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노작문학상 수장작들
2001년 제1회 노작문학상 수상작 / 안도현
빗소리 듣는 동안
1970년대 편물집 단칸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하는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 척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 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 잡히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를 모아 둔
비 온 뒤의 연못물은 젖이 불어
들녁을 다 먹이고도 남았네
내 장딴지에는 살이 올라 있었네
삶은 감자
삶은 감자가 양푼에
하나 가득 담겨 있다
머리 깨끗이 깎고 입대하는 신병들 같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중이다
감자는 속속들이 익으려고 결심했다
으깨질 때 파열음을 내지 않으려고
찜통 속에서
눈을 질끈 감고
익었다
젓가락이 찌르면 입부터 똥구멍까지
내주고, 김치가 머리에 얹히면
빨간 모자처럼 덮어쓸 줄 알게 되었다
누구라도 입에
넣고 씹어봐라
삶은 감자는 소리 지르지 않겠다고
각오한 지 오래다
봄똥
봄똥, 생각하면
전라도에 눌러 앉아 살고 싶어진다
봄이 당도하기 전에 봄똥, 봄똥 발음하다가 보면
입술도 동그랗게 만들어주는
봄똥, 텃밭에 나가 잔설 헤치고
마른 비늘 같은 겨울을 툭툭 털어내고
솎아 먹는
봄똥, 찬물에 흔들어 씻어서는 된장에 쌈 싸서 먹는
봄똥, 입 안에 달싸하게 푸른 물이 고이는
봄똥, 봄똥으로 점심밥 푸직 먹고 나서는
텃밭가에 쭈그리고 앉아
정말로 거시기를 덜렁덜렁거리며
한 무더기 똥을 누고 싶어진다
살구나무 발전소
살구꽃.....
살구꽃.....
그 많고 환한 꽃이
그냥 피는 게 아닐 거야
너를 만나러 가는 밤에도 가지마다
알전구를 수천, 수만 개 매어다는 걸 봐
생각나지, 하루종일 벌떼들이 윙윙거리던 거,
마을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날도
전깃줄은 그렇게 울었지
그래,
살구나무 어디인가에는 틀림없이
살구꽃에다 불을 밝히는 발전소가 있을 거야
낮에도 살구꽃.....
밤에도 살구꽃.....
도둑들
생각해보면, 딱 한 번이었다 내 열두어 살쯤에 기역자 손전등 들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푸석하고 컴컴해진 초가집 처마 속으로 잽싸게 손을 밀어넣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 밤 내 손 끝에 닿던 물큰하고 뜨끈한 그것, 그게 잠자던 참새의 팔딱이는 심장이었는지, 깃털 속에 접어둔 발가락이었는지, 아니면
깜박이던 곤한 눈꺼풀이거나 잔득잔득한 눈곱 같은 것이었는지,
어쩔 줄 모르고 화들짝 내 손끝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던, 그것 때문이었다
나는 사다리 위에서 슬퍼져서 한 발짝 내려갈 엄 두도 내지 못하고, 그렇다고 허공을 치며 소리내어 엉엉 울지도 못하고, 내 이마 높이에 와
머물던 하늘 한 귀퉁이에서 나 대신 울어주던 별들만 쳐다보았다
정말 별들이 참새같이 까맣게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 울던 밤이었다
네 몸 속에 처음 손을 넣어보던 날도 그랬다
나는 오래 흐른 강물이 바다에 닿는 순간 멈칫 하 는 때를 생각했고 해가 달의 눈을
가려 지상의 모든 전깃불이 꺼지 는 월식의 밤을 생각했지만, 세상 밖에서 너무 많은 것을 만진 내 손끝은, 나는 너를 훔치는 도둑은 아닌가
싶었다
네가 뜨거워진 몸을 뒤척이며 별처럼 슬프게 우는 소리를 내던 그 밤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속을 보여주지 않고 달아오르는 석탄난로
바깥에는 소리없이 내리는 눈
철길 위의 기관차는 어깨를 들썩이며
철없이 철없이도 운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하는 거니?
울어야 네 슬픔으로 꼬인 내장
보여줄 수 있다는 거니?
때로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 번 목숨을 걸 때가 있는 거다
침묵 속에도 뜨거운 혓바닥이 있고
저 내리는 헛것 같은 눈, 아무것도 아닌 저것도 눈송이 하나하나는
제각기 상처 덩어리다,
야물게 움켜쥔 주먹이거나
문득
역 대합실을 와락 껴안아 핥는 석탄난로
기관차 지나간 철길 위에 뛰어내려 치직치직 녹는 눈
물집
호두가 아구똥지게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감자가 덕지덕지
몸에다 흙을 처바르고 있는 것,
다 자기 자신이 물집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다
터뜨리면 형체도 없이 사라질 운명 앞에서
좌우지간 버텨보는 물집들
딱딱한 딱지가 되어 눌어붙을 때까지
生이 상처 덩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그래서, 나도
물집이다
불로 구워 만든 물집이다
나도 아프다
2002년 제2회 노작문학상 수상작 / 이면우
거미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 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
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 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기러기
저 새들은 어디서 오느냐고 아이가 물었다
세상 저 끝에서 온다고 말해주었다.
저렇게 떼지어 가는 거냐고 아이가 또 물었다
세상 저 끝으로 가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럼 어디가 세상 끝이냐고, 이번엔 정색하며 올려다 본다
잠깐 궁리 끝, 기러기 내려앉는 곳이겠지, 하고 둘러댔다.
호숫가 외딴 오두막 가까이 키보다 높은 갈대들
손 저어 쉬어 가라고 기러기 부르는 곳
저녁 막 먹고 나란히 서서 고개 젖혀
하늘 보며
밭고랑에 오줌발 쏘던 깊은 겨울.
2003년 제3회 노작문학상 수상작 /
문인수
달북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그리고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2004년 제4회 노작문학상 수상작 / 문태준
어두워지는 순간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
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늑대처럼 오래 울고, 멧새는 여울처럼 울고, 아카시아 흰 꽃은 쌀밥 덩어리처럼
매달려 있고, 호미는 밭에서 돌아와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마당에 선 나는 죽은 갈치처럼 어디에라도 영원히 눕고 싶고……. 그 모든 게 달려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다른 개의 배에서 머무르다 태어나서 성장하다 지금은 새끼를 밴 개이고, 멧새는 좁쌀처럼
울다가 조약돌처럼 울다가 지금은 여울처럼 우는 멧새이고, 아카시아 흰 꽃은 여러 날 찬밥을 푹 쪄서 흰 천에 쏟아 놓은 아카시아 흰 꽃이고…….
그 모든 게 이력이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베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이상하지, 오늘은 어머니가 이것들을 다 버무려서
서당골에서 내려오면서 개도 멧새도 아카시아 흰 꽃도
호미도 마당에 선 나도 한사발에 넣고 다 버무려서, 그 모든 시간들도 한꺼번에 다 버무려서
어머니가 옆구리에 산미나리를 쪄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이 다 어두워졌네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여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