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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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시모음

휘수 Hwisu 2016. 5. 8. 20:30

가톨릭대 국문과와 同 대학원 졸업

1993년 《현대시사상》에 시 〈우리는 찬양한다〉 등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극에 달하다』(1996),『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2006)

『눈물이라는 뼈』(2009)와 산문집 『마음사전』(2008)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

 

사람이 아니기를 
          
나비가
벌레였던 기억을 날개에 얹고서 무덤을 향해 날아갔다 누워 있던 과실의 썩은 부위에서 저도 모르게

포식의 향연을 벌였던 기억 하나, 주둥이에 아프게 남아 있었다 부패 식당 안내 지도가 그 편편한 날개에는

대칭으로 새겨져 있었다 문갑의 경첩이 된 지 팔백 년, 네 마리의 나비가 편안하게 수문장으로 내생을 살고 있다

말매기가
팔딱대던 날개를 접었다 수액을 빨고 나면 입을 한번 닦고 나면 큰 호흡을 하고 나면 살갗이 아프도록 울음을

울었다 지극하게 통곡한 이후에는 짝을 불러 지독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는 육신을 버렸다 그것 또한 수백

년 전, 두 마리의 말매기가 서랍장 손잡이가 되어 알뜰하게 저승을 살고 있다

보름달이
그럴 때는 문짝 안에서 진경산수와 십장생을 비춘다

흐르는 물이거나
사슴이거나
모란이거나
바위이거나
죽림이거나

모두 한통속이 되어
사람이 아니기를
꿈꾸었다 한다

사람 하나
경대 앞에 앉아서 분첩을 열어 얼굴에 바른다 주근깨를 지우고 기미를 지우고 흉터를 지운다 눈썹을

그리고 눈동자를 그리고 입술을 그려서 여자를 만든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 비슷한 것으로 살다가 사람이

아니어지는 이 세월, 어리석어도 좋고 저속해도 좋고 잔인해도 좋다며, 다시 사람인 것으로 환치시키려고

붉은 연필을 들고 안달을 내는 중이다

(유심, 2006 겨울)

 

미래가 쏟아진다면

 

나는 먼 곳이 되고 싶다

 

철로 위에 귀를 댄 채

먼 곳의 소리를 듣던 아이의 마음으로

 

더 먼 곳이 되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할까

꿈속이라면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악몽을 꾸게 될 수도 있다

 

몸이 자꾸 나침반 바늘처럼 떨리는 걸로 봐서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봐 괴로워하면서

몸이 자꾸 깃발처럼 펄럭이는 걸로 봐서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을까봐 괴로워하면서

 

무녀리로 태어나 열흘을 살다 간

강아지의 마음으로

그 뭉근한 체온을 안고 무덤을 만들러 가는

아이였던 마음으로

 

꿈에서 깨게 될 것이다

울지 마, 울지 마

라며 찰싹찰싹 때리던 엄마가 실은

자기가 울고 싶어 그랬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가 될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여기에 와서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든다

 

꿈이라면 잠깐의 배웅이겠지만

불행히도 꿈은 아니라서 마중을 나온 채

그 자리에서 어른이 되어간다

마침내 무엇을 기다리는지 잊은 채로

 

지나가는 기차에 손을 흔들어주는

새까만 아이였던 마음으로

 

지금 나는 지나가는 기차가 되고 싶다

 

목적 없이도 손 흔들어주던 아이들은

어디에고 있다는 걸 알고 싶다

 

장난감의 세계

  

전화국을 지나

병원을 지나 삼거리에 밥 먹으러 나갔다

생선 한 마리를 오래 발라 먹었다

 

제 몸 몇 배쯤의 나방을

머리통만 야무지게 먹고서 나머지를 툭 버려버리는

도마뱀을 지켜보면서

 

하루의 절반

나머지 절반

 

어떤 절규가 하늘을 가로질러 와 발밑에 떨어졌다

나는 오후에 걸쳐 있었고 수요일에 놓여 있었다

 

같은 장소에 다시 찾아왔지만

같은 시간에 다시 찾아가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없었던 것들이 자꾸 나타났고

있었던 것들이 자꾸 사라졌다 이를테면

장난감을 선물 받은 가난한 아이처럼

믿어지지 않게 믿을 수 없게

 

아침에만 잠시 반짝거리는 수만 개의 서리

 

하루의 절반

나머지 절반

 

오전엔 건너의 소가 소에게 뿔을 들이받았고

오후엔 어미 고양이가 아기 고양이를 물고 다녔다

 

개구리야, 너는 가난했던 내 어린 시절에 장난감이었단다

그때 나는 장난감의 내부를 꼭 뜯어보고야 말았지

 

개구리를 따라 강가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

강가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깊어 빠져 죽기에 충분했다.

