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수 Hwisu, 구름 북소리

詩가 내게 찾아오는 때, 탈주 2 / 고재종 (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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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내게 찾아오는 때, 탈주 2 / 고재종 (펌)

휘수 Hwisu 2006. 2. 13. 00:43
탈주, 상승과 추락

일상이라고 했다. 일상은 지옥 같은 것인가. 저주스런 것인가. 권태스럽고 따분한 것인가. 무의미한 것인가. 누군 일상을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신이나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는데 일탈, 곧 일상에서의 탈주란 웬 말인가. 일상은 이상과 끝까지 배치되기만 하는 것인가.
먼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상인의 모습을 다음 두 편의 시를 통해 살펴보자.

「알바트로스」 - 보들레르

자주 뱃사람들은 장난삼아
거대한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
바다 위를 지치는 배를 시름없는
항해의 동행자인 양 뒤쫓는 해조를.

바닥 위에 내려놓자, 이 창공의 왕자를
어색하고 창피스런 몸짓으로
커다란 흰 날개를 놋대처럼
가소 가련하게도 질질 끄는구나.

이 날개 달린 항해자가 그 어색하고 나약함이여!
한때 그리 멋지던 그가 얼마나 가소롭고 추악한가!
어떤 이는 담뱃대로 부리를 들볶고,
어떤 이는 절뚝절뚝, 날던 불구자 흉내낸다!

시인도 폭풍 속을 드나들고 사수를 비웃던
이 구름 위의 왕자 같아라
야유의 소용돌이 속에 지상에 유배되니
그 거인의 날개가 걷기조차 방해하네

「빵집이 다섯 개 있는 동네」 - 최정례

우리 동네엔 빵집이 다섯 개 있다
빠리바게뜨, 엠마
김창근 베이커리, 신라당, 뚜레주르

빠리바게뜨에서는 쿠폰을 주고
엠마는 간판이 크고
김창근 베이커리는 유통기한
다 된 빵을 덤으로 준다
신라당은 오래돼서
뚜레주르는 친절이 지나쳐서

그래서
나는 빠리바게트에 가고
나도 모르게 엠마에도 간다
미장원 냄새가 싫어서 빠르게 지나치면
김창근 베이커리가 나온다
내가 어렸을 땐
학교에서 급식으로 옥수수빵을 주었는데

하면서 신라당을 가고
무심코 뚜레주르도 가게 된다
밥 먹기 싫어서 빵을 사고
애들한테도
간단하게 빵 먹어라 한다

우리 동네엔 교회가 여섯이다
형님은 고3딸 때문에 새벽교회를 다니고
윤희엄마는 병들어 복음교회를 가고
은영이는 성가대 지휘라서 주말엔 없다
넌 뭘 믿고 교회 안 가냐고
겸손하라고
목사님 말씀을 들어보라며
내 귀에 테이프를 꽂아놓는다

우리 동네엔 빵집이 다섯
교회가 여섯 미장원이 일곱이다
사람들은 뛰듯이 걷고
누구나 다 파마를 염색을 하고
상가 입구에선 영생의 전도지를 돌린다
줄줄이 고깃집이 있고
김밥집이 있고
두 집 걸러 빵 냄새가 나서
안 살 수가 없다

