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국 시모음
1971 태백출생
2003 문학사상 등단
우리들의 바벨탑
- 부재시편 5
라면을 끓이다가
쉬익쉬익 끓어오르는 양은냄비를 보다가
문득 엔터키를 누르고 싶어졌다
그때 우리들의 사랑은
끓는 냄비처럼 불온했으므로
숨막히는 고딕체로
서로의 가슴에 새겨대던
우리들의 바벨탑
뚜껑을 열어 라면을 넣으며
봉해 둔 마음까지 탈탈 털어넣는다
이렇게 삶은 덧없고
추억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저마다 밥벌이로
가족들에게로 애써 돌아서지만
몇 걸음 못 가 구두끈이 풀어지는 사람들
감자탕집은 한 구석이 텅 비어버리고
소주는 조금씩 쓴맛을 잃어버리고
면발이 풀어지기 전에 스프를 뿌리고
익기를 기다려 계란을 풀어 넣는다
라면 끓이는 일조차 사랑이고 헌신이었던
아무도 추억을 염려하지 않았던 시절
김치통에 환하게 묻어 나올 때
나는 돌아가 엔터키를 누르고 싶어졌다
어떤 여백도 다치지 않아 눈물겨웠던
깨알같은 우리들의 바벨탑을 위하여.
4월
애인과 섹스하다 돌아보니 사월이었다
여자는 할퀴거나 깨물기를 즐겨서
멍든 자리마다 대나무가 꽃을 피우고
오랜 집중이 요구되었던 체위들 사이로
폭설이 내리는 풍경이 삽입되었다가는
산산조각으로 깨져나가곤 했다
목련은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리는 데
애인은 몇 시 기차를 타고 떠나갔을까
열차표를 손에 쥐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보니 서른이었다
애인과 섹스만 했는데도 사월이 오고
방구석은 어느새 절벽이 되었고
책상과 침대가 까마득한 곳에 떠 있었다
누가 겨울 내내 우물을 파놓은 것일까
애인과 섹스한 것은 분명히 죄는 아닌데
그러면 내가 녹아 물이되어 흘러야지
생각했을 때 어머니가 달려들어와
나이는 뒷구녕으로 쳐먹냐고 욕했다
그래 누가 내 몸에 고운 흙을 채워다오
꼬불꼬불 꽃 한 송이라도 피워 올리게
애인과 섹스하지 않아도 사월이 왔을까
피도 눈물도 없이 저리도록 아름다운 혁명도 없이
새에 관한 명상 2
누가 벗어놓은 허물일까
버스 정류장에
외투 하나 버려져 있다
소각장에서 태워질 운명을
거부하는 듯, 두 팔은
어둠을 움켜 쥐고
머리는 하늘로 쳐들고 있다
소매 끝부터
몸을 비튼 흔적이 가파르다
몸은 어느 골목에 웅크려
관절을 꿈꾸고, 외투는
비상을 꿈꾸고 있다
어둠도 겨드랑이 한 켠을
어쩌지 못하고
사람들을 물러서게 하는 저녁
자동차들의 불빛 속으로
조바심을 치며 걸어 오는
취기 어린 눈동자들 속으로
날아오를 듯 날아오를 듯
힘겨운 외투의 비상을
대견하다는 눈으로
가로등 불빛이 하나 남은 단추를
훈장처럼 닦아주고 있다
우우, 바람이 불고
정류장 지붕 위로 검은 새 날아 오르고 있다
실종
누워 있는 남자의 입으로 공기가 밀려 들어간다 느릿느릿 기다려왔다는 듯이 열린 식도를 통과해 간다 곧 저 공기는 남자의 꼬리뼈에서 마지막 흔적을 밀어내리라 남겨질 한 줌의 질척함을 비둘기가 안다는 듯 고개 주억거리며 지나간다 십분 전 그는 마지막 담배를 피웠으리라 손끝이 다 타들어갈 때쯤 모든 회한과 환멸을 떨어뜨리고 수도승처럼 신문지 위에 누웠으리 그의 잠을 깨우던 굉음이 떠나가고 세상이 그를 정적 속으로 초대한 것이다 한때 그를 빛나게 했던 꿈의 이마는 꼬깃꼬깃 접혀 있다 어쩌면 저녁거리의 불빛들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까 하지만 모로 누워 웅크린 자세는 무언가 단단히 그러쥔 손아귀처럼 보이는데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안식을 단 한 번의 눈길로 스치는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이 소리 없는 잔혹 앞에서야 모든 궁극적인 질문은 보편성을 얻는가 공기가 지나간 그의 몸을 얼룩진 신문의 활자들이 더듬더듬 읽으며 덮어주고 있다
과월호가 되어 버린 남자
어떤 페이지도 중력을 견디지 못했다
어두운 날들에도 일련번호가 있는지
느닷없이 그는 밑줄 그어졌다
휙휙 날아와 꽂히는 저녁 어스름
책갈피인양 어느 페이지에
자신을 끼워 넣어 보기도 하지만
너무 쉽게 흘러내린다 어떤 조심도
소용없었다 그는 납작해졌다
창문들마다 썩은 잎을 매달고 있다
문지르면 쓱 지워질 것 같다
낡은 표지의 초상화들과
썩은 잎의 무늬들은 닮아 있다
그는 페이지를 넘기며
무심코 뱉은 회한들을 들여다본다
언제 끼워 넣은 이파리일까 잎맥들이
활자들을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다
가난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
뒷모습을 인화하던 거울이 움푹 패여 있다
어느 페이지에서 그는 몸을 던진 것일까
오래된 서가에 일련번호로 눕혀졌던 날들이
흐린 명조체로 어둠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