 

경배

 

나쁜 짓을 이제는 하지 않아

나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

 

좋아하는 친구가 베란다에서 키운 부추를 주어서

나란히 누운 부추를 찬물에 씻지

좋아하는 친구가 보내준 무쇠 프라이팬에 부추전을 부치지

젓가락을 들고 전을 먹는 동안에

 

나쁜 음악을 이제는 듣지 않아

나쁜 생각들을 완성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

부추를 먹는 동안엔 부추를 경배할 뿐

 

저편 유리창으로 젓가락을 내려놓는

너의 모습이 보였는데

왜 그렇게 맨날 억울한 얼굴이니

 

병이 멈추었니

비명이 사라졌니

 

나의 병으로 너의 병을 만들던 짓을 더 해주길 바라니

예의를 다해 평범해지는 일을 너는 경배하게 된 거니

 

참 독하다 참 무섭다 하면서

너를 번역해줄 일이 이제는 없겠다

 

모든 게 끔찍한데

가장 끔찍한 게 너라는 사실 때문에

너는 누워 잠을 자버리지

다음 생에 깨어날 수 있도록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에 익숙해져버렸지

익숙해져버린 나를 적응하지 못한 채 절절매지

젓가락을 들어 올려

전을 다 먹을 뿐

 

만약 이 세상이 대답이었던 것이라면

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더 강하고 더 짙은 이 부추였을까

병이 멈추어버린 병은 어떻게 아픈 척을 해야 할까

 

부추를 받고 귀여운 인형을 친구에게 건넸지

무쇠 프라이팬을 받고 예쁜 그림책을 친구에게 건넸지

 

귀엽고 예쁘게

여리고 선량하게

 

혼자 있을 때마다 나쁜 것들만 떠올리는데

나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아

가지런한 부추들

파릇한 부추들

 

마흔 살

 

   먼 훗날,
   내 손길을 기억하는 이 있다면
   너무 늙지 않은 어떤 때
   떨리는 목소리로 들려줄
   시 한 수 미리 적으며
   좀 울어볼까 한다
   햇살의 손길에 몸 맡기고
   한결 뽀얘진 사과꽃 아래서
   실컷 좀 울어볼까 한다
   사랑한다는 단어가 묵음으로 발음되도록
   언어의 율법을 고쳐놓고 싶어 청춘을 다 썼던
   지난 노래를 들춰보며
   좀 울어볼까 한다
   도화선으로 박음질한 남색 치맛단이
   불붙으며 큰절하는 해질녘
   창문 앞에 앉아
   녹슨 문고리가 부서진 채 손에 잡히는
   낯선 방
   너무 늙어
   몸 가누기 고달픈 어떤 대에
   사랑을 안다 하고
   허공에 새겨넣은 후
   남은 눈물은 그때에 보내볼까 한다
   햇살의 손길에 몸 맡기고
   한결 뽀얘진 사과꽃 세상을
   베고 누워서
 

『문학동네』2006년 여름호발표

 

1984년


   기름 얼룩에 절은 옷가지며 이불들 어머니는 개켰다 폈다만 하였
다 풍경이 일그러진 집안 내력을 장마 끝에다 널어 놓았다 양지에 앉
아서 동생은 젖어 못 쓰게 된 일기장을 태웠다 잘 타지 못하는 젖은
생각들이 매운 연기를 피워 올렸다 하얀 안개를 내뿜으며 저편에서
소독차가 달려왔다 꽁무니에는 아이들이 우루루 따라가고 있었다 휘
어지고 모서리가 터진 장롱처럼 나는 골목에 우두커니 세워져 있었
다 소각되는 미래가 집집마다 연기로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곰팡이 호흡을 했다
        아침도 어두웠다
        조그만 비에도 우리는 어지러웠다
        물의 발바닥이 밟고 다니는 낮은 위치를
        더 낮게 낮추기도 했다
        꿈들은 자꾸 누전되었다
        고래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는 젖은 꿈을 꾸었다
        물이 빠진 자국은 뚜렷한 선을 남겼고
        우리는 해마다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주문을 외며
        도배지를 발랐다