그렇다
살 수밖에 없다

보들레르는『악의 꽃』이란 시집으로 세계의 유일무이한 시인의 왕좌를 누린 사람이다. 누군 그를 ‘저주받은 시인’ 혹은 ‘지상의 낯선 자’라고 명명하고, 실제 그의 이 지상에서의 삶이 고통과 빚더미와와 병고의 연속이었지만, 세계문학 전반에 걸쳐 이의 없이 현대시의 원천으로 불리는 그다.
그가 의붓아비의 법과대학 공부의 기대를 저버리고 문학과 반항과 한량생활로 터무니없는 빚을 지고 궁지에 몰리자 가족회의 끝에 그를 캘커타로 가는 배에 강제로 태워 먼 항해를 보낸다. 의부의 생각은 그런 항해를 통해 그의 의지박약과 탐닉적인 성격을 교정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항해 중에도 일부러 갖은 혐오감을 자초하여 뱃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
그런데 항해 중에는 때로 예상 밖의 사건들이 많이 생겨 선원들이 돌고래를 잡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맑게 개인 어느 날, 배는 수평선 이외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다 위를 떠나고 있었다. 바다는 푸르다 못해 검푸른 색을 띠었다. 그때 한 군인이 소총으로 돛대 주위를 떠돌던 알바트로스를 잡았다. 날개를 펴면 3m나 되는 이 바닷새는 信天翁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큰 체구 때문에 육지와 육지 가까운 항구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새가 아니다. 그 거구와 큰 날개를 한껏 펴고 비상하자면 한없이 펼쳐진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겠다. 선원들은 항해 도중 바다 한가운데서 간혹 이 새를 만나게 되는데, 일단 날개를 펴고 넓은 하늘을 비상할 때면 그 웅대한 모습이 가히 <새 중의 새>요 <하늘의 왕>이라 불릴만하다.
선원들은 날개에 총알이 박혀 부상을 입고 붙잡힌 이 새를 뱃전에 묶어놓아 새는 며칠동안 포로 신세가 되었다. 선원들은 이 포로를 온갖 방법으로 괴롭혔다. 긴 날개를 질질 끌며 허우적거리는 꼴을 보며 즐기기 위해 꼬챙이로 찔러보기도 하고 그 불구를 흉내내기도 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에 배를 잡고 웃어댔다. 체격이 건장한 선원이 알바트로스에 다가가 달궈진 파이프로 눈을 지져 눈을 멀게 하는 순간 보들레르는 <이 잔인한 인간에게 달려들었다. 선장이 달려와 둘을 떼어놓을 때까지 발길질과 주먹질을 그치지 않았다>고 동승하고 있던 한 승객이 훗날 전했다.
어쨌든 이 사건의 기억으로 보들레르는 위 시「알바트로스」를 쓰게 됐는데, 선원들에게 붙들려 온갖 수난을 겪는 날게 꺾인 알바트로스는 결국 후에 대중들에게 박해받고 신음하는 시인 자신의 알레고리가 된다. <폭풍 속을 넘나들며 사수의 화살 따위는 우습게 알던> <창공의 왕자>, 그러나 이제 천박한 뱃사람들 사이에 유배당한 신세가 되니 거대한 날개는 되레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이 신음하는 알바트로스가 바로 이해 받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고뇌에 찬 시인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 날개 꺾인 알바트로스와 오늘날의 일상인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날개 꺾인 알바트로스는 단지 현대의 시인에 대한 상징일 뿐인가. 아니다. 날개 꺾인 알바트로스는 시인만이 아니라 오늘날 슬프디 슬픈 일상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저는 여성들을 좋아하니까 여성들 이야기부터 해보자. 여러분은 세상에 태어나 꽃다운 청춘을 다 보내며 폭군 같은 남편의 시중이나 안암팎으로 들려고 이 세상에 왔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꿈과 미래를 다 저당 잡혀서는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하고자 오늘을 살아가는가. 혹시 직장에 다니고 있는 분이라면 당신들은 그 직장의 물심부름, 차심부름이나 하는 ‘꽃순이’나 되려고 그 어렵고 어려운 대학을 공부하였는가.
왜 무시당하는가. 왜 손가락질 당하는가. 왜 희롱 당하는가. 그리고는 왜 소리 죽여 우는가. 왜 술 한 잔에 울부짖는가. 그리고는 이제 늙어가려는가. 그리고는 이제 병고에나 시달리려는가. 그리고 이제는 죽음이나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가.
최정례의「빵집이 다섯 개 있는 동네」을 보자. 우리가 이렇게 빵집 수나, 교회 수나, 미장원 수나 세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이 빵집은 어떻고 저 빵집은 어떻고 하면서나 살아가야 하는가. 제 입맛대로 이 교회를 가자, 저 교회를 가자 하면 이 교회는 고3예수, 저 교회엔 질병예수, 은영이 교회는 성가대 예수, 불신자 교회는 테이프예수인가.
한마디로 자기의 정체성도 잃어버리고, 그토록 찬란했던 모든 꿈에서도 차단당한 채 하루하루를 먹고 일하고 자는 일의 반복에나 힘쓰고, 시시껄렁한 세상 잡사에나 일희일비하고, 기껏해야 권력과 재산과 섹스에나 두 눈에 불을 밝히고 사는 것이 일상인의 모습이 아닌가.
7-80년대의 거대담론이 사라진 후 90년대 전반에 걸쳐 일상성에 천착한 시나 소설들이 전경린의「염소 모는 여자」등을 필두로 무척 출현하였는데, 일상성의 회복이란 긍정적 화두를 달았음에도 바로 지금까지 우리의 일상이 권태와 환멸로 너무도 훼손되어 있었다는 반증이라고 보아도 되겠다. 어쨌든 자본주의의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어쩌면 존재하기 위해 일상을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그게 알바트로스적 삶이나 빵집이 다섯 개 있는 동네 속의 삶이라면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권태스럽고 환멸스러울 것인가. 사실 이런 지경에 놓여 있으면서도 자본이 가져다주는 상품과 환락에 취해 기의가 사라진 기표, 곧 허상의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그걸 깨닫고자 하는 노력을 애써 거부하고 있는 우리가 아닌가. 그리고는 막상 죽음을 맞닥뜨려선 통한의 눈물이나 흘리는 것인가.
그런데 그런 일상을 탈주하고자 하는 시의 노력들이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사라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죽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방주-2에게」- 박형준

