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두둑 존재하는 당신 / 2006 시평 가을호(이용한 시인)
후두둑 존재하는 당신 / 2006 시평 가을호(이용한 시인)
창문을 반쯤 열어젖힌 내 삶에
우기가 닥친다
나는 온전히 하늘을 읽을 수가
없었다 빗방울이
내 발등을 두들긴다 후두둑 후둑
두두다다두다닥 우다다다다다 투다닥
가지 못한 구름이―,
가지 않고 내 삶을 기웃거렸다.
-「가지 못한 구름」전문
무더위 끝에 장마가 시작됐다. 나의 창문 밖에서 비는 ‘쏟아’지거나 ‘내리’는 시작과 동시에 흘러가고 있는 풍경으로 머물러 있다. 이용한의 두 번째 시집『안녕, 후두둑 씨』를 읽는 내내 비가 내렸다. 그가 「가지 못한 구름」에서 말하고 있듯 “가지 못한”, “가지 않고” 기웃거리는 구름처럼 나는 그의 시를 며칠 째 “온전히”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모든 시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존재하고 있는 화자 ‘후두둑 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시에서 주체는 항상 열려있는 공간을 형성한다. “반쯤 열어젖힌” 창문처럼 다양한 풍경들, 이야기들을 바라보는 주체는 “닥친다”, “두들긴다”의 인식과 동시에 “없었다”, “가지 못한”, “가지 않고” 라는 상반된 의미로 전이 되며 시공간을 확장시켜 나간다. 그의 시에서 주체는 이러한 상반된 의미구조 속에서 대상과 동일시됨은 물론 그러한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제3자가 되어 의식의 흐름을 따라 변화, 이동한다.
따라서 그의 시 곳곳에 드러나 있는 교차된 시공간은 현실을 새롭게 재구성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주체’를 망각시킨다. 이러한 의도는 ‘후두둑’이라는 의성어가 암시하는 것처럼 이미 ‘흘러’가고 있거나 ‘지고’ 있는 상태로서 현존하고 있는 새로운 주체의 탐구이다.
이용한의 시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추억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경험한 주체와 상관없이 또 다른 시공간을 형성하며 흘러간다. 때론 너무 앞서 가기도 하고 미래의 시간에서도 온다. 이는 이야기를 경험한 주체의 의식과 육체를 분리시켜 다양한 주체들을 생산해 낸다. “2010년산 버번 위스키”를 마시며 “연평도에 두고 온 가족과/ 연평도를 이륙하던 단풍잎 같은 우주선/ 사과처럼 푸른 그 옛날”(「잠과 꿈」)의 지구를 들여다보는 사내로 등장하거나, “히말라야 눈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10년 전 남자의 편지가 도착” 할 것이라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기”(「가벼운 구름의 편두통」)를 쓰는 ‘너’의 ‘애인’으로 교차된 시간과 공간의 화자가 되기도 한다.
결국 “지나가는 모든 것은 지나가라/ 아무렴! 사랑은 너무나 사적인 것이니,/ 뒤늦게 천수경을 외운들,/ 천 개의 눈과 손을 얻은들 이미/ 나는/ 있어야 할 곳에/ 없다.” 라고 말하는「지옥의 쉼표」에서처럼 그의 시에서 이야기의 주체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도 흘러가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즉 머물지 않고 아득하게 흘러가고 있는 상황자체가 그의 시에서는 주체가 된다.
「이상한 밥상」에서 “어느 날부턴가 다 낡은 나에게” 밥상을 차려주시는 어머니는 그의 지나간 기억 속에서 머물지 않는다. 10년 전의 모습보다 20년은 더 젊은 모습으로 “싱싱한 어머니”는 죽지 않고 그에게 밥상을 차려준다. 그에게 지나간 시간들, 추억들은 현실의 부재를 더욱 각인 시켜준다. “문을 열 때마다 모래바람이 들이치는 자정을 껴안고/ 너는 지난 시절의 물고기를 중얼거린다”, “떠밀려 온 것들은 모두 화석처럼 늙었다”(「떠도는 물고기 여인숙」)에서처럼 “녹슨 지느러미”를 달고 흘러가는 그러나 이미 낡아버린 시간은 곧 자신이다. 이렇듯 이용한의 시에서는 의식의 흐름을 육체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의 시에서 현실이란 스쳐지나가는 것들로부터의 이별, 견뎌내야 하는 고통, 되풀이, 홀로 남겨진 어둠을 향하는 과정이다.
그곳에서 자신을 통과해버린, 후두둑 지나쳐 버린 것들은 모두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잊게 해줄 뿐, 낫게 하진 않아요”(「약국여자」), “나를 문밖으로 밀어낸 건 당신이고,/ 절벽은 가파른 거니까/ 그냥 잠깐 흩날린 거라고 생각해/ 모든 것이 후두둑, 살구꽃처럼 졌다고,”(「목요일은 아프다」) 말해주는 타자 역시 그의 시에선 고통의 시간인 것이다.
짐짝 같은 영혼이 육체를 밀고
몸 밖의 낡고 헐거운 풍경을 건너
이쯤에서 이제 지나간 당신을 폐차합니다
아무래도 이번 세상에선 내가 너무 늦었으니,
늦은 것에 대해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인생은 기다리는 것이지만,
기다림 다한 길들은 여기서 다 저뭅니다.
-「통리행」 부분
이용한의 시집 『안녕, 후두둑 씨』의 무수한 풍경의 이야기는 어느 날 우리의 창가에 비친 ‘후두둑 씨’의 존재이다. 후두둑 씨는 무수한 이야기들의 열려있는 시간이며 지난 기억을, 다가올 시간을 ‘기웃’거리는 슬픔의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후두둑 씨’는 “관념적”이며 “뿌옇”지만 “페이지마다 총총 그늘진 발자국”을 남기며 “추억의 행간을”, “몸 밖의 낡고 헐거운 풍경”(「통리행」)을 건너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열광하거나 뜨거워지기를, 그것이 사랑이든 삶의 애착이든 항상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미 불꽃이 일다 사그라지는 작은 불씨처럼, 폭발 후, 열기가 식지 않은 잔해들을 바라보듯, 지나가버릴 시간들이 내게서 얼마나 멀리 떠나갈 것인가를 감지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중심에 속해있지 못했던, 그래서 살아남았고 그래서 우울했던 이 거리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뒤늦은 깨달음은 언제나 ‘후두둑’ 존재하고 있었던 길 위의 ‘당신’이다. 이곳에서 “두려운 바다의 열병”을 앓으며 “지독한 안개에 잠겨” 우리는 또 다시 “다가지 못한 바다의 시동”(「지독한 안개」)을 걸고 있는 것이다.*
2006 <시평> 가을호
출처, 네블, 카메라옵스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