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예술세계 신인상 시부문 당선작 / 한상림
2006년 예술세계 신인상 시부문 당선작
충남 논산 출생
<시와 글사랑> 편집위원
2006년 <예술세계> 신인상
그림자 나무
플라타너스 그림자가 아파트 벽을 흔든다
어둠 안에서 제 몸을 들여다보는 나무
가지를 비틀어 가로등 불빛에 엑스레이를 찍어대며
땅 속 깊은 곳 물기를 쭉 뽑아 올린다
뿌리의 힘이 웃자랄수록 가지 끝의 흔들림은 자유롭다
흔들림에 그림자는 자라고, 한번도
관통하지 못한 햇살이 둥근 몸통을 뚫어
자꾸만 뿌리 끝을 간지럼 태우면
흑백사진속의 이파리들은 소란스럽다
건너온 비바람을 기억하는 나무
이파리들의 무수한 자맥질,
겨울이 되면 또 다른 기억들을 녹음할 것이다
무수히 이어지는 통로를 지나 더 높은 곳으로
검은 그림자를 밟고 올라가는 물줄기들
어디선가 흐르는 물소리 들려온다
고독한 전사(電使)
산 능선 운무 사이
우뚝 치솟은 송전탑, 하늘과 나무들의 숨소리 모아
푸른 뼈로 갈무리하는 숲을 키운다
우거진 숲 속에서 우뚝 귀를 세우고
눈 아프게 빛을 발사 중인 고독한 전사에 대하여
곰곰 생각을 되씹어 본 적 있었나
그저, 스쳐가는 바람에 버거운 무게를 달고
구름이 걸쳐 놓은 옷자락 들춰 보면서
묵묵히 제 소리를 키울 뿐이라고
엄청난 힘을 줄에 담고서도 두 가닥이
한사코 한 몸 될 수 없어 따가운 빛으로 타닥거릴 뿐
바람과 구름 말고는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
뜨거운 몸이지만 결코 뜨거워질 수 없어
쉼 없이 웅웅거리는 울부짖음을
숲이 말없이 끌어안고 사는 거라고
더 높은 곳을 향해 꿈을 키우면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경계선 안의 철탑일 뿐이라고,
그로 인해 세상의 서늘한 모퉁이를 밝혀줄
고독한 전사라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선소감
억새의 질긴 뿌리처럼
명성산 늦가을 억새밭에서 당선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를 에워싼 하얀 억새꽃들이 순간, 일제히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눈이 부셨습니다.
억새밭에 앉아 억새의 질긴 뿌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람 앞에 제 뿌리를 놓지 않는 억새를 바라보았습니다. 땅속에 발목을 깊이 묻고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 질긴 억새처럼 제 시의 뿌리가 깊었으면 합니다.
소녀 적부터 시를 쓰고 싶었습니다. 아이를 넷 낳아 기르도록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울림을 누르며 살다가 삼 년 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첫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 당시 삶과 죽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었지만, 역시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에게 고백하듯 시작한 것이 글쓰기였습니다. 그러다 늦깎이로 시작한 시는 죽을 만큼 힘들었던 아픔을 견디는 커다란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부족한 저를 아껴주시고 보듬어 주시던 마경덕 시인님과 나정호 작가님 고맙습니다. 함께 공부한 문우들, 격려를 보내준 남편, 저에게 소중한 기회를 주신 '예술세계'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첫 걸음입니다. 걷는 법부터 배우겠습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