그것은 다라에 붙어 있었다.
그것이 자랄수록 다리는 하늘로 떠올랐다.
인생이란 때로 붉은 다라에서 바라본
물빛 세로줄무늬가 연속된 비닐 천막의
천장인지 모른다, 포장마차 속
아이는 다라에 눕혀져 키워졌다.
흰 실로 몸을 친친 감은 누에고치처럼.
뜨내기 손님들이 남긴 생의 얼룩이
카바이트 불빛 아래 고여가는 雨期의 밤,
포장을 때리는 쉼없는 빗소리에
아이는 한 겹씩 고치를 벗고 있다.
나비로 탈바꿈할 때까지, 비가 내린다.

우동을 파는 어미의 고단함 잠에 떠밀려
새벽을 견디는 시방의 포장마차 속
아무도 눈여겨본 적 없는 한 척의 배가,
조심스레 아이를 품고 물거품 이는
해변의 풍요로운 기슭으로 간다.
세로줄무늬의 천장 위로
비가, 그치고 있다.
파리 떼가 푸른 등을 반짝이며
점점이 박혀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두 편의 시를 보았다. 황지우의 시는 사회정치학적 상상력을 담고 있고, 박형준의 시는 일상적 미시담론을 담고 있는 시이다.
7-80년대를 산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때 극장에 가면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화면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곧바로 ‘대한 늬우스’가 시작되어 우리는 본영화를 보려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걸 보아야 했다. 그걸 시인은 발견적 상상력을 통해 시 속으로 끌어들이는데 특히나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을숙도에서 환상적으로 치솟아 오르는 철새들의 군무 화면을 보며 80년대 5공의 군사독재 하에 놓인 우리들의 현실 혹은 일상에 대한 반발과 그것에서의 탈주 욕망을 너무도 간절하게 유추해본다. 하지만 애국가가 끝남과 동시에 모두가 제 자리에 주저앉듯이 우리도 그런 민주와 자유의 환상적 꿈에서 깨어나 다시 억압과 착취의 현실 속에 털썩 주저앉고 만다.
한마디로 탈주에의 욕망은 상승과 추락의 공식을 거치고 만다. 박형준의 시도 마찬가지다. 포장마차를 하는 어미 때문에 그 속의 다라에 눕혀져 자랄 수밖에 없는 아이의 운명이 너무 안타깝다. 아마도 그 어미는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이 없으니 홀로 된 사람일 테고 또 장마기의 우울한 날씨가 배경이 되었으나 눈보라가 친다 해도 아이는 역시 그 포장마차 속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어찌 안쓰럽지 않았으랴. 결국 시인은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포대기에 쌓인 누에고치 같은 아이가 빗소리에 나비로 탈바꿈하고, 그 아이가 담긴 다라가 한 척의 배가 되어 해변의 풍요로운 기슭으로 나아가는 꿈, 그 상승의 꿈, 그 화려한 환상, 빗소리에 맞추어 되레 우기의 세상이 나비가 날고 풍요가 있는 새로운 나라로 환치되어 상승하는 환상이 얼마나 눈부시고 찬란한가. 하지만 음악이 되었던 빗소리가 그치자 순간 그 환상은 여지없이 박살나고 그토록 욕망했던 상승에의 꿈은 결국 그 아이 얼굴에 푸른 파리가 떼로 박혀 있는 현실을 보여주며 추락해버린다.
어쩌면 시인은 자본주의의 생리를 너무도 잘 아는지 모른다. 사실 홀로된 그 어미가 포장마차를 해서 많은 돈을 벌어들여 그 아이를 일류대학에 보내고 외국유학까지 시켜 크게 성공시키리라는 기대는 갖지 않은 게 좋을 것이라는 걸 오늘날 자본주의 생리의 기본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다 알 것이다. 이미 빈익빈 부익부의 계급구조가 공고화한 이 땅에서 그런 어미의 아이가 어찌 새로운 나라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고 믿겠는가. 그럼에도 시인은 상승에의 꿈을 꾸었다. 왜 그랬을까.

