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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시와 시학 가을문예 당선작 / 이은

휘수 Hwisu 2006. 11. 24. 00:10

오로라 통신

난 오로라야. 공중에 떠다니며 팡팡 매화포 종이로 만든 딱총의 하나. 불꽃놀이에 사용함. 불똥 튀는 것이 매화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게 됨. 를 쏘고 다니는 오로라. 밤하늘에 폭포같이 쏟아져 내리기도 하는 오로라.

안녕, 당신. 난 현재 캄차카반도 상공에 떠 있어. L.A를 지나 알래스카를 거쳐 서울로 가는 중이지. 조종실 밖으로 보이는 저 두 물체는 무얼까? 태양? 달? 아, 지금 북극은 백야니까 남쪽에 떠 있는 것이 달이고 북쪽에 떠 있는 것이 태양이겠지. 태양은 이유도 없이 사보타지를 하지. 난 언제나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고 있어. 당신, 태양은 북쪽에서 떠서 남쪽으로 지는 거 알아?

잠들지 마! 당신, 내가 전송하는 사진을 열어 봐. 날짜 변경선을 지났어. 오늘이 몇 일이지? 아, 당신 시간에 속지마. 북극 꼭짓점에서 한 바퀴 빙 돌면 지구 한 바퀴 도는 거야. 하루가 한없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지. L.A와 서울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을까? 북극과 남극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을까. 남극에서 향유고래의 등을 올라타고, 북극에서 빙산에 둘러싸여 파도타기를 할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신을 깨우는 일이야. 나는 저 해와 달을 통과해서 아니, 해와 달보다 더 빨리 당신에게 갈 수 있어. 난 오로라니까. 


 

마운틴 오르가즘

백두대간 33구간. 산돌배나무, 거좌수 나무, 벼락 맞은 신갈나무, 백인교 당집을 지나서

산을 오른다 오른다 오르, 오르...... 오르가즘 얼굴이 확확 달아 오르고 숨이 가빠온다 허파가 찢어질 것 같다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흐른다 칡뿌리를 잡고 바윗돌을 타고 오른다 무박산행. 온몸으로 별이 쏟아진다 내 몸이 대형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눈알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몸에 닿는 모든 것들이 발정 난 암코양이 같다 가랭이를 벌리고 누웠다 그 무수한 당신, 그 무수한 나의 눈알이 보인다 하늘은 지금 두 마리 뱀이 꼬리를 물고 있는 형국이다 제 몸을 납작하게 뻗쳐 눕힌, 거꾸로 덮치는 그 무수한 당신과 내가 나뒹굴고 있다 느티나무 잎사귀들이 흔들린다 나무는 잎잎마다 눈알이 들러 붙어 가쁜 숨을 몰아쉰다 빛인지 어둠인지 내 몸 속으로 들어 온 당신의 몸이 솟아 오른다 당신 어깨 위로 별들이 보인다 나는 지금 백두대간을 치닫는 중이다 별밭에 몸을 내던진 환상적인 전열! 로! 오르.. 오르..... 오르가즘 


 

네비게이션

팔십 미터 전방 무인 카메라 있음
서행하세요, 서행하세요...
지상 이만 이천 미터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당신,
그가 또 경고를 합니다
경, 로, 이, 탈. 경, 로, 이, 탈.....
그의 혀에 재갈을 물리고
나, 아득히 세상과 멀리 떠납니다

낯선 길들이 포도넝쿨처럼 내 몸을 휘감아요
나를 카자흐스탄으로 데려다 줄 수 있나요
포도밭을 지나, 구름 다리를 건너
옛사랑에게 데려다 줄 수도 있나요?
실크로드를 지나, 모래 폭풍 속을 뚫고
발끝마다 별들이 채이는 저 하늘을 지나

오 자히르 파울로 코엘료 소설. 아랍어로 자히르는, 실재로 존재하고,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그것과 접하게 되면 서서히 우리의 사고를 점령해 나가 결국 다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어떤 사물 혹은 사람.
자히르, 당신을 찾아가는 밤,
그곳으로 가는 길에 아무도 동행할 마음 없어요
나와 함께 가고 싶나요?
저 실크로드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사막의 모래들이 수직으로 일어나는 길을 따라
시간의 바퀴를 다시 걸고
나와 함께 가자는 거죠. 당신?   

낙천대 노인정

더풀개는 더풀 집어다 남의 입에 잘 넣어 준다 두루뭉실하게 생겼다 이래도 한 철 저래도 한 철 욕심이 없다 예쁜 별명을 지어 달래서 꽃다발이라 불리어지길 좋아한다

지줄개는 지주새 모양으로 잘 지저귄다 야심이 없고 변덕이 죽 끓듯 한다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한다 오후에 짤깍 나타나 지저귀다가 사라진다

발발이는 발래발래 왔다가는 남의 말을 잘 일러 준다 속이 요만해 가지고 조그만 일 가지고도 발발발 떤다 회장님 비서하기에 딱이다

딱따구리는 딱딱 틀니를 부딪치며 말한다 허잽이라고도 부른다 걸음걸이가 흔들흔들한다 꼭 각설이 같다 입을 하도 놀려서 딱따구리모양으로 뚝 뛰어 나왔다

늑대는 늘신늘신 맨날 방바닥에 축 늘어져 있다 늑대같이 앙크란게 간격도 모르고 욕심이 많아서 고도리를 할 때면 돈을 감추어 놓고 내놓지를 않는다

콩딴이는 콩콩 콩알만치 키가 작달막하다 유식하고 내막적이다 정치 돌아가는 걸 잘 안다 신문을 읽고 정부 보조금이 나왔다고 알려 준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

좌상은 늘 아랫목을 차지하고 앉는다 올해 아흔 셋이다 점잖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분부만 내린다 그녀가 한 마디하면 모두 복종한다 영을 거스리면 쫓겨난다 말귀가 어둡지만 서비스가 좋다

더풀개는 더풀대며, 지줄개는 지줄대며, 발발이는 발발대며, 콩딴이는 콩 튀기듯이 좌상 앞에 모여들었다

낙천대 노인정에 무슨 사단이 났다보다 설날 떡을 나누어 주었는데 더풀개가 가져가 놓고는 안 가져갔다고 우긴다 좌상은 누구도 떡에 손대지 말라고 영을 내렸다 모두 좌상 앞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흙밥

문중 산을 사서
이묘하는 데 다녀오신 어머니
한 말씀 던지신다

재학이 할머니
관 머리 은짝문을 뗄 때
김이 확 올라 오는기라
짚신 한 짝 안 녹고 발을 번쩍 쳐들고
고대로 있는 거여
살과 옷이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기라
하얀 보자기에 쌓여
나일론 끈에 꽁꽁 묶여 있는 것을
대칼로 살과 뼈를 밀어내는데
느그 아버지 등짝에 흥건히
땀이 곤죽이 됐제
그 옆에 묻힌 옥란이 에미는
글쎄, 뼈마디가 거미줄같이
실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기라
그걸 하나하나 벗겨 주며
흙밥이 되라 했제

산사람한테 천생배필이라 안하나
죽은 사람한텐 배필이 달리 배필인가
누런 베옷이 송장과 함께 흠뻑 녹아 내려
좋은 자리에 뼈가 눌눌하게
흙밥되는기 배필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