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홍일표 시모음

휘수 Hwisu 2008. 6. 23. 14:00

쓸쓸한 부록


열매는 나무의 부록이다

금방 휴지통으로 날아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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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끈질기게 감나무 끝에서 버티는

농경시대의 유물이 있다

감나무의 뾰족한 주둥이를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벼랑 끝에서 허우적이는

오갈 데 없는 자의 손끝에서는

절규가 고압전류처럼 터진다

혹자는 절체절명의 야수가 으르렁거린다고 말한다

거품 물고 죽음과 대적하던

시퍼런 눈빛

지금 허공으로 뛰어올라 나뭇가지를 물고 버르적거린다

유목의 발을 잘라내고 공장 구석에 둥지를 튼

몽골 사내

온몸이 까치밥이 되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여섯 달 만에 이방의 휴지통에 버려졌다

초원의 바람이 새똥처럼 떨어뜨리고 간

첨부파일 한 장

여러 날 뒤적여도

사라진 손목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리토피아> 2008년 봄호

   
 날씬한 자본주의


상가 대형 유리창은 하루에도 수천 장씩 풍경을 삼키는

대식가다

끝없이 배를 채운다

오토바이, 승용차, 행인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대도

언제나 날씬하고, 뒤가 깨끗하다

배설물도 없고, 기억도 하지 않는다

순간, 순간을 먹어치우는

저 지루한 운명은 쉼 없이 반복된다

내가 노예냐고, 내가 짐승이냐고 따져 묻지 않는다

유리창의 커다란 입에 제물로 바쳐지는

오늘 그리고 내일

저장되지 않는 발자국, 손자국들이 풀풀 먼지처럼 날아다니다가

투명한 유리를 통과하며

간단명료하게 죽음을 완성한다

상가 대형 유리창은 수천수만의 유령이 들락거리는,

뼛조각 하나 없이

텅 빈 유리관만 남은 공동묘지.

차가운 가슴뿐인 유리창은 허연 눈을 희뜩거리며

또 다시 누군가의 그림자를 조용히 삼킨다


현대시 2007년 12월호

2008 오늘의 좋은시 푸른사상                         

 

용을 잡다


가회동 한옥이 뜯겨나간다

지붕의 기와부터 한 장 한 장 날아간다

누가 용의 비늘을 뜯어내는가

근처의 까치들이 떼 지어 시위하듯 울어댄다

풀썩, 고가 한 채 주저앉으며

마지막 숨을 내려놓는 순간

뿌연 먼지 사이로

거대한 용 한 마리 요동치며 날아간다

수백 년 웅크리고 있던

유구한 시름의 동굴이 통째로 날아간다

잠깐 사이

몸을 바꾸어 스스로 멸한 자리

포크레인이 달려들어 용의 구옥을 물어뜯는다

우적우적 부수어 삼키는

야만의 아가리

영영 배부르지 않을, 늘 껍데기만 씹고 있을

슬픈 짐승

가회동을 뒤로 하고, 연줄에 끌려 둥둥 계동 언덕으로 오른다

비로소 눈 안에 들어오는

눈부신 폐허,

붉은 용의 꼬리가 휙휙 허공을 치며

하늘 깊숙이 몸을 밀어 넣는 순간

누군가 용의 기다란 수염을 팽팽히 잡아당긴다

머물 수도, 떠날 수도 없이 오르락내리락

빼곡한 한옥 사이 뻥 뚫린 구멍이 큰 눈을 감았다 뜬다


<문학사상> 2007년 3월호                       

                         

살아있는 지팡이

 

땅에 꽂은 지팡이가 고령의 나무가 되어 자란다

아무도 믿지 않는 사실,

나는 나무의 부활을 믿는다

죽은 나무에 싹이 나는 건

지팡이를 쥐고 있던 이의 손에서 흘러나온 맥박이

갈라진 나무 틈으로 몰래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은밀히 내통했기 때문이다

잘린 몸통이 마지막 숨을 내려놓지 못하고 싹을 틔운 것도

맥박 소리에 덩달아 가슴이 뛰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지팡이는

팔순 노인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쓰러져가는 저녁 햇살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인다

이제 지팡이는 욕망의 긴 목도장木圖章이다

어디를 가든 주둥이 끝으로 쿵쿵,

몸속에 충전된 심장 소리를 뱉어낸다

버리는 순간 바로 쓰러지고 마는,

사방으로 내딛는 生의 버팀목

저녁해가 지팡이를 짚고 뚜벅뚜벅 걸어간다      

                                                                              

1988년 <심상> 신인상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안개, 그 사랑법> <순환선> <혼자 가는 길>,
산문집 <죽사발 웃음 밥사발 눈물>, 민담집 <산을 잡아 오너라>
<닭을 빌려타고 가지> <살바도르 달리風의 낮달> 등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