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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의 나비 / 한승원

휘수 Hwisu 2006. 3. 11. 17:14
함평의 나비

함평의 나비를 보러 가면서, 지구 상의 최고봉에 죽음을 무릅쓰고 오르고 난 한 등산가가 한 말을 떠올린다.


“내가 그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내 짐을 짊어지고 뒤따라와준 이곳 원주민 짐꾼들의 덕분이다. 그들에게 이 공적을 돌리고 싶다.”
커다란 영광을 안은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를 도와준 짐꾼들을 들먹거리지도 않는다. 자기가 짐꾼들을 이용했음을 창피하게 여기고 숨기려 한다. 그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이룩한 듯 군림하려고 든다. 그것은 배반이다.
세상에 이러한 우스게 말이 떠돈다. 대개의 남자들은 옹색하던 시절을 벗어나 팔자가 늘어지면 맨 먼저 자동차를 바꾸고 좀 더 늘어지면 집을 바꾸고 더욱 더 넉넉하게 늘어지면 아내를 바꾼다고.
자기 짐을 짊어져다가 준 짐꾼을 재빨리 과감하게 배반할 줄 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잘 산다고 알려져 있다.


새 국회 개원식장에는 2백99명의 나비들이 모여들 것이다. 영광스럽고 화려할 터이다. 한데 그 자리에 서기 전에 그들은 한 개 한 개의 알, 한 마리 한 마리의 기는 벌레였고 각질 안에 갇혀 있던 번데기였음을 알고 있을까. 시장으로 거리로 노인당으로 논밭으로 부두로 휘돌아 다니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손을 잡아흔들고 가화같은 웃음을 뿌린 한 표 한 표의 구걸자였음을 기억하고 있을까. 계절을 바꾸려는 훈훈한 바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변태할 수 있었음을 알아차렸까. `당선사례''라는 종이쪽들을 전주에 붙인 다음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탱자나무 잎에서 애벌레들이 붙어 있다. 그 징그러운 벌레가 장차 아름답고 화려한 무늬의 호랑나비가 된다. 배추와 무 이파리에는 끊임없이 벌레들이 생긴다. 그것들이 흰나비와 노랑나비가 된다. 나비는 따지고 보면 귀찮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꽃의 열매를 맺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국회의원도 그렇지 않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머니 배 속에서 나와 기저귀차고 젖 빨아먹고 개구장이 노릇하고 공부하기 싫어 종아리 맞고 사랑방에서 불장난하다가 집을 홀랑 태울뻔하고 술 마시고 주정하고 사람 두들겨패고......그러다가 이 자리에까지 와 있는 것 아닌가.
내가 한 마리 애벌레이고 번데기였음을 알기 위하여, 내 짐꾼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음을 참담하게 배우기 위하여 함평 나비 보러간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이 시조에서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청산엘 가는데 하필 나비하고 함께 간다. 나비는 흔히 묶여 있는 삶에서 놓여난 자유자재의 삶을 상징한다.
밤새도록 잠 못이루고 엎치락뒤치락하고 났을 때, 세상이 참으로 덧없다고 느껴졌을 때, 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나비 보러 함평에 간다.


바야흐로 세상 사람들의 삶은 눈앞에 보이는 이득,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 나와 내 가족들만 잘먹고 잘사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값비싼 보석과 화려한 옷과 가전제품과 자동차와 맛갈스럽고 향기로운 음식과 마약같은 술과 도박과 춤과 노래와 스포츠와 힘든 일하지 않고 놀고 먹기와 여행과 섹스 즐기기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즐기기 위해 돈을 훔치고, 서로를 속이고 죽인다. 아내가 남편의 이름으로 보험을 들어 놓고 청부살인을 한 다음 타낸 보험금으로 샛서방과 잘 먹고 잘 살려다가 들통이 난다. 반대로 남편이 아내의 이름으로 보험 들고 청부살인을 했다가 들통이 난다.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알수 없는 불가사의는 `나''라는 존재이다. 거울에 비치는 나와, 내가 꼬집어보면 아픔을 느끼는 나는 눈에 보이는 나인데,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보이지 않고 손끝에 감지되지 않는 내가 있다. 내 몸 속에 또 하나의 알수없는 내가 들어 있다.