        더 이상은 젖을 꿈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슨 힘일까,
        벽지를 들고 곰팡이가 일어서고 일어나는 지칠 줄 모르는 그것은

 


     『시의 몰락, 시정신의 부활』  21세기 전망 제5시집, 김영사 刊 중에서

 

빛의 모퉁이에서
 

 어김없이 황혼녘이면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간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


 이따금 나는 무지막지한 덩치가 되고
 이따금 나는 여러 갈래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의 충고를 따르자면
 너무 빛 쪽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불빛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茶山)은 국화 그림자를 완성하는 취미가 있었다지만
 내 그림자는 나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는 것 같다


 커다란 건물 아래에 서 있을 때
 그는 작별도 않고 사라진다


 내가 짓는 표정에 그는 무관심하다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에 그는 관심이 있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지금은 길을 걷는 중이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포커페이스

 
알바트로스 새끼가 생후 6개월에 사망했다
뱃속에서 나온
라이터 펌프식 스프레이 엽총탄환
부러진 빨래집게 병뚜껑
수백 개 플라스틱 조각들
 

어미가 힘찬 날개짓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애절하게 애절하게
새끼에게 먹인 것들
 

먹지 못해서가 아니라
먹지 않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먹고서
굶어죽을 때.
 

열다섯 살 네팔 소년 람 바하두르 바미안이
바라마을 보리수 아래에거 6개월째
물 한 방울 먹지 않고 명상하고 있다


부처가 환생한 것이라고
10만 관광객이 몰려왔고


아무 것도 먹지 않은
6개월간의 먹이에 대해
네팔 당국은 강한 호기심을 표했다


그 시절 그때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싯다르타도 부처가 되진 못했으리라


시끄럽고 어수선하여
못해먹겠다 환속하고는


끝까지 가는 데에
무관심만한 관심은 없다고
일기를 남겼을 것이다

 

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

 

입술을 조금만 쓰면서
내 이름을 부르고 나니
왼 손바닥이 가슴에 얹히고
나는 조용해진다


좁은 터널을 통과하려는
물줄기의 광폭함에 가슴이 뻐근할 뿐이다


슬프거나 노여울 때에
눈물로 나를 세례하곤 했다
자동우산을 펼쳐 든 의연한 사내 하나가
내 처마 밑에 서 있곤 했다


이제는
이유가 없을 때에야 눈물이 흐른다


설거지통 앞
하얀 타일 위에다
밥그릇에 고인 물을 찍어
시 한 줄을 적어본다


네모진 타일 속에는
그 어떤 암초에도 닿지 않고
먼길을 항해하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방주가 있다


눈물로 바다를 이루어
누군가에게 방주를 띄우게 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평생토록 새겨 왔던 비문(碑文)에
습한 심장을 대고
가만히 탁본을 뜨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계간 『세계의문학』2006년 가을호 발표
 

이 몸에 간질간질 꽃이 피었네

 

오래도록 밟아서 생긴 숲길을
아무 작정 없이 걸어보았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눈치 채는 이가 없었네
품에 안겼던 사내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게 되자
심장에 뿌리를 박고
분꽃들이 만개했네
다 알 만한 물방울이
풀 끝에 맺혀 있었네
아득히 들리던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칠 때
땀구멍을 뚫고 채송화가 피었네
멀리 누런 벼들은
논바닥에 발톱 벗어둔 채
누워 있었네
나는 발이 시렸네
발가락 사이로 패랭이가 피었네
허벅지를 타고 나팔꽃이 만개했네
오래도록 밀봉해 둔 과실주를
아무 작정 없이 열어 독배하였네
새들이 울어댈 때 귓속에 길이 열렸네
길을 잃어도 길 속에 있었네

 

시집『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민음사, 2006) 중에서 

 

끝물 과일 사러

 

  끝물은
  반은 버려야 돼.
  끝물은 썩었어. 싱싱하지 않아.


