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가을호 '서시' 신인상 당선작 / 박연숙
<서시> 신인상 당선작
엄마의 정원
1.
수술중인 엄마 몸속까지
눈발이 날리는지, 희끗희끗
머리칼 엉클어진 속으로 송이 눈 쌓이고
수술실 문이 열리면
쏟아져 나오는 눈사람, 엄마
2.
엄마는 속 빈 것들을 잘 길렀지
찬장 속에서 어깨를 대어 주어야만 기어 올라가는.
그러나 내부에서 눈송이처럼 깃털처럼 날리는
또 올려다보면 잎새들 웃음 틈틈이 새파랗게,
갸우뚱하면, 모서리가 기울어가는 찬장
손잡이를 당기면
어깨죽지 위로 이 빠진 접시가 굴러 떨어졌지
가령, 새장속의 새들, 우리
주둥이만 뾰족해서
날아간 뒤에는 또 뒤돌아보지 않는,
귀가 틀어진 찬장처럼 텅 빈 새장
식어가는 한 줌 깃털,
3.
엄마의 발꿈치 균열에서 햇빛이 삐져나온다
파아- 파아- 갈라질 때마다
날아오르는 새떼들
우묵하게 움켜쥔
내 손바닥 안,
탁 터진다, 고요
밥 짓는 저녁
솥 안의 쌀들이 뜸드는 일은
사랑하는 일일까
복종하는 일일까 생각한다
밥, 때로 복종은 밥, 밥, 입을 재갈물리는 일
압력밥솥 안에선 끊임없이 기적 소리가,
하루를 끌고 다닌 신발들이
가령, 밥 한 공기 국 한 그릇
그러나 서로 짝이 다른 젓가락처럼
툴툴거림도 입,
입, 입,
허리 굽은 나무들이 제 몸 데워 차려놓은 꽃밥,
혹은 저기 먼별들
상보처럼 덮인 어둠의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다
날것들이 주둥이를 들이민다
먹을수록 배가 고픈 지친 어둠도 한 입
내가 차리는 밥상엔, 주인 없어도
수저 한 벌 놓는다
내 복종의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위장이 텅 빈 별
공복이 뜨거운 별빛이 먼저 한 김 훔쳐낸
밥상
레시피 없이도 내구성이 강한 밥솥의 복종
얇게 누른 저녁, 구수하다
얇게 눌린 사랑이
은이 이모네 집인가요?
여기서 눈은 손금 밖으로 내려요
나는 어항마다 은어를 키우고요
뽀글뽀글 전화벨이 울리면요
물방울 터지는 소리를 내며 은이 이모는 외출을 하고요
성큼성큼 마이크를 잡고
네모난 화면 앞에서 탬버린을 흔들어요
도돌이표가 끌어안는 노래 한 소절, 흔들
찢어진 악보, 흔들
은이 이모의 후렴은 언제나 젖어 있어요
살얼음인 새벽을 꾹꾹 누르며
눈꺼풀이 얇은 은이 이모는
흔들 흔들 돌아오지요
나는 푸른 모이 한 줌 떨구고
은이 이모를 바라다보죠
뻐끔거리는 입 속을,
탬버린처럼 끝없이 박자를 뱉어내는
저 투명한 뱃속에 가라앉아버리는
노래 한 가닥을 들여다봐요
살얼음 핀 노래는 은이 이모 뱃속에서도
녹질 않죠, 어항속엔 은어가
지금 밖엔 눈이, 난 손금에 앉아 전화를 받지요
검은 머리 아이에게서 빠다냄새가 난다
#1990년 10월
내 이름은 봉지, 봉지예요. 아무도 나를, 아무도 주문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난 있죠. 사방이 미끌거려요. 나의 탯줄은 물컹거리는 어둠과 연결되어 있어요. 비닐봉지 안은 따뜻하고 편안했어요. 지의류 포자처럼 우연히 착상된 나는 알 수 없는 세계 속에서 그렇게 웅크리고 있어요. 폐기되어 있어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 못했어요. 나를 찾아주세요. 내 이름은 봉지예요.
#2005년 12월
안녕,하세요, 여,긴 제네바,에요 시간의 골목 안으로 메마른 바람. 내가 태어난?검은 비닐봉지들이 바스락거림. 허겁지겁 나를 낳고 사라진 엄마, 부레옥잠처럼 부유하다가 빠다크래커로 부서지곤 했을까.?나를 경유해간 시간에서는 언제나 빠다 냄새가 나서인데. 나,나는 오늘도 홀트의 검색창으로 부지런히 나의 어머니를 검색해 보지요. 정체모를 어둠이 자꾸만 내부로 기어듬. 생리통처럼 불안한 바람이 불어 히에로클리프, 어떤 소리도 낯선 문장들. 이해되지 않는 모국어처럼 흘러 다님. 창백하게 포장된 나를 찾아주세요.
나의 한국이름은 봉지예요.
불의 봉인
1.
화상은 부끄러움
기억을 잡다가 놓쳐버린 부젓가락
어린 날, 상처는 홍역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무릎께에 남아 내가 자라는 동안
함께 자라고 걸어 다녔다
나는 불에 봉인되어 있었다
2.
덕수궁 정문엔 화상의 봉인을 푸는 남자가 있다
주술사처럼 검고 흰 목소리를 쿨렁거리며
결이 고운 나무의 나이테 위에 인두로 글씨를 쓰고 있었다
불의 글씨는 나무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새기며
짙고 옅은 그을음으로 나무의 신분을 알려주었다
오래된 약속의 표지였던 나무의 전생은
깊은 어둠을 지닌 채 해서체로 꿈틀거렸다
인두가 지나가지 않은 곳은 여백일 뿐,
화상으로 기록하는 그의 생애 전부가 경전이 되고 있었다
3.
오랫동안 나의 정면을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나의 화상을 들여다보았다
나의 가장 뜨거웠던 한 순간,
그 밖은
여백이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