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숙 시모음
1965년 경북 포항출생
부산여자대학 졸업
2006년 <시안>으로 등단
동백피다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에는 내가 즐겨듣는 노래가 있지 노래가 나오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해마다 바람이 그려놓은 악보들이 마당에 두껍게 쌓여 있지 바랭이, 개망초의 전주곡이 끝난 자리에 이름 모를 풀꽃들이 스스로 지닌 음계를 타고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피었다 지고 도돌이표를 따라 한 무리의 별들이 쏟아져 내리며 합창을 들려주기도 하지
나만 아는 그 집에는 오래 전 당신이 부르던 노래가 있었지 노래가 흘러나오던 입술을 열고 들어서면 잡풀만 무성한 마당, 저음 또는 고음이 가진 당신과 나의 불안한 옥타브를 베어버린 킬링필드, 그 들판에 우리의 노래는 이미 죽고 남은 몇 음절의 노래가 미완으로 남아 있지 달빛만 조명처럼 출렁이었다 사라지는 빈 무대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당신의 노래를 기다리고 있던 겨울 날
집과 집의 경계를 깔고 앉아 당신의 지문이 묻은 악보를 뒤적이는데 성성 날리는 눈발이 피날레를 예고하더니 담벼락 밑에 서 있던 늙은 가수 하나가 목울대를 세우고 붉은 노래를 낭창낭창 부르기 시작했지 그 틈을 타고 오래 가두어둔 한 음절을 기침이 쏟아지도록 따라 불렀지 눈발 속에 당신이 붉게붉게 피고 있었지
에코다잉(eco-dying)
죽은 자를 방부제로 닦아가며 불멸의 사랑을 지켜가는 누군가가 이 지상에 있다는데 나는 오늘 일몰이 보이는 구릉 어디쯤 사람 하나 심고 왔네. 큰 삽으로 그가 밟던 땅 밑으로 길을 내고 꽃분 같은 뼛가루 뿌린 자리에 어린 굴참나무 한 그루 심어 두었네. 하관하는 뿌리에 진혼의 말 동여매는 것도 잊지 않았네. 저 굴참나무 자라서 가지마다 무성하게 흔들리면 그 사람 손짓으로 보이겠네. 햇살이 잎잎을 들추면 푸른 목소리 수런수런 들리겠네. 바람이 불 때마다 목덜미 뜨겁게 하던 입김이 내게 와서 닿겠네. 그 나무 그늘 아래서 잠들었다 깨면 꿈속인 듯 품속인 듯 하겠네.
*에코다잉 : 시신을 화장한 뒤 남은 뼛가루를 산 . 바다 등에 뿌리는 것을 뜻하며 수목장. 해양장. 정원장이 대표적인 에코다잉형 장례 형식이다
바코드
간단한 자기 소개서와 이력을 제출하라 한다
A4용지 한 장의 분량으로 써라 하니
웃음이 나온다
마흔 해의 이력을
A4용지 한 장에 어떻게 다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초등학교 졸업이 언제였더라 손가락으로 꼽다가
책상 한 쪽 구석에서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는
먹다만 새우깡 겉봉에 찍힌 바코드를 본다
저 굵고 가느다란 세로 줄에 기록 된 것은
새우의 함량이라든가 출고 일자 혹은
숫자로 드러나는 가격에 불과할 뿐
비닐봉지 안에 갇힌
공기의 질량이나 내게 오기까지의 경로를
기록할 수 없다
어느 겨울 날
찬물에 돌미나리를 씻으며 울고 싶었던 이유가
시린 손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한 줄의 좁은 칸에
다 적을 수 없는 것처럼 지나간 나를
이 작은 칸 안에 모두 말 할 수는 없다
길 위에서 버려진 신발이 몇 켤레였는지
밟아온 길을 일으켜 세워 바코드를 만든다
고음으로 내질렀던 푸른 날의 한 때를
세로로 긋다가 올려다 본 하늘
정오의 햇살이 내 몸의 바코드를 환하게 찍고 간다
집 한 채
문이 문턱을 갋아먹기 시작하대요
얼마 후 문틀도 비틀리고 바람이 들더라구요
그 때까지도 바닥은 뜨거웠고
골골骨骨마다 온기가 돌았지요
어느 새, 모서리와 모서리에 거미줄이 걸리고
찬 기운이 천장가지 차 오르는 거에요
집은 통증으로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어요
X-ray를 찍어요
빛이 몸을 관통할 때마다
하얀 가운의 남자는 소견을 말하지요
흑백의 명암으로는 알 수 없는
뭔가가 이 안에 있어요
뼈와 뼈 사이, 그 안쪽
불온한 수맥이 흐르고 있어요
온기를 들여야 해요
오래 방치해 둔 몸에 전원을 넣어요
발화되는 불꽃
몸 안으로 뻗은 배관으로 뜨거운 빛이 흘러요
빈 벽에 그림도 한 점 걸어두어요
아랫목이 따뜻해와요
발가락에 피가 돌아요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