  우리도 끝물이다.
 

  서로가 서로의 치부를 헛짚고
  세계의 성감대를 헛짚은.
  내리 빗나가던 선택들. 말하자면
  기다림으로 독이 남는 자세.
  시효를 넘긴 고독. 일종의 모독.
  기다려온 우리는 치사량의 관성이 있을 뿐.
  부패 직전의 끝물이다.


  제철이 아니야.
  하지만 끝물은
  아주
  달아.
 

시집 『극에 달하다』(문학과 지성사,1996) 중에서

 

그래서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잔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다행한 일들

 

비가 내려, 비가 내리면 장롱 속에서 카디건을 꺼내 입어, 카디건

꺼내 입으면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조개

기가 만져져, 아침이야

 

비가 내려, 출처를 알 수 없는 조개껍데기 하나는 지난 계절의 모든

바다들을 불러들이고, 모두가 다른 파도, 모두가 다른 포말, 모두가

른 햇살이 모두에게 똑같은 그림자를 선물해, 지난 계절의 기억나

않는 바다야

 

지금은 조금 더 먼 곳을 생각하자

런던의 우산

퀘벡의 눈사람 아이슬란드의 털모자

너무 쓸쓸하다면,

 

봄베이의 담요

몬테비데오 어부의 가슴장화

 

비가 내려, 개구리들이 비가 되어 쏟아져 내려, 언젠가 진짜 비가

리는 날은 진짜가 되는 날, 진짜 비와 진짜 우산이 만나는 날, 하

의 위독함이 우리의 위독함으로 바통을 넘기는 날,

비가 내려,

 

비가 내리면 장롱 속 카디건 속 호주머니 속 조개껍데기 속의 바다

물고기들이 더 깊은 바닷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모두가 똑같은 부레

지녔다면? 비가 내릴 일은 없겠지,

비가 내려, 다행이야

 

<눈물이라는 뼈> 문학과지성사 2009

 

먼지가 보이는 아침

 

조용히 조용을 다한다

기웃거리던 햇볕이 방 한쪽을 백색으로 오려낼 때

 

길게 누워 다음 생애에 발끝을 댄다

고무줄만 밟아도 죽었다고 했던 어린 날처럼

 

나는 나대로

극락조는 극락조대로

 

먼지는 먼지대로 조용을 조용히 다한다

 

                 시집『수학자의 아침』중

 

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

 

 

입술을 조금만 쓰면서
내 이름을 부르고 나니
왼 손바닥이 가슴에 얹히고
나는 조용해진다


좁은 터널을 통과하려는
물줄기의 광폭함에 가슴이 뻐근할 뿐이다


슬프거나 노여울 때에
눈물로 나를 세례하곤 했다
자동우산을 펼쳐 든 의연한 사내 하나가
내 처마 밑에 서 있곤 했다


이제는 
이유가 없을 때에야 눈물이 흐른다


설거지통 앞
하얀 타일 위에다
밥그릇에 고인 물을 찍어
시 한 줄을 적어본다


네모진 타일 속에는 
그 어떤 암초에도 닿지 않고
먼길을 항해하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방주가 있다


눈물로 바다를 이루어
누군가에게 방주를 띄우게 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평생토록 새겨 왔던 비문(碑文)에
습한 심장을 대고
가만히 탁본을 뜨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소설 읽어주던 여자

시체처럼 잠든 당신, 그 고요함의 끝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 어떤 것을 향해서도 손짓 한 번 하지 않았던 당신의, 창문을 기웃거리는 방문객의 인기척에도 무신경했던 당신의, 너무 깊이 잠들어버린 고독 같은 것들, 당신의 머리맡에서 한 권 소설책을 다 읽어주고 싶었다