그리스 신화를 보면 이카루스란 인물이 나온다. 밀초로 붙인 깃털들의 날개로 바다 위를 날다가 밀초가 녹는 바람에 깃털들이 흩어져서 바다로 추락해버린 인물이다. 그 날개에 붙인 밀초가 왜 녹았는가. 하늘을 너무 높이 나는 바람에 뜨거운 태양에 날개가 닿을 지경이 되어 그런 것이다. 이카루스는 밀초로 날개를 붙인 것을 알면서도 왜 태양 가까이 날았을까. 솜씨 좋은 匠人인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절대로 높이 날지 말라고 당부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긴 이유는 무엇일까. 감옥을 빠져나와 높이 하늘을 날다 보니까 그만 오만해져서일까. 아니면 신은 인간의 理想이 태양보다 높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다. 이카루스는 예술가, 그중에서도 시인이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시인이어서 ‘규범’ 이상으로 상승하려고 했다. 예술은 언제나 규범을 벗어나는 것, 그러므로 장인의 솜씨를 능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규범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탈, 곧 탈주를 말하는 것이다. 예술은 판에 박은 어떤 틀을 떠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그것을 “우리를 묶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를 묶는 것들이란 지루한 일상의, 판에 박은 이미지들의 모든 것이다. 그것을 넘은 이카루스의 바다, 유토파아를 꿈꾸는 게 예술이다.
그러나 ‘상승-일탈-벗어나기’만 하면 ‘예술-본질’은 현실을 떠나버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카루스의 날개가 흩어져 추락하는 것이다. 영원히 추락하는 상승이다. 이카루스는 ‘벗어나기 하는, 하려는’ 예술의 날개를 지중해에 흩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바로 구체적 형상을 찾기 위해서다. 그런 진정한 예술적 창조에의 장애요인이 이카로스에겐 “밀초의 녹음”이다. 장애요인은 결국 다시 유토피아를 꿈꾸게 하는 것, 구체의 언어로 다가가려고 하지만 완전히 다가갈 수는 없게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상승-추락의 날개는 끝내 무엇일까.

「아주 오래된 약속」 - 김미승

시조새가 있었다, 아주 오래 전 해와 구름 은밀히 살을 섞는 신의 정원에 불륜처럼 날아오른. 천기를 염탐하다 신의 노여움으로 세상엔 눈이 내리고, 그칠 날 없이 눈이 내리고, 아직 깨어나지 못한 더운 알을 품은 채 화석이 되어버린 어미 시조새. 오랜 후…켜켜이 쌓인 형벌의 지층을 뚫고 약속처럼 깨어난 새끼 시조새, 등엔 잘려 나간 날개의 무덤을 지고 타박타박 사막을 걷는 낙타.

