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황인숙 시모음 1

휘수 Hwisu 2007. 3. 20. 07:10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어들고 싶게 하는

 

말의 힘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 보자!

 

겨울밤

나는 네 방에 음악을 불어넣는
늦봄의 바람이고 싶었다
그런데 수은 얼음 알갱이의 눈보라로
네 방을 질척질척 얼리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도 내가 춥다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은 황폐함
피로, 암울, 막막, 사납게
추위가 삶을 얼려 비트는 황폐함
그러면서도 질기게도
죽을 것 같지 않은 황폐함

모르는 별로 너 혼자
추방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 영혼을 뒤쫓는 것이
수은 얼음 알갱이의 눈보라라면?

아, 나는 네 영혼에 음악을 불어넣는
늦봄의 포근한 바람이고 싶었다

사실 나는 죽었는지 모른다.


나 덤으로

나, 지금
덤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런 것만 같아
나, 삭정이 끝에
무슨 실수로 얹힌
푸르죽죽한 순만 같아
나, 자꾸 기다리네
누구, 나, 툭 꺾으면
물기 하나 없는 줄거리 보고
기겁하여 팽개칠 거야
나, 지금 삭정이인 것 같아
핏톨들은 가랑잎으로 쓸려다니고
아, 나, 기다림을
끌어당기고
싶네.

 

출처, 간이역에이는시노을


1958년 서울 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당선

시집『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1988, 문학과지성사)

『슬픔이 나를 깨운다』(1992, 문학과지성사)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1994, 문학과지성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1998, 문학과지성사) 

산문집 『나는 고독하다』(1997, 문학동네)  

『육체는 슬퍼라』(2000, 푸른책들)

어른을 위한 동화 『지붕 위의 사람들』(2002, 문학동네)

1999년 동서문학상 수상

2005년 23회 김수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