나는 듣고 있었다 당신 등에 꽂힌, 다 돌아가 맥이 풀린, 그 녹슬고 지친 태엽이, 천천히, 빽빽히, 감기는, 금속의 소리를. 방바닥에 누운 머리카락 그 끝마다 작고 깨끗한 꽃망울들이 터지곤 했던 소리를 나 듣고 있었다 더럽게 눈부셨다 나는 책을 덮는다 꽃이 꽃답게 피게 하기 위하여 나는 무릎을 세우고 책을 덮는다

 

주동자

 

장미꽃이 투신했습니다

 

담벼락 아래 쪼그려 앉아

유리처럼 깨진 꽃잎 조각을 줍습니다

모든 피부에는 무늬처럼 유서가 씌어 있다던

태어나면서부터 그렇다던 어느 농부의 말을 떠올립니다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경멸합니다

나는 장미의 편입니다

 

장마전선 반대를 외치던

빗방울의 이중국적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이

모두 다 아는 일이 될 때까지

빗방울은 줄기차게 창문을 두드릴 뿐입니다

창문의 바깥쪽이 그들의 처지였음을

누가 모를 수 있습니까

 

빗방울의 절규를 밤새 듣고서

가시만 남아버린 장미나무

빗방울의 인해전술을 지지한 흔적입니다

 

나는 절규의 편입니다

유서 없는 피부를 경멸합니다

 

쪼그려 앉아 죽어가는 피부를 만집니다

 

손톱 밑에 가시처럼 박히는 이 통증을

선물로 알고 가져갑니다

선물이 배후입니다

 

수학자의 아침

 

나 잠깐만 죽을게

삼각형처럼

 

 

정지한 사물들의 고요한 그림자를 둘러본다

새장이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겨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안겨 있는 사람을 더 꼭 끌어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기억을 상상하는 일이다

눈알에 기어들어 온 개미를 보는 일이다

살결이 되어버린 겨울이라든가, 남쪽 바다의 남십자성이라든가

 

나 잠깐만 죽을게

단정한 선분처럼

 

수학자는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을 세기로 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의 이항대립 구조를 세기로 한다

 

숨소리가 고동 소리가 맥박 소리가

수학자의 귓전에 함부로 들락거린다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눈물 따위와 한숨 따위를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잘 살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요

 

 

 

잠깐만 죽을게,

어디서도 목격한 적 없는 온전한 원주율을 생각하며

 

사람의 숨결이

수학자의 속눈썹에 닿는다

언젠간 반드시 곡선으로 휘어질 직선의 길이를 상상한다

 

 시집『수학자의 아침』(2013)

 

눈물이라는 뼈

 

누군가 내게 물었다. 시를 쓰는 힘은 도대체 어떤 거냐고. 나는 대답했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힘이라고. 이 세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이 세계에서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꽤 괜찮은 일이 시를 쓰는 일이라고. 그리곤 말로 뱉진 못했지만, 나는 이 말을 하고 있었다. 실은 우리는 유령이에요. 지금 보고 계시는 나는 내가 아니에요. 언제나 나는 내가 아니었고, 이런 뜬금없고도 근원적인 질문들이 던져졌을 때에 반가운 주인나리의 발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강아지처럼 순순히 대답을 하는 지금 같은 순간만 내가 돼요. 그 밖의 것들엔 도무지 관심이 없는 단지 유령이에요. 오늘 하루를 어제 하루와 겹쳐서 살고 오늘 하루를 내일 하루와 포개어서 지나가는 헛것이에요. 과거에도 그랬구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내 대답을 듣고 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사람은 시인을 이해했을까. 나는 과연 시인에 대해 이제는 이해하고 있을까. 시인은 어쩌면, 능력은 말소되고 기억만이 보존된 신이 아닐까.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고 그 누구의 기도도 경청할 수 없으며 그 무엇도 창조하지 못하다는 비애. 그러나 저만치 심원 너머에서는 어쩌면 한 번쯤은 그래본 적이 있었을 것만 같은, 이 아련한 손끝의 감촉들. 부재하는 능력과 존재하는 기억이 한 몸뚱이에서 녹슨 뼈처럼 삐걱대는 소리를, 시인은 어쩌면 받아적는 중이지 않을까. 그럼으로써 시인은 투명해지는 사람. 그럼으로써 시인은 사라지는 사람. 그럼으로써 시인은 정확해지는 사람. 그렇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