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젊은시인들 제3집 <피터팬 사막에 가다>
앗,과 엇, 사이 / 김미량
앗, 과 엇, 사이 당신은 내 발등을 찍고
다리를 끌며 여러 날 당신을 미행 한다
고요했던 우리사이에 지루한 장마가 태어났다
장마에 갇혀 여러날 들려오던 천둥소리
경쾌한 멜로디 대신 내 심장소리와 맞바꾼
새벽은 진동모드로 전환된다
비밀번호 걸린 당신의 망할 전화기
단 한번 혓바닥을 보여주고 입 다문다
앗, 과 엇, 사이 우울하게도 한사람을 잃고
나는 끊어지는 호흡을 겨우 붙여 목숨을 구걸했다
앗, 하고 방심한 사이 신은 한쌍의 남녀를 만드셨다
제발과 재발사이 앗,과 엇,은 무릎 꿇으며 공존한다
앗, 과 엇, 사이에 척, 어둠 한 장 누가 붙여 놓았나
눈 먼 내가 기억을 더듬거리며 집을 찾는데
당신이라는 통증이 내게 붙었다
이 접착제는 강력한 우울증 으로 만든 것
후끈후끈 도지는 홧병의 위력이여
공증되지 않은 불륜의 사랑이여
치워라,
거룩한 변명이 적힌 별책부록이여
약국에 앉아 기다리다 읽는다
앗! 하고 아픈 부위에 붙이기만 하면
엇! 하고 통증이 사라진다는
한방습포제 두 줄 광고문
어느 날, 그는 없다 / 김연성
날마다 그는 서둘러 지하철로 출근한다
그를, 사각의 책상이 맞이하면 불편한 의지가 주저앉힌다
아침마다 컴퓨터가 그를 켰다
그를, 힘없는 열 손가락이 두들겼다
누군가 자꾸 검은 내부를 클릭하는 세상이다
알 수 없는 문장으로 수많은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완벽한 문장은 완성되지 않았다
스물여덟 개의 자판 앞에서 그는 늘 수정되는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그의 문장은 단 한 줄도 없다
열두 시, 구내식당이 어김없이 허기를 불러내면 그를, 점심이 허겁지겁 먹어댈 것이다 맛없는 식단까지 우적우적 씹어 삼킬 것이다 권리만 있고 의무가 없는 광장의 구호 뒤 에는 상처뿐인 영광만 남을 것이다 아무도 치료할 수 없는 함성만 무성할 뿐이다 오늘도 그리운 가족에게 안부조차 전하지 못했다 하오의 긴 초침이 씨팔 시를 가리키면 동료들은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갈 것이다 특별시민들을 위한 주차정책은 즐거운 대안이 없으므로 자판의 노동은 밤 열 시 혹은 열한 시가 되어도 끝나지 못할 것이다 힘 빠진 거죽에 붙어 있는 흐린 눈으로 잠시 내다본 창밖으로 민원 서류 같은 먹구름이 흘러갔다 처리 기한에 쫓기는 희망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구내식당에서 해결한 늦은 저녁은 소화불량에 걸린다 사람들은 갈수록 용서라는 말을 쓰지 못한다 어디까지 악을 써대야 더불어라는 푸른 말을 발음할 수 있단 말인가 막차시간에 쫓겨 사무실을 탈출하면 밤의 밑바닥은 여전히 미끄럽고 위험하였다 누군가 어서 오라고 손짓할 것 같은 으슥한 골목과 골목 사이에서 불쑥, 어둠은 또 그를 탐낼 것이다 아직도 착취할 그 무엇이 그에게 남아있을까
낯선 길바닥 위에서 다만 함부로 지워지지 않으려고 후줄근한 그림자는 마지막 발걸음을 재촉할 뿐 그를, 기다리는 것은 지구 반대편 가족이 아니라 언제나 어둠에 갇힌 빈집 일 뿐이다
아무도 호명하지 않는 덩치 큰 밤은 또 온다
골목에도 길이 있다 / 최형심
골목에 들어서면
사각사각 칼날에 길게 늘어나는 껍질
누군가 골목을 깎고 있다
껍질처럼 벗겨지는 물 젖은 좌판 여인들
일수를 찍으러 대머리가 지나가고
길가에 쪼그린 고추 배추 시금치 헐값에 베어져나간다
야반도주한 계주 때문에
부글부글 속이 끓어
소금을 치며 버틴다는 새우젓장수
등이 시린 고등어 장수
와르르, 고등어 상자에 얼음을 쏟아 붓는다
몇 년째 변비를 앓고 있는 순대장수
도마에 썩썩 순대를 써는 동안
과부의 전대를 입질한 제비 한 마리
휘파람 불며 지나간다
떨이 수박 한 통을 내놓은 광주댁
쩍, 배 가른 수박을
한쪽씩 베어 문 아낙들
푸념처럼 퉤퉤 수박씨를 뱉는다
막다른 골목
껍질 벗겨진 해가 떠있다
부전나비 매듭 / 김다연
그녀를 추모할 때는 부전나비라 해야겠다
생면부지 모태 안에서도
발버둥치다 스스로 탯줄에 감긴 여자
묶였다는 걸 알면서도 수수께끼처럼 살아남은 여자
얼룩무늬 몸뻬바지 입고 달과 함께 새벽 인력시장으로 날아가던 여자
자투리 노역에도 허리끈 질끈 동여매고 굵은 못 뽑아내던 여자
첩실 본 서방에게 젊어 소박맞고 막일로 입에 풀칠 면했다는 여자
돈 다발 한 번 맘 놓고 만져보지 못한 여자
눈 맞은 사내와 등나무처럼 살이라도 섞어 살면 살 수 있을까
허리춤 내려 가랑이 사이로 얽힌 실마리라도 풀라치면
질경이 뿌리 같은 잔정에 얽혀 올가미 째 빚을 뒤집어쓰던 여자
맨드라미를 보면 맨드라미가 되고 사루비아를 보면 사루비아가 되던 여자
해질 무렵 풀밭에 앉아 병 소주라도 나발 부는 날은 소쩍새처럼 가락을 뜯던 여자
달랑 수의 한 벌 얻어 입고는 끝내 고치처럼 묶여 그믐달 속으로 지던 여자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그녀가 치매였던 그 날부터 손에 쥐고 다니던 매듭 하나
달랑 달랑 흔들다 웃음 한 번 피식, 달랑 달랑 흔들다 웃음 한번 피식,
어둠을 바꾸다 / 박종인
-완전한 사육
허공의
품
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린다 담벼락을 따라 침범해 있던 어둠이 내 뒤를 쫓아오며 옹호한다 어둠은 나를 당겨 자신 안에 가둔다 눈여겨보니 그의 움직임은 가슴을 열기 위한 몸부림, 나를 향한 목마름이 목까지 차올라 있다 그런 어둠의 마음을 나는 조금씩 먹기 시작한다
내가 태
어
난 순간부터 나를 사랑한 이 어둠은 늘 그림자가 되어 내 옆에 붙어있었고, 해가 질 무렵에는 외투가 되어 나를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요즘은 그런 그에게 나도 점점 빠져든다 내가 속곳을 훌훌 벗어 던지자 그가 통증을 일으킨다 과거를 열어 단단해진다
나는 그
와
함께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창 밖으로 어둠이 번지고 있다 우린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그와의 빈 틈 없는 사랑이 허공을 껴안는다 이제 어둠은 나를 훔쳐보지 않는다 우린 하나다
어둠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니다 밝음을 쏙쏙 뽑아내는
2007년 젊은시인들 제3집 <피터팬 사막에 가다> 중에서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