종시계가 다 생겼구나!
아버지 어머니 보시고
좋아하셨다
오랜 날, 한 시간마다 한 번씩 하루에 스물네 번씩
그 둥글고도 구슬픈 소리를 집안 가득 풀어놓곤 했었다
어려서
외할머니는 시계가 울릴 때마다 시계가
종을 친다고 말씀하곤 했었다
시계 속에 종이 하나 들어 있다는 것을 나는 결코 의심할 줄
몰랐다
그러나 이 시계 고향집 벽에서 내려지고 오랫동안
헛방에 쑤셔 박혀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몇 해 전 우리 집으로
옮겨 온 뒤
다시 나하고 함께 살게 되었다
친구야, 밥이나 많이 먹어 밥이나 많이 먹어
나는 새벽에 잠깨어 중얼거리며 시계에게
밥을 먹인다
노(櫓)
아들이 군에 입대한 뒤로
아내는 새벽마다 남몰래 일어나 비어있는 아들방 문앞에 무릎 꿇고 앉아 몸을 앞뒤로 시계추처럼 흔들며 기도를 한다
하느님 아버지, 어떻게 주신 아들입니까? 그 아들 비록 어둡고 험한 곳에 놓일지라도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채금져 주옵소서
도대체 아내는 하느님한테 미리 빚을 놓아 받을 돈이라도 있다는 것인지 하느님께서 수금해주실 일이라도 있다는 것인지 계속해서 채금(債金)져 달라고만 되풀이 되풀이 기도를 드린다
딸아이가 고3이 된 뒤로부터는 또 딸아이방 문앞에 가서도 여전히 몸을 앞뒤로 흔들며 똑같은 기도를 드린다
하느님 아버지, 이미 알고 계시지요? 지금 그 딸 너무나 힘든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오니 하느님께서 그의 앞길에 등불이 되어 밝혀주시고 그의 모든 것을 채금져 주옵소서
우리 네 식구 날마다 놓인 강물이 다를 지라도 그 기도 나룻배의 노(櫓)가 되어 앞으로인 듯 뒤로인 듯 흔들리며 나아감을 하느님만 빙긋이 웃으시며 내려다보시고 계심을 우리는 오늘도 짐짓 알지 못한 채 하루를 산다.
안쓰러움
오늘 새벽에 아내가 내 방으로 와
이불 없이 자고 있는 나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새우처럼 구부리고 자고 있는 내가
많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잠결에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어젯밤에는 문득 아내 방으로 가
잠든 아내의 발가락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다가 돌아왔다
노리끼리한 발바닥 끝에 올망졸망 매달려있는
작달만한 발가락들이 많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아내도 자면서 내 마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다른 방을 쓰고 있다
출처, 네블,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