욱신거리는 어미의 등을 두드리며
아이가 묻는다
- 엄만 왜 자꾸 등이 아파?
- 응, 엄만 낙타거든
- 엄마 등엔 혹이 없잖아
- 있잖아, 너희 둘
- 그럼, 우리가 혹이야?
- 아니. 날개야, 날…개!
아이는 거울 앞에 모로 서서
제 등을 비추어 본다 거울 속으로
아득히 시조새 한 마리 날아오른다.

「황금나무 아래서」 - 권혁웅

황금나무를 본다
저 나무는 세계수, 하늘을 향해 직립한 채
부채 모양의 금빛 葉片들을 쏟아낸다
나무가 이곳에 뿌리내린 것은 아주 오래 전이다
저 금빛 환상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나무 위에 집을 짓는 족속이었을까

아가부터 젊은 연인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제단에 앉아 있다 저 신성한 이들의 황금시대를
기록할 문자가 나에겐 없다
다만 나는 내 안에서 기식하는 너무 많은 것들을
금빛 바람 위에 실어 보낼 뿐이다

내 몸을 온통 물들이는 황금나무를 보며
나도 몇 번의 제의를 거쳐온 듯하다
마르고 헐벗은 가지가 푸르고 노란빛으로
거듭 생을 치장하는 동안

내게도 두어 편 격절과 비약의 연대기가 있었다
이제 나무에 기대어 나는 내가 꾼 꿈들이
신화의 어느 먼, 지금은 잊혀진
하나의 家系였다고 생각하며

투두둑 떨어지는 황금의 알들을 줍는다
저것들을 버리면 새들이 날개로 덮거나
마소가 피해가리라 진동하는 냄새는
새로운 탄생의 後景이었던 셈,
나도 언젠가 卵生의 꿈을 꿀 것이다

