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2005~2010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들

휘수 Hwisu 2010. 12. 24. 18:44

 

오페라 미용실 / 윤석정

 

능선으로 몰려든 검은 구름이
귀밑머리처럼 삐죽삐죽 나온 지붕에 한발을 걸친다
그 사이, 좁다란 골목길이 계단을 오르며 헉헉 숨 내쉬는 곳에
할아범 측백나무와 오페라 미용실이 마주 서 있다
그는 매일 미용실 바깥의 오페라를 감상한다
미용실 눈썹처마에 모아둔 나뭇잎 음표들이 옹알거릴 때
가위를 갈다가 번뜩이는 악보의 밑동,
백지에 오선을 긋던 어머니는 병세를 자르지 못해
머리에 자란 음표를 모두 빼내 옮겨 적었고
연주가 서툰 아버지는 가파른 골목길로 내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오페라를 관람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측백나무에서 음표를 떼어 내던 앙상한 어머니를 목격하였다
어머니를 마구 흔들고 지나간 바람이 옥타브를 높이며
구름 떼를 몰고 오기도 했다
미용실 문이 열리자 그는 내내 벌려 예리해진 가윗날을 접는다
머라숱이 적은 손님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때마다
음치인 울음이 미용실에서 뛰쳐나간다
동네 아이들이 집으로 가는 길에선
울음이 두근거리는 아리아로 변주해 울려 퍼지고
측백나무에서 마지막 남은 음표가 눈썹처마에
떨어질 때
낮은 지붕 위로 함박눈이 음계 없이 쏟아진다
나뭇가지 오선지 끝에 하얀 음표가
대롱대롱 매달리고
악보에 없는 동네 사람들이 돌림노래처럼
몰려나와
희희낙락 오페라를 구경한다

 

 

 

서울목공소 / 양해기  

 

굵은 팔뚝이 대패를 간다. 지난해 나무 아래에 파묻은 딸 아이의 울음소리를 내며 나무의 굳은 겁질이 떨어져 나간다. 잔뜩 날이 선 대패는 켜켜이 붙은 나무의 나이테를 차례로 안아 낸다 얇은 나무 판자에 땅-땅 못총을 쏘아대는 사내의 얼굴이 마치 성장을 멈춘 어린 통나무 같다 사내의 가슴팍에서 땀이 배어 나온다 땀은 가장 자리에 틀을 만들며 헐렁한 런닝에 격자무늬 창살을 짜 넣는다 사내의 창을 열면 운동장에 아이들이 뛰어 다닌다. 갈래머리 딸아이가 달려와 매달린다 다시 사내의 모습이 사라진다 사내 앞에 놓인 통나무 안엔 사내와 팔뚝 그리고 그의 딸 아이가 뛰어 다니는 통로가 있다. 팔뚝은 나무를 엮어 하루 종일 창문을 내고 사내의 딸아이가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부레옥잠 / 신미나 

 

몸때가 오면 열 손톱마다 비린 낮달이 선명했다 

 

물가를 찾는 것은 내 오랜 지병이라, 꿈속에서도 너를 탐하여 

물위에 空房 하나 부풀렸으니 알을 슬어 몸엣것 비우고 나면 귓불에 

실바람 스쳐도 잔뿌리솜털 뻗는거라 가만 숨고르면 몸물 오르는 

소리 한 시절 너의 몸에 신전을 들였으니 

 

참 오랜만에 당신 

오실 적에는 볼 밝은 들창 열어두고 부러 오래 살을 씻겠네 문 밖 

에서 이름 불러도 바로 꽃잎 벙글지 않으매 다가오는 걸음소리에 

귀를 적셔가매 당신 정수리 위에 뒷물하는 소리로나 참방이는 뭇 

별들 다 품고서야 저 달의 맨 낯을 보겠네 

 

 

페루 / 이제니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맆 피쉬 / 양수덕 

 

땡볕더위에 잎맥만 남은 이파리 하나 

지하도 계단 바닥에 누워 있던 청년은  

양말까지 신고 노르스름한 병색이었다 

젊음이 더 이상 수작 피우지 않아서 좋아? 싫어? 

스스로 묻다가 무거운 짐 원없이 내려놓았다 

맆 피쉬라는 물고기는 물 속 바위에 낙엽처럼 매달려 산다 

콘크리트 계단에 몸을 붙인 청년의 

물살을 떨다 만 지느러미 

뢴트겐에서 춤추던 가시, 가물가물 

동전 몇 개 등록상표처럼 찍혀 있는 손바닥과 

염주 감은 손목의 

그림자만이 화끈거린다 

채 풀지 못한 과제 놓아버린 손아귀 

청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세상의 푸른 이마였던 그의 

꿈이 요새에 갇혀서  

해저로 달리는 환상열차 

잎사귀인지 물고기인지를 한 땀 바느질한 

지하도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이들이 

다리 하나 하늘에 걸칠 때  

 

 

직선의 방식 / 이만섭 

  

직선은 천성이 분명하다 바르고 기껍고 

직선일수록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이는 곧 정직한 내력을 지녔다 하겠는데 

현악기의 줄처럼 그 힘을 팽창시켜 울리는 소리도 

직선을 이루는 한 형식이다 

나태하거나 느슨한 법 없이  

망설이지 않고 배회하지 않으며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단순한 정직이다 

밤하늘에 달이 차오를 때 

지평선이 반듯하게 선을 긋고 열리는 일이나  

별빛이 어둠 속을 뻗쳐와 

여과 없이 눈빛과 마주치는 것도 

직선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령, 빨랫줄에 바지랑대를 세우는 일은  

직선의 힘을 얻어 

허공을 가르며 쏘아대는 직사광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뜻이 담겨있다 

그로 인하여 빨래는 

마음 놓고 햇볕에 말릴 수 있을  

것이다 

바지랑대는 빨랫줄로 말미암고 

빨랫줄은 바지랑대 때문에 더욱 올곧아지는 

그 기꺼운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