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2005~2010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들

휘수 Hwisu 2010. 12. 24. 19:05

나무도마 / 신기섭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거미집 / 김두안  

 

그는 목수다 그가 먹줄을 튕기면 허공에 집이 생겨난다 그는 잠자리가 지나쳐 간 붉은 흔적들을 살핀다 가을 비린내를 코끝에 저울질 해본다 그는 간간히 부는 동남쪽 토막바람이 불안하다 그는 혹시 내릴 빗방울의 크기와 각도를 계산해놓는다 새털구름의 무게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가 허공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떠난 허름한 집을 걷어내고 있다 버려진 날개와 하루살이떼 돌돌 말아 던져버린다  

그는 솔잎에 못을 박고 몇 가닥의 새 길을 놓는다 그는 가늘고 부드러운 발톱으로 허공에 밑그림을 그려넣는다 무늬 같은 집은 비바람에도 펄럭여야 한다 파닥거리는 가위질에도 질기게 버텨내야 한다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그는 신중히 가장자리부터 시계방향으로 길을 엮고 있다 앞발로 허공을 자르고 뒷발로 길 하나 튕겨 붙인다 끈적한 길들은 벌레의 떨림까지 중앙 로터리에 전달할 것이다 그가 완성된 집 한 채 흔들어본다 바람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거미집이 숨을 쉰다  

  

 

엘리펀트맨 / 이용임 

 

사내의 코는 회색이다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사내는 가만히 코를 들어올린다 

형광불빛에 달라붙어 벌름거리는 

사내의 콧속이 붉은지는 알 수 없다 

여자를 안을 때마다 

사내는 수줍게 코를 말아올리고 입술을 내민다 

지리멸렬한 오후 두시에 

사내는 햇빛을 쬐며 서툴게 담배를 핀다 

사내의 코가 능숙하게 따먹을 

푸르고 싱싱한 나뭇잎들은 없다 

계절은 바람과 구둣소리에 쓸려 

태양의 서쪽으로 이동했다 

구내식당에서 이천오백원짜리 밥을 먹을 때마다 

사내는 코끝이 벌개질 때까지 힘껏 코를 들어올린다 

버스가 급정거할 때마다 

손잡이에 걸린 코를 황급히 움켜쥐며 한숨을 내쉰다 

담배연기와 밀어와 휘파람과 잠꼬대 

사내의 긴 코 어딘가에서 아직도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을 

환절기가 되면 사내는 지독한 축농증을 앓는다 

가을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아래 서서 

사내는 코로 낙엽을 주워올린다 

가지에 올려놓은 잎사귀가 떨어질 때마다, 

다시  

 

 

차창밖, 풍경 빈곳 / 정은기  

 

철길은 열려진 지퍼처럼 놓여있다, 양 옆으로 

새벽마다 물안개를 뱉어내는 호수와 

<시골밥상>이니 <대청마루>니 하는 간판의 가든촌이 

연대가 다른 지층처럼 어긋나 있다 

등 뒤로 떨어지는 태양이 그림자로 가리키는 북동의 방향으로 

질주하는 춘천행 무궁화호 열차 

지퍼를 채우듯 튿어진 자리를 꿰매며 달려가는 것은 열차의 속도였다  

  

기차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것은  

긴장을 잃고 곡선으로 휘어지는 구간에서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곳에 자리를 튼 마을이 호수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가정식 백반>의 가정을 찾아 속도에 몸을 싣고 거꾸로 달린다 

이곳에서는 두고 온 먼 곳의 시간을 추억하는 일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관람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박물관을 찾는 일만큼이나 자본주의적이다 

직선의 끝에는 목적지가 있어 

마을은 머지않아 먼지의 전시관이 될 것이다  

  

곁길로 샐 수 없는 것이 슬프다는 것을 호수는 알고 있을까 

튿어진 굴곡을 따라 살을 드러낸 풍경의 허리를 휘감고 

돌아가는 기차, 가끔씩 창밖으로 

활처럼 휘어지는 기차의 곡선을 본다면 

퇴락을 거듭하는 호숫가 옆, 한 마을이 생각날 것이다  

 

 

무럭무럭 구덩이 / 이우성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 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 눈 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 먹습니다  

잘 마른 잎들이라 숟가락이 필요 없습니다  

형은 벌써 싫증을 내고 구덩이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쏙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학교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엄마는 숟가락이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검은 구두 / 김성태 

   

그에게는 계급이 없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좁은 동굴이며 

구름의 속도로 먼 길을 걸어온 수행자입니다 

궤도를 이탈한 적 없는 그가 걷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거나 어긋난 교차로입니다 

지하철에서부터 먼 풍경을 지나 

검은 양복 즐비한 장례식장까지 

그는 나를 짐승처럼 끌고 왔습니다 

오늘 나는 기울기가 삐딱한 그를 데리고 

수선가게에 갔다가 그의 습성을 알았습니다 

그는 상처의 흔적을 숨기기 좋아하고 

내가 그의 몸을 닳게 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한 적은 없지만 

가끔 그는 코를 치켜들기 좋아합니다 

하마의 입으로 습기 찬 발을 물고 있던 그가 

문상을 하러 와서야 나를 풀어줍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그를 만져보니 

새의 날개 안쪽처럼 바닥이 움푹 파였습니다 

두 발의 무게만큼 포물선이 깊어졌습니다 

그의 입에 잎사귀를 담을 만큼 

소주 넉 잔에 몸이 가벼워진 시간 

대열에서 이탈한 코끼리처럼  

이곳까지 몰려온 그들이 서로 코를 어루만지며 

막역 없이 어깨를 부둥켜안고 있습니다 

취한 그들이 영정사진처럼 계급이 없어 보입니다 

그가 그에게 정중한 인사도 없이 

주인이 바뀐 지도 모르고  

구불 길을 내며 집으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