나비가 무엇인지 알려면 장자를 읽어야 한다.
장자는 어느날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자신이 장자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문득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나비가 아니라 장자인 것이었다. 장자는 생각했다. 아까 꿈에 나비가 되었을 때에 나는 내가 장자인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꿈에서 깨고 보니 나는 분명 장자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정말 장자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장자가 된 것인가. 지금의 나는 과연 정말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나로 변한 것인가.

비유의 천재인 장자를 간단히 허무주의자로 폄하하지 말 일이다. 그는 적어도 억지 바락바락 써가면서 세상을 물리적으로 개조하겠다든지, 세상의 돈과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고 하늘을 잡고 뙈기를 치겠다고 덤벼드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의미와 가치 있는 일이 아님을 가르쳐주는 사람이다.

끼리나 황소와 나비를 비교해보면 나비가 몇 만 배로 가볍다. 그러나 코끼리와 황소는 허공의 세상을 알지 못하는데 나비는 안다. 가벼운 몸으로 허공을 날아다닌다는 것은 우주의 텅 비어 있음(허적·虛寂)과 초월을 안다는 것이다.
나비의 시간은 네 개의 마디로 나뉘어 있다. 첫째 알로서 정지해 있는 잠의 시간, 두번째 끈적거리는 흉칙한 애벌레로서 기어다니며 풀잎사귀를 뜯어먹는 꿈틀거림의 시간, 세번째 집을 짓고 들어가 번데기로서 잠을 자며 기다리는 시간, 네번째 번데기에서 나와 깨끗하고 화사하고 현란한 날개를 팔랑거리며 허공을 날아다니고 꽃 속에 빨대를 들이밀어 꿀과 향을 빨아먹는, 꿈꾸는 자 즉 초월자처럼 유유자적하는 시간.

나비의 변태. 그것은 윤회하는 삶을 가르친다.
모든 것은 돌고 돈다. 봄철의 꽃이 여름 가을에 열매로 변하고 겨울 동안 씨로서 기다리고 있다가 봄이 되면 다시 꽃으로 피어난다. 그 꽃은 다시 열매가 되어 씨를 머금는다.
바닷물은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구름은 육지의 들과 산에 비를 뿌리고 빗물은 지표면을 흐르거나 지하수가 되어 흘러 다시 바다로 되돌아간다.
나팔꽃 덩굴은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가고 소라고둥의 나선은 오른쪽으로 돈다. 사람의 머리 속에 있는 가마도 오른쪽으로 돈다. 해류도 돈다. 회호리바람도 태풍의 눈도 오른쪽으로 돈다.

남성의 정자가 여성의 자궁 속의 난자로 들어가고, 난자는 곡옥 모양 혹은 올챙이 모양새의 생명체로 자라고 그것은 아기로 자라나고 열달만에 자궁 밖으로 나온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왜 돌고 돌까. 지구가 돌기 때문이고 우주가 돌기 때문이다. 겨자씨의 율동과 우주의 율동은 닮았다. 불교인들은 전생과 현생의 삶과 돌아올 내세의 삶이 있어 거듭 윤회하곤 한다고 믿는다.

함평의 나비는 어린이 어른 남성 여성 늙은이 젊은이 모두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어린이들에게는 꿈을 주고 어른들에게는 마음 비우고 사는 훈련을 하게 한다.
나비들은 얼마나 깨끗하고 화사하고 아름다운가. 사향제비나비, 붉은점 모시나비, 담색어리 표범 나비, 긴꼬리 제비나비, 검은 천사나비, 호랑나비, 노랑나미, 흰 나비......그러나 그 화사하고 현란한 문양의 날개를 가진 나비들은, 자기들이 한 마리 한 마리의 흉칙한 벌레들이었고, 각질 속에 잠자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주름살 많은 번데기들이었음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yulsan490@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