상승과 추락의 변증법을 이해하기 위해 예시한 김미승의 작품이다. 이지엽의 평을 한번 들어보자.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의 아득함을 나는 잊지 못한다. 신화적인 신비와 현실적인 삶 사이를 질러나가는 어떤 채광이 나를 강하게 관통하고 지나갔다. 나는 거기에 애매하게도 ‘어떤’ 이란 수사 밖에는 쓸 수가 없다. 낮으면서도 은은한 그 빛은 고통으로 짠 은실 같았다. 그 햇빛의 저편에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흐리면서도 그러나 제법 또렷한 배경은 아이와 엄마의 두런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동안 놓여 있었다. 색이 바래고 윤곽이 흐렸지만 점으로 이어진 선들은 때로 울음소리라도 배어나올 듯 했다. 시인은 왜 하고 많은 것 중 시조새를 택했을까. 시조새는 무엇인가. 중생기 쥐라기 시대에 살았던 조류의 가장 오래된 조상으로 추정되는 화석 동물이다. 그러나 시조새는 늑골의 검상돌기가 없어 날지 못한다. 날지 못하는 새. 그 어미새는 마치 어찌어찌하다가 신의 노여움으로 버림받은 시인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새끼 시조새는 알에서 깨어나고 어미 시조새는 낙타가 되어 사막을 걷는다. 아예 날개는 잘라 버리고, 아니 ‘날개의 무덤’ 을 등에 이고서다. 그래서 이 쌍봉낙타는 등이 자꾸 욱신거리고 아프다. 삶이 고단하고 가야 할 길이 아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낙타다. 아이가 거울 앞에 섰을 때 반사된 빛에 눈이 부시고 아. 그래 드디어 아이가 새가 되어 날아가고 있다. 그래 어여 날아라. 훠이훠이 날아가거라. 환한 어미의 얼굴, 그 끄덕거림, 햇살이 와르르 쏟아져 은빛 날개짓 소리만 들린다. 이 시를 쓴 시인이 바로 김미승이다. 두 아이의 어머니이고 늘상 세상은 아픈 것투성이지만 억척스레, 건강하게 생에 대한 성찰을 남다르게 채색하고 있는 시인이다.”
내가 보건대 이 시의 묘미는 엄마와 아이의 대화에 있다. 현실적 삶의 고통 때문에 자꾸 등이 아픈 엄마에게 아이가 그 이유를 묻자 엄마는 자기가 낙타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곧이어 아이가 “엄마 등엔 혹이 없잖아” 하고 반문하자 “있잖아, 너희 둘”이라고 답한다. 사실 이 말은 아이에겐 모진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럼 우리가 혹이야?”라고 항변 섞인 말을 내뱉는 아이의 대응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속으론 어떨지 모르지만 아이들 앞에서 겉으로 그걸 내뱉는 부모는 별로 없다. 이의 실수를 깨달은 엄마는 “아니. 날개야, 날…개” 하며 아이를 안심시킨다. 아니 실제로 아이는 고통일 수 있지만 그야말로 우리의 삶을 추동시키는 환희의 날개일 경우가 더 많다. 상승했다 추락했다가 다시 한번 상승으로 치솟아 오르는 엄마의 마음이 곧 아이를 시조새가 되어 하늘 높이 날아오르게 한다. 젊은 시인에게서 결코 현실을 놓치지 않는 이런 꿈을 발견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다음은 권혁웅의 시를 보자. 그는 첫시집『황금나무 아래서』에서 역동적인 상상력과 치밀한 묘사로 아름다운 幻의 세계를 많이 이루어놓고 있다. 그의 시는 이미지즘의 세련된 국면을 많이 연출하고 있는데 이는 “정서의 사물화”를 비교적 능숙하게 수행하는 데서 드러나지만, 시가 근본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해서 시제 자체를 탈환해버리는 “충만한 현재”를 보여주기 때문에서도 그렇다.「황금나무 아래서」를 보자.
“하늘을 향해 직립한 채/부채 모양의 금빛 들을 쏟아” 내고 있는 ‘황금나무’는, 시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실재적 대상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상상 속에서 구성된 현재화된 미적 형상이다. 아주 오래 전에 뿌리를 내렸고(과거), 내 몸을 온통 물들이고 있으며(현재), 새로운 탄생을 가능케 하는(미래) 저 ‘황금나무 아래서’ 시인은 “금빛 환상/ 금빛 바람/ 황금의 알들”이 주는 매혹의 힘으로 “난생의 꿈”을 꾼다. 그런데 시인은 “저 신성한 이들의 황금시대를/ 기록할 문자가 나에겐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문자가 없는 시인의 시가 늘 “새로운 탄생”을 꿈꿀 수밖에 없는 것도, 그래서 늘 “미완”(「여우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언젠가 “내게도 두어 편 격절과 비약의 연대기가 있었”고 몇 번의 제의를 거쳤다는 시인의 기억과, 새로운 탄생과 난생의 꿈에 대한 시인의 강렬한 열망은, 과거의 충만했던 기억과 현재의 쓸쓸한 부재를 연결하면서, 부재할 수밖에 없었던 황금시대를 기록할 문자들을 이렇게 아름답게 살려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시집의 마지막 작품에서 지금은 “和睦祭의 시간”(「다시, 황금나무 아래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화목제의 시간이야말로 충만한 현재형의 상상적 등가물이 아닌가. 이처럼 사실적 이미지가 아니라 상상적 환의 이미지를 통해서도 권혁웅은 과거와 현재 부재와 현존, 안과 밖, 다시 말해 상승과 추락의 변증 두루 묘사하고 읽어내면서 그 결핍의 힘으로 꿈을 꾸고 있다.

「女僧」- 송수권

어느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갈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가며
동구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온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이 시도 보면 상승과 추락의 알레고리가 작용하고 있다. 어느 황사 낀 봄날 감기가 들어 방안에 진종일 누워있는 아이에게 여승이 찾아오는데, 그 여승에게 반해 아이는 방안을 탈주하여 여승을 동구밖까지 뒤따른다. 그러나 뒤따르는 아이에게 여승은 어서 들어가라고 인사를 하고, 그에 대한 실망으로 아이는 다시 집에 돌아와 고열과 황사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 상승의 추억이 곧 오늘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는 시를 쓰게 했으니